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날짜: 
2003/05/19
설교: 

제 목 ;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본 문 ; 히 11:13-16

얼마 전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이곳에서 일어난 한인 교통사고에 대해 문의하는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마침 제가 새벽예배를 마치고 Calgary Sun지 신문을 사서 보니 이 교통사고에 대해 일면 사진기사와 함께 자세한 사항이 나와 있어서 제가 대답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기사 내용을 읽으면서 제가 아는 사람의 이름이 두 명이나 있어 깜짝 놀랐는데, 그중 한사람은 송문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교회에서 인도 선교사 지원을 해주는데 그 분의 이름이 바로 송문규 선교사입니다. 물론 교통사고를 당하신 분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입니다.
그리고 그 차에 같이 타고 있어 부상을 당하신 홍정희라는 분도 몇 년 전 저희 교회 철야예배에도 나왔던 분과 동일 인물인 것 같습니다.
물론 홍정희 자매님은 많이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만 송문규라는 분과 세살 난 그의 아들 송시온은 이 사고로 말미암아 안타깝게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고가 일어난 장소는 저도 몇 년 전 Three Hills 학생들 픽업 때문에 자주 다녔던 그 도로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각은 밤 10시 30분 경쯤이었는데 마주 오던 밴이 앞에 있는 화물차를 추월하려고 중앙선을 침범하다가 반대편 차선에서 마주 오던 송문규씨의 차량과 정면 충돌을 일으킨 사고였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상대편 밴에 타고 있던 캐나다인 두 명도 숨지고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가 많이 다쳤습니다. 그리고 송문규씨의 아내 되시는 라헬이라는 분도 뼈가 부러지는 심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고에 대해 얼마 전 이곳 교역자 분들의 정기 모임이 있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고를 당하신 분들이 침례 교회를 다니고 있었기에 침례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고가 난 후 세살 난 그의 아들의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에 이곳 Children Hospital에서 임종예배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미 숨을 거둔 송문규씨는 그 자리에 없었고 부상을 당해 들것에 실려온 엄마가 아들의 임종예배를 지켜보며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시온아, 먼저 가있어. 엄마도 곧 뒤따라갈게 !"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깊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외국 땅에 이민 와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잃고 홀로 남은 한 여인의 삶이 과연 어떻게 될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고를 당한 라헬이라는 미망인이 과연 캐나다 땅에서 살 수가 있겠습니까 ?
그렇게 의지했던 남편도 없고, 그렇게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던 아들도 잃었으니 아마 이곳 캐나다 땅에서 정을 붙이고 살기에는 어렵지 않나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 산들 어찌 이전의 행복했던 삶을 다시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
사랑했던 가족을 모두 잃고 난 후의 허탈감, 그로 인해 마음의 안식처요 고향이었던 가족이 모두 헤어지므로 겪는 고독감을 느끼며 어찌 이곳 캐나다 땅에서도 그리고 한국 땅에서도 고향처럼 정을 붙이고 살 수 있겠습니까 ?
그러기에 이 여인이 "시온아, 먼저 가있어. 엄마도 곧 뒤따라갈게 !"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고 "여보, 저도 곧 뒤따라갈게요."라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

