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버림을 당할 때

날짜: 
2012/06/11
설교: 

마27:46 당신이 버림받을 때
'베티'라고 하는 한 여성이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어릴 때 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부모가 마침내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아버지가 문을 박차고 집을 떠난 마지막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바로 그녀가 세 살 되던 아기였을 때, 자기의 조그만 아기 침대 안에 있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부모님이 무섭게 다투던 소리와 함께 아버지가 집을 나가던 그 무서웠던 순간은 그녀에게 암과 같이 마음속 깊은 곳에 상처와 아픔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런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온 그녀에게 한 상담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베티, 당신이 그때 그 아기 침대에서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 것 같아요?" 그녀는 그 순간 세 살의 어린아이가 되어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아빠,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그녀의 이 소리를 듣고 상담자는 이런 외침을 연관시켰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러분, 이 외침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버림받을 때 부르짖으셨던 외침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짖으심이 바로 어린아이의 말로 표현해서 베티가 한 말과 너무나 똑 같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빠,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여러분, 우리는 각자 그 상처들이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베티와 같이 버림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잊지 마십시오. 바로 예수님도 나와 같은 버림받음을 이미 경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했던 제자들로 부터 버림 받으시고, 대제사장과 서기관, 기타 종교 지도자들 뿐에게서만 아니라, 수많은 군중들에게 버림받으시고 많은 모욕과 모멸감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사랑하는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은 엄청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 고통의 외침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러분,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버림받는 아픔을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나와 비교할 수 없는 버려짐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버림받았던 예수님이 나에게 이렇게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예수님만 그렇게 버림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도 버림당한 쓰디쓴 추억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자꾸 왕을 세워달라고 조릅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삼상8:7)
여러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때에 하나님이 직접 자신이 원하는 사사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통치하려고 하셨습니다. 그 사사 중 한 사람이 사무엘 선지자입니다. 훌륭한 사사였습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한 사람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앙으로 잘 지도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늙고 그의 두 아들인 요엘과 아비야가 아버지 사무엘의 뒤를 이어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 보기에 자격 미달입니다.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세운 사사가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합니다. 당신이 세운 사사 때문에 너무 힘이 듭니다. 사사를 고쳐주시든지,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모든 장로가 사무엘에게 나아가 왕을 세워달라고 조릅니다. 이성적으로 보면 그것 역시 타당한 요청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왕을 세워달라는 의도는 하나님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인간인 자신들이 왕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즉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도 자기가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버림을 당하는 슬픔과 아픔을 겪은 분입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호세아라는 신앙이 아주 좋은 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하나님이 호세아에게 행실이 매우 좋지 못하고 음란한 여자인 고멜에게 장가를 가라고 말씀했습니다. 호세아가 그렇게 하나님이 짝지어 준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두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멜이라는 여인이 아줌마가 되어서 음란끼가 발동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났습니다. 바람이 나자 그렇게 좋은 남편 호세아도 버렸습니다. 아이들도 엄마에게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남편을 버리고 아이들까지 버려서 그 남편과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가장 가까운 아내인 고멜이요, 가장 나를 사랑해주어야 할 엄마인 고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남편과 아이들을 버린 못된 고멜과 같은 여인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요,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도 하나님을 버린 아주 못된 사람들(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못된 연놈들')이라는 것입니다.
고로 그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이를 부드득 갈면서 "이놈, 네가 잘되나 두고 보자!" 하고 원한에 사무쳐 인상짓지 마십시오. 자신이 그렇게 버림당한 것은 큰 아픔입니다만, 그렇다고 인생이 그렇게 인상 짓고 살기에는 너무나 아깝습니다. 또한 솟아오르는 분노를 술과 세상의 방탕으로 풀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그때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그래, 나도 하나님을 버린 적이 있다. 나도 배신자였다. 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적이 있다. 주여,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를 버린 저 인간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자기의 백성에게 버림당한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해서 버림을 당하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 역시 그 누구보다도 버림당한 자의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로 버린 당한 아픔이 있는 여러분이여, 그때에는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과 같이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하나님, 나 아파요! 나 버림당했어요! 저를 위로해 주세요!" 하고 마음을 아뢰십시오.
