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사랑합니다.

날짜: 
2007/09/23
설교: 

행13:1-3 달라도 사랑합니다.
어느 남자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제 아내와 이혼을 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둘은 너무나도 서로가 맞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결혼한 지 35년 되었는데 신혼의 달콤한 시절 몇 달 외에는 행복을 거의 맛보지 못했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남편은 좀더 자세하게 목사님에게 이혼의 이유를 열거했습니다.
“우리 둘은 성격이 너무나도 다릅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반 정도 남았으면 저는 돈이 더 드는 것이 아니니까 미리 미리 채워서 항상 풍성한 마음으로 살아야 편안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기름을 다 쓰고 나서 채우면 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 되냐면서 편안하게 살자고 합니다. 지난 번 교회를 오면서도 저는 기름이 거의 바닥이 나서 불안하다고 하고, 아내는 그만하면 교회를 왕복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하다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어제 저는 고속도로를 아내와 세 시간 동안을 달렸습니다. 그 세 시간동안 일초도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 있었습니다. 150 킬로로 달리면서 순간적으로 차를 틀어서 동반 자살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차하면 죽는 순간순간을 세 시간 동안을 보냈습니다. 저는 아내와 너무 다릅니다. 적과의 동침이 35년인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날의 많은 부부들이 이혼을 하는 큰 이유를 알게 됩니다. 다름 아닌 성격차이입니다. 앞서 말한 부부처럼 부부가 생각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서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즉 부부가 달라서 이혼을 한다면 이 세상에 이혼을 안 할 부부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즉 상대방이 나와 달라서 미워하고 죽이느냐, 아니면 상대방이 나와 다르기에 그를 좋아하고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몇 년 전 미국의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이 폭발된 후에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두 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새뮤얼 헌팅톤이 쓴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문명이 다르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아랍과 미국이 달라서, 회교와 기독교가 달라서,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서 충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잘 팔렸던 다른 책은 해럴트 밀러가 쓴 ‘문명의 공존’이라는 책입니다. 아무리 달라도 사람들은 공통분모를 찾아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문명은 공존하여야 한다는 책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견해가 맞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문명이 달라서 충돌하는 것입니까? 문명이 다르기에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까? 상대방이 나와 다르기에 그 사람을 죽여야 합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나와 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아내가 나와 다르기에 이혼을 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온통 다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 다르다고 싸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하나가 된 교회입니다. ① 귀족과 서민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나엔은 왕의 동생입니다. 그런데 시므온은 노예입니다. 왕의 동생인 귀족과 노예가 한 교회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②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울과 마나엔은 유대인이고, 시므온과 바나바와 루시오는 이방인입니다. 서로 피가 완전히 다른 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③ 흑인과 백인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시므온은 니게르 즉 흑인입니다. 흑인이 백인 교회에 들어와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④ 무식자와 유식자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초등학교도 못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었습니다. 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나엔은 재벌입니다. 시므온은 무일푼으로 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었습니다.
⑥ 기신자와 초신자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제 금방 예수님을 영접한 초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둘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⑦ 신비주의적 믿음을 가진 이와 이성적인 믿음을 가진 이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가보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고 방언하는 신비주의 믿음을 가진 이였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이성적인 냉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같이 안디옥 교회는 같은 사람이 없는데 모두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문명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입니다. 즉 달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다르기에 더 좋을 수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한 가지 꽃만 있는 꽃밭과 각종 다른 꽃들이 조화를 이룬 꽃밭이 어느 것이 더 보기에 좋을까요?
여러분, 부부는 서로 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은 서로 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민족은 달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피부 색깔은 달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조상이 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달라도 사랑할 수 있을까요?
1. 목적이 같으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그렇게 구성분자들이 다양한 데도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목적이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영혼을 구원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으로 하나가 된 교회였습니다. 목적이 같은데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다같이 그 일을 하면 됩니다.
물론 목적이 같아도 그 목적을 이루는 순서나 절차나 방법과 의견이 서로 다르므로 싸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교를 할 때 어떤 사람은 먼저 구제를 하면서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고아원과 양로원을 세우는데 선교비가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선교가 아니므로 일단 교회 건물을 세우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전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방법론에 대한 의견의 충돌들은 서로가 대화를 하고, 양보도 하고, 순종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충분히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똑같은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목적이 같은 한 우리는 방법론에 대한 차이를 극복하고 서로 하나가 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창조 법칙을 알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아예 모든 것을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땅 아래 생물, 땅위에 각종 짐승들, 그리고 공중에 나는 새들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종에도 다른 종류를 만드셨습니다. 앵무새만 하더라도 수백 수천 종이 있고, 뱀도 수백 수천 종이 있고, 난초도 수백 수천 종이 있고, 국화도 수백 수천 종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이 검다고 하는 흑인도 언뜻 보기에 다 같아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도 진짜 새까맣게 검은 사람이 있고, 동양 사람보다 하얀 흑인도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람을 기계로 찍지 않으시고 손으로 빚으셨습니다. 즉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체질이 다릅니다. 똑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법칙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사는 것입니다. 나와 똑같아야 같이 산다고 하면 흑인과 백인은 서로 죽여야 하고,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은 서로 죽여야 하고, 못 생긴 사람과 잘난 사람도 서로 죽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류는 파멸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과 어긋납니다.
하나님의 창조 법칙은 너와 내가 다른 것입니다. 회의를 하다가 의견이 달라도 당연한 것입니다. 똑같으면 회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의견이 나와도 “다른 것이 당연하다.”라고 인정하여야 합니다. 부부가 달라도 “그래, 다른 것이 당연하다.”라고 인정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법칙을 알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을 중간에 넣으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물건을 붙여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풀, 본드, 접착제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붙여주는 초강력 접착제입니다. 예수님이 들어 간 곳은 원수가 친구가 됩니다. 둘이 하나가 됩니다. 막힌 담이 허물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3-18)
안디옥 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이질적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목적이 같았고, 예수님을 잘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살면서 서로의 성격이 다르다고 수없이 이혼을 하려고 해도 사랑하는 자녀 때문에 이혼을 못한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남편은 아내와 이혼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아기를 갖습니다.
우리에게도 사랑하는 예수님이 있으면 그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서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미운 사람도 예수님을 넣어서 바라보면 그 미운 사람도 예쁘게 보이고 불쌍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을 내 감정, 내 성격, 내 생각, 내 상처를 가지고 바라보면
더 미워지기도 합니다. 결국 자기도 못살고 남도 못살게 됩니다. 고로 중간에 예수님의 인격을 넣고,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사랑을 넣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니 달라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존이 가능하고 상생이 가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1. 목적이 같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창조 법칙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을 중간에 넣어야 합니다. 이민 사회, 이민 교회는 서로가 많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