저는 이 여인의 영어 이름이 라헬이라는 것을 듣고 문득 성경에 나오는 라헬이라는 여인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에 나오는 라헬은 야곱의 아내로서 애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들 요셉을 낳고 또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그만 죽음을 맛보고 사랑하는 남편과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던 가련한 여인입니다.
마태복음 2:18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라마에서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다고 하자 그 당시 유대인의 왕이었던 헤롯왕이 자신의 위치가 위협을 받을까봐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 지방의 두 살 아래의 어린 아기들을 모두 학살하는 것에 비유로 쓰여진 말씀입니다.
즉 사랑하는 아이가 죽자 그 어머니 라헬이 애통해하는 모습을 묘사한 말씀입니다. 마치 이번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아들을 잃은 라헬이라는 여인의 애통함과 일치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장 사랑했고 소중히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없어졌다면, 그것도 고향 땅이 아닌 외국 땅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면 그 마음의 허탈함과 공허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
거기다가 자신도 큰 상처를 입어 병원에 누워있게 되고, 또한 자신을 돌아보아 줄 친척과 친구도 없는 외국의 상황이라면 그 얼마나 많은 슬픔의 눈물이 터져 나오겠습니까 ?
더구나 문화도 틀리고, 음식도 틀리고, 언어와 인종도 틀린 외국 땅에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다면 그 얼마나 인생이 고되고 힘이 들겠습니까 ?
다른 자매님의 경우는 하나님의 일을 보다 잘해 보겠다고 이곳 외국 땅에까지 와서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그 얼마나 답답하고 원통하겠습니까 ?
그러나 이런 큰 사고를 당한 라헬이라는 분이 목사님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에게 이런 큰 시험을 이기고 설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는 지 모르겠어요 ?" 즉 하나님께서 이런 큰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비단 라헬이라는 여인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 라헬이라는 여인처럼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나에게는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사람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기에 분명 나에게도 이러한 일이 생기게 됩니다.
다만 이러한 일이 외국 땅에서 생기게 될 때 그 고통과 슬픔은 더욱 크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름다웠고 포근했던 마음의 고향, 마음의 추억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메울 수 없는 공허함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심하면 인생의 목적을 잃고 방황할 수 있는 소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슬픈 일들이 하나님 믿기 전에 일어났다면 하나님께로 나아와 의지해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을 믿고 난 후에 발생했다면 그 공허함과 슬픔은 오히려 더욱 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이 너무나도 좋아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나 혹은 물질이나 건강, 그리고 명예를 갑자기 잃어버리게 되면 그 큰 마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부부가 사랑하며 살다가 한쪽이 먼저 세상을 뜨면 곧 이어 남아있는 사람도 그 충격 속에 일찍 세상을 뜨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좋은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직장을 그만 두거나 은퇴를 하게 되면 그 충격과 허전함 속에 갑자기 자신이 초라해지고 늙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무기력증과 함께 마음의 저항력과 삶에 대한 강한 집착력이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외국 땅에서 발생했다면 그 충격은 더 심하게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갑자기 다가오는 이러한 시험에 늘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즉 내 마음의 중심을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사람에게 두어서는 나중에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나게 될 때 그 허전함을 도저히 메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마음의 중심을 부모 형제나 자식보다는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고향도 캐나다나 한국보다는 천국에 두어야지 캐나다와 한국에 두어서는 나중에 캐나다나 한국 땅에서 무슨 슬픈 추억이 발생할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창12:1)고 했습니다. 즉 마음의 중심, 마음의 고향을 인간 세계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고 천국에 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권고는 하나님을 위하기보다는 연약한 우리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충고의 말씀입니다.
즉 영원히 계속되지 못하는 사람에게 마음의 중심을 두어서는, 그리고 슬픈 추억이 생기는 이 땅에 마음의 고향을 두어서는 지금 당장은 모르지만 나중에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 힘들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잊지마십시오. 이곳 캐나다가 아무리 살기에 좋다고 해도 조금 있으면 이 땅에서도 슬픈 추억이 생기고 맙니다.
만약 마음의 고향을 천국에 두지 못한다면 그때마다 당신은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 동네를 떠나야만 합니다. 즉 몇 년에 한번씩 이사를 가든지 이민을 가든지 해야만 합니다.
단지 마음의 고향을 천국에 두는 사람만이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이 더 나은 본향 즉 천국을 사모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르시고 그들로부터 하나님이라고 일컬음을 받기에 좋게 여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곳 외국 땅에 살면서 가끔 카드사 직원이나 혹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제가 늘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Sorry, I am not a permanent resident."라는 말입니다.
즉 "나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나와 내 가족이 모두 영주권이 있고 시민권이 있어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사는 본향이 아닙니다. 아무리 영주권과 시민권이 있어도 단지 나그네로 사는 것 뿐이요 우리의 본향은 바로 천국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천국 즉 본향에 마음의 고향을 둔 사람만이 어떠한 시련도 극복할 수 있고 바른 인생, 진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우리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이 나그네 인생을 마감하고 예수님이 예비하신 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 가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본향에 가는 것을 사모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요, 우리의 사랑하던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간 사람들을 보다 떳떳이 만나기 위해, 그리고 우리 주님을 뵐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우리는 나그네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보다 진실되고 보다 바르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험한 세상에서 내 힘으로 살기 힘들 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4:18)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여러분, 잊지마십시오. 우리는 이곳 외국 땅에 버려진 고아와 같은 쓸쓸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기에 이곳 외국 땅도 우리에게는 행복을 꽃피울 수 있는 천국과 같은 장소가 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