구약성경 레위기 16장에 보면 '아사셀'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영어로 'Scapegoat'이고 한국어로 해석하면 '속죄양'입니다. 즉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에 버려진 양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절기 중에 7월10일에 거행된 대속죄일에는 두 마리의 염소가 제공됩니다. 그 하나는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 다른 하나는 속죄의 예식을 치루고 산 채로 광야로 버려집니다.
그렇게 광야에 버려진 염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혼자서 슬피 웁니다. "음마-" 그리고 결국 사나운 짐승의 먹이가 되어 비참히 죽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양이 되어 하나님께 버려지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다시 찾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잘 아시는 영어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에 나오는 가사의 내용입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예수님의 버림당하신 모습을 이사야 53장 3절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He was despised and rejected."(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아야 할 예수님은 도리어 인간들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지만 유대의 헤롯왕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로 오셨지만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장로들과 제사장들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적대와 싫어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버림당하여 죽기까지 한 아픔을 겪은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저와 여러분의 버림당한 아픔을 잘 아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아내, 불쌍합니다. 요즘은 아내에게서 버림받은 남편도 꽤 있습니다. 처량합니다. 더구나 외국 땅에서 버림을 받을 때의 그 비참함은 더욱 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모가 이혼을 할 때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버림을 당한 아픔을 겪습니다. 자존감의 파괴를 당합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세상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술과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합니다. 우울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행동이 적대적이고 파괴적이 되어 사회에 불안과 공포를 끼치기도 합니다.
버림받는 경험은 자신의 존재의 뿌리가 흔들리는 고통스런 경험입니다. 버림받는다는 것은 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버림당하는 것은 방황의 시작이요, 고독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버림받는 순간에 경험하는 것은 단절감입니다. 단절감은 무력감을 낳고, 무력감은 열등의식을 낳습니다. 버림받은 자신과 남아 있는 사람들을 비교하면서 갖는 열등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린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함께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됩니다. 버림받았다는 안경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순간, 인생 전체가 어둡게 보입니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하나님은 버림받은 사람들을 귀하게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또한 그가 충성스럽게 섬겼던 보디발 장군에게 버림받아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모세도 자기 동족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장인인 사울에게 버림받았고,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버림받는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버림당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한때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은 버림받은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을 잘 압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아픔을 아는 사람을 씁니다. 고로 당신이 버림받은 경험을 했다면 낙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귀히 쓰시기 위해 '버림받음'이라는 고통의 강을 통과하게 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고통이 사명을 감당하는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그들을 치료하는 치료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8)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해도 하나님은 나를 그 모습 그대로 품어줍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여전히 "사랑하는 자여!" 하고 다정스럽게 불러줍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 이유는 당신이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받아야 당신도 남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사람들이 나를 모두 좋아할 때에는 그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에 만족하다가 그만 진실 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놓칠 수 있습니다. 고로 때로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는 아픔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것이 더 유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남을 배신하고 버리는 것보다 내가 남에게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는 고통이 도리어 더 유익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버림당하신 쓰디쓴 고통이 아직도 여전히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까? 주님께 그 쓰리고 아픈 마음 부여잡고 고백하십시오. "주님, 저 또 버림당했어요. 그가 나를 싫다고 떠났어요. 나는 외로워요.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때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결코 버리지 않고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품에 안아주리라."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 다오.(찬317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찬31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찬338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찬337장)"
마21:33-42 건축자들의 버린 돌
요즘 머릿돌은 집을 지은 후에 설계자 감리자 날짜를 쓰는 돌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나 우리나라 옛날 집은 다릅니다. 땅을 큰 돌로 다집니다. 다음에 머릿돌을 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기둥을 세우고 나무를 연결하여 집을 짓습니다. 머릿돌은 집을 짓는데 가장 중요한 돌입니다. 머릿돌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머릿돌이 무너지면 집이 무너집니다. 건축자들이 한 돌을 보고 쓸모없다고 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도편수(집을 짓는 우두머리)가 와서 보니까 그 돌이 가장 좋은 돌입니다. 그래서 머릿돌로 썼습니다.
