능력의 십자가

날짜: 
2010/08/29
설교: 

갈6:14 능력의 십자가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악한 죄인을 사형시키는 잔인한 형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핵심은 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드라큘라와 같은 악령을 쫓는 '부적'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목걸이 같은 '장신구의 일종'이라고 말합니다.
한 자매님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십자가는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자 그 자매님이 "알겠어요. 목사님, 이제부터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겠어요." 하면서 십자가 목걸이를 뒤로 획 돌리면서 십자가 목걸이를 지고 가는 시늉까지 했습니다. 물론 장난으로 한 행동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아주 가까이 대하면서도 십자가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죄를 지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돈이 필요하다면 돈 없는 거지나 가난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구원을 받기 위해 고상한 학식이 필요하다면 일자 무식쟁이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기 위해 키가 크고 인물이 잘나야 한다면 아주 억울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물에 자신이 없어 거울을 보면 항상 기분이 별론데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하면 하나님 믿고 싶은 생각이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반감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조건들이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깊은 강물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어 그를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현장이 바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그는 구원을 얻습니다. 참 간단합니다. 복음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가장 간단한 구원의 방법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구원의 방법이 너무 간단하여 오히려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하는 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학교 시험에 이런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석탄으로 알코올을 얻는 방법을 기술하시오." 학생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화학부호도, 어떤 화학 방정식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험은 빵점(Fail)이 나올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할 수 없어 학생은 이렇게 답을 적어놓고 나왔습니다. "석탄을 팔아 얻은 돈으로 알코올을 사면된다."
이 답안을 보고 교수님의 호된 꾸지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교수님은 가장 간단하고 쉬운 알코올 입수 방법이라고 웃으면서 점수를 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유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이러한 복잡한 화학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것이라면 감히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행입니다. 구원의 방법은 우리의 노력이나 실력이 없어도 됩니다. 예수님이 이루어놓으신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구원의 방법이 너무 간단하여 지식이 있는 사람은 "뭐 이런 게 다 있느냐?"고 웃을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의 복음이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벌거벗은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그 조각상의 주인공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내 팬티 누가 훔쳐 갔나? 사각팬티를 입을까? 삼각팬티를 입을까?" 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 조각상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 앞에서 한 사람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 조각상입니다.
그러나 이 조각상은 난센스입니다. 왜 그럴까요? 지옥 앞에서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입니다. 생각 하려면 죽고 난 후 지옥 앞에서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 지옥문에 도달하기 전에 생각해야 합니다. 지옥문 앞에서 생각하면 너무 늦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이 '지옥'이란 원색적인 표현을 쓰면 지성인의 수치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유치한 일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성경은 천국도 존재하지만 지옥도 존재한다고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국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지옥의 존재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입니다.
한국에는 군대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군대에 갔다 오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그 기간은 자유가 속박당하는 기간입니다. 군대에서는 자고 싶을 때에 잘 수가 없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가고 싶은 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군인을 '군발이'라고 무시하기도 합니다. 하여간 어느 나라 군대든지 그곳에는 고생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국의 청년들 중에는 군대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쓴다고 합니다. 다리의 연골을 자른 사람도 있습니다. 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기는데 필요한 둘째손가락을 자른 사람도 있습니다. 별별 기상천외한 수단을 다하여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곳이 너무나 불편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9)
무슨 뜻입니까? 지옥은 편안한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 하나 없애서라도, 팔 하나 없애서라도, 절대로 가서는 안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 간단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조롱하고 믿지 않다가 구원을 놓치고 지옥에 갈 것인가를 스스로 알아서 선택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앞에 독약이 든 컵이 있는데 "이것은 독약입니다. 먹든지 먹지 않든지 알아서 선택하십시오."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합니다. 아니 오히려 범죄행위입니다. 만약 누가 그 독약을 먹겠다고 하면 멱살을 잡고서라도 말려야 합니다. 혼자의 힘으로 말릴 수 없다면 여럿의 힘을 빌어서라도 말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를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사명은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서도 계속 되어야 합니다." 나만 독약 먹지 않고 살면 됐지, 다른 사람들은 내가 알게 뭐야?"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진짜 지성인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책임을 저버린 비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구원을 전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십자가는 두 가지를 외치고 있습니다. 첫째, 너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치면서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해도, 또한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도 십자가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고발합니다. 그러한 죄인은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한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란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보통 자신의 조그만 죄는 인정하지만 "너는 죽을 죄인이다."라는 말에는 반항합니다. "내가 왜 죽을 죄인인가?" 하면서 반발합니다. 더구나 "너는 아무 희망도 없다."라는 말을 들으면 "왜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냐?"고 항의합니다.
시카고 근교에 헤몬드 제일침례교가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주일학교가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교회 강대상 앞에 큰 방탄유리가 놓여 있습니다. 왜 그런 큰 방탄유리를 그곳에 설치했을까요? 안내원이 대답합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이 하도 죄의 문제를 강하게 다루니까 그 죄의 고발을 듣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어서 목사님을 향해 권총을 쏘려고 한 일이 두 번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렇듯 사람들은 "너는 죄인이다."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죄인이라고 하면 화를 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우리가 죽을 죄인이라고 고발합니다. 이 십자가 앞에서 두 가지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하면서 분노하고 떠나가든지, 아니면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다행히 저와 여러분들은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그 십자자로 말미암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양심적인 사람이요, 참 지성인입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님의 능력의 십자가를 최선을 다하여 전하시다가 하늘나라에 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