예전에 정몽준 의원이 대선 전날 노무현 대통령 후보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이튿날 노무현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로또 복권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십 억짜리 복권이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습니까? 우리는 모퉁잇돌을 알아보고 버리지 말아야합니다. 또한 우리가 버림받았을 때는 이미 버림받은 예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4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여기서 건축자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사회의 기득권자입니다. 기득권자들이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메시야를 연구하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그들의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하늘나라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지금은 성령을 보내셔서 그 왕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때 왕권을 가지고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이 있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을 아주 잘 만들었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망대를 만들어 도적이나 짐승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즙 짜는 틀을 만들어 그곳에서 가공도 하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었습니다. 농부들에게는 십일조의 세금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주인은 매우 큰 부자입니다. 세금이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주인은 세금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주인을 공경하는 마음을 원하였습니다. 주인은 농부들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를 원하였습니다. 농부들이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기를 원했습니다. 농부들을 진정 사랑하여 그들이 포도원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주인은 열매를 거두는 때가 되어 종들을 보내어 세금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세금 바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농사를 짓다보니 포도원에 대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주인이 보이지 않으니 자신이 주인행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을 공경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자신들이 차지하고자 하였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 하나는 때렸습니다. 두드려 패고 린치를 가하였습니다. 다른 종은 죽였습니다. 다른 종은 돌로 머리를 쳐서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습니다.
주인은 종들이 죽어 시체가 실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깁스를 한 종의 머리가 깨어져 죽어가는 종을 보았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심판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을 쉽게 심판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종들이 무엇을 잘못했나 생각하여 더욱 겸손한 종들을 보냈습니다. 주인은 종들의 수가 적어서 그런가 생각하고 처음보다 더 많은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농부들은 종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그래도 주인은 농부들을 쉽게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주인은 너무 사랑이 많아서 그들을 오래 참고 기다려주었습니다 주인은 바보 같습니다. 주인은 이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할 외아들입니다. 주인은 외아들은 주인처럼 존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상속자를 죽이고 포도원을 자신의 것으로 차지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주인이 심판하지 않자 주인은 무능력한 자로 보았습니다. 주인이 다시 그들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농부들은 큰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주인은 이제 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악한 자를 진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세 가지를 배웁니다.
1. 우리는 소작인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포도원을 맡기셨습니다. 우리의 생명 시간 직장 가족 양떼들은 모두가 우리의 포도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포도원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셔야합니다. 나는 포도원을 관리하는 소작인임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사랑해야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자신을 진정한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의 진정한 사장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교회의 진정한 목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가정에 진정한 가장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 때 하나님을 공경하고 십일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소작인으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주의 종들을 핍박하지 않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목자들을 주안에서 영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양들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2. 예수님을 머릿돌로 영접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건축자의 버린 돌은 주인의 외아들을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버린 아들을 살리셔서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사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온 세계에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습니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 되신 예수님을 우리의 머릿돌로 삼아야합니다. 에베소서 2장 20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6절에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퉁이 돌이십니다. 영원히 살아있는 산돌이십니다. 우리는 머릿돌 되신 예수님을 영접해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중심으로 집을 짓습니다. 돈을 중심으로 가족을 중심으로 사람을 중심으로 집을 짓습니다. 세상 학문을 중심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이런 집은 다 무너집니다. 우리는 머릿돌인 예수님을 중심으로 집을 지어야합니다.
예수님 위에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야합니다. 가정의 집을, 교회의 집을, 나라의 집을 예수님께 기초하여 지어야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인생관의 기둥을 올려야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계관의 서까래를 올려야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자녀를 교육해야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직장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집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집이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가다가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가자 40살 된 거지가 구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우리를 보라고 외쳤습니다. 그가 무슨 큰돈을 줄까하여 바라보았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가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러자 오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튿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모든 산헤드린 공회원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건강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모퉁이의 머릿돌 예수님은 실제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머릿돌 되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살아계십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십니다. 지금도 살아서 친히 일하십니다. 우리는 머릿돌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머릿돌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충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머릿돌 예수님을 버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쓸모없다고 내팽개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직장이나 돈 버는 일을 귀히 여깁니다. 가족은 귀히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버린 돌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이 돌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고 가루로 만들어 흩으십니다. 그들은 철저히 파멸하게 됩니다.
3. 우리는 버림받을 때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버린 돌이라는 것을 주목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쓰신 분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버린 돌이 되었습니다. 동족들에게 버림받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들은 버림받았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여러분 버림 받아보셨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 받아보셨습니까? 내가 믿고 의지하고 정성을 쏟은 사람에게 버림 받아보셨습니까?
목자는 양들에게 많이 버림받습니다. 양도 가끔 목자에게 버림받기까지 합니다. 가족들도 버릴 때가 있고, 친구들도 버릴 때가 있습니다. 함께 몇 십 년을 일하던 동지가 버릴 때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기도 하고, 자식이 부모를 버리기도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버립니다. 우리는 버림받았을 때 하나님께로 나가야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주의 종들은 버림 받았을 때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시고 귀히 쓰셨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순수하고 진실하였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꿈을 주십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형들의 곡식단이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한별이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야곱의 모든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요셉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애급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버린 돌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팔려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실 되게 살았습니다. 순결하고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보디발의 처가 이런 요셉을 유혹하였습니다. 함께 잠을 자자고 옷을 끌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처의 유혹을 물리치고 도망갔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죄를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의 처는 요셉을 강간미수범으로 몰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보디발도 보디발의 처도 요셉을 버렸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감옥에서 애급의 총리로 삼으셨습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어 가족과 애급 사람들을 흉년에서 구원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면 세상에서 버림받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쓰셔서 다시 그들의 목자가 되게 하십니다.
모세도 이런 경우에 속합니다. 모세는 태어났을 때 버림받아야 했습니다. 이집트왕은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나일강 하수에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나일강 물에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바로의 공주가 와서 목욕하였습니다. 바로의 공주는 모세를 데려다가 이집트의 왕자로 키웠습니다. 바로 공주를 통하여 하나님은 버림받은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 자랐습니다. 그는 사십 살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살이하는 고통을 보았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채찍으로 괴롭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집트의 왕자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이집트 왕자로 사느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애급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 받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쳐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형제들이 서로 싸우자 그들을 화해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살인자로 고소하였습니다. 모세는 애급 사람들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갔습니다. 그곳에서 사십년 동안 양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처가살이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능력을 주시고 이스라엘을 애급에서 끌어내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살고자 하면 동족들조차도 버립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고 우리에게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도록 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그들의 삶 속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이 세계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독립을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인 부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원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나라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메시야를 원치 않고 지상의 메시야를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 하나님께 나갔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시고 그리스도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이 돌이라는 뜻입니다. 반석 곧 큰 돌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도왔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를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셨고 세계 선교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 나라의 열두 기둥 중에 하나로 사용하셨습니다.
초대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은 초대 크리스천들이 로마황제를 숭배하지 않는다고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집과 고향 산천을 등지고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베드로는 그들에게 사람들에게는 버림받았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산돌이신 예수님에게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버림받은 후에 예수님께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산돌이 되신 예수님과 함께 신령한 집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그들을 거룩한 제사장 삼으셔서 세계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귀중한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사람들에게 버림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합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때에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모퉁이 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충성스러웠습니다. 국가를 위하여 순수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원균의 시기를 받고 정부에서 버림받았습니다. 그는 백의종군하였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성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일본에게 껴져가는 우리나라를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해야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인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잠시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를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물론 이렇게 하면 사람들에게 버림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나를 귀히 쓰신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익을 위해서 삽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의 이익이 아니라 영원한 이익입니다. 지금 당장 존경받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존경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는 길을 택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택함을 입고 하나님께 버림받는 길을 택하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살다보면 사람들에게 버림받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습니다. 부모에게, 남편에게, 아내에게, 자녀에게, 친구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과 싸우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이때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포도원의 주인으로 영접해야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머릿돌로 삼아야합니다 사람에게 버림받을 때 서운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쓰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