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보존되어야 한다.

날짜: 
2010/01/10
설교: 

마9:14-17 둘 다 보존되어야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이 말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입니다. 정치, 경제, 종교를 비롯한 모든 제도권에서 사람이 바뀌고 나면 이런 슬로건을 꼭 내걸게 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하자고 외치며 새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 새로운 사람이 일을 시작합니다. 옛 제도는 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목표로, 새롭게 출발하겠습니다. 옛날 습관과 생각은 아예 버리십시다." 이런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잘못된 옛것을 고집하면 안됩니다. 계속 좋은 모습으로 새롭게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잘못 사용하면 옛것은 무조건 나쁘고 새것은 무조건 좋다는 의미로 변질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을 사용하실 때에 새것은 무조건 좋고 옛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즉 "옛것을 버리고 새롭게 출발하자." 이런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바른 의미를 알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부터 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앉으셔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이때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9:16-17)
금식은 구약 사람들에게 있어서 경건의 표시요 경건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경건을 좇는 종교가들은 금식을 자주하므로 자신의 경건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만큼 금식을 자주 하지 않았습니다. 즉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드린 질문은 "우리들은 금식을 자주하므로 경건한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경건하지 못하게 금식을 자주 하지 않습니까?" 이런 의미입니다. 좀 신경을 거슬리고 기분을 나쁘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금식이 아예 필요 없다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40일 금식 기도를 하신 분이십니다. 만약 금식이 필요치 않으셨다면 예수님도 40일 금식기도를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즉 금식은 구약에도 신약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금식의 시기가 있습니다. 혼인 잔치 집에서 신랑과 함께 있는데 금식을 하면 예절에 어긋납니다. 자칫 잔치를 열고 잔치 음식을 만든 사람을 무시하는 오해를 줄 수 있습니다. 즉 잔치 집에서는 같이 먹으면서 즐거움을 나누고 축하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큰 슬픔을 당한 장례 집에서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즐거워하면 안됩니다. 유족들은 슬퍼서 고통스런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고 즐거운 찬송을 부르면 안됩니다. 그때는 같이 금식도 하며 슬픔을 표시해주어야 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도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이 같은 장례 찬송을 부르면서 유족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즉 금식도 때와 시기와 장소가 있는 것처럼 즐거운 찬송을 부를 때에도 때와 시기와 장소가 있고, 더 나아가 어떤 제도나 일을 할 때에도 시기와 장소와 조건을 잘 맞추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지, 옛것은 무조건 나쁘고 새것은 무조건 좋다는 의미로 말씀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이스라엘 문화를 살펴보면 이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당시에 좋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생베 조각이란 원어로 보면 <아직 빗질하지 않은 천>을 의미합니다. 즉 아직 가공하지 않은 조각입니다. 미숙하기 짝이 없는 조각입니다. 매우 질깁니다. 부드럽지 못합니다. 비를 맞거나 물이 닿으면 이상하게 뒤틀어져서 쓸 수가 없게 됩니다. 딱딱하게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생베조각>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좋은 인상을 받았을까요? 나쁜 인상을 받았을까요? 말할 것도 없이 생베조각이라고 하면 듣는 사람은 안 좋은 천을 연상시켰습니다.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한참 손이 가야 비로소 쓸모 있는 천을 의미하였습니다. <생베 조각> 이 말을 듣는 순간 듣는 이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한참 손이 가야 되는 원료> 생베조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새 질서, 새 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적인 개념입니다. 생베조각은 안 좋은 조각입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도 안 좋은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는 오래 될수록 좋은 포도주입니다.
또한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그 당시에 나쁜 것을 의미했을까요? 낡아서 쓰레기통에 버려야할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라고 할 때에는 버려야 할 옛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낡은 옷은 익숙한 옷입니다. "포도주와 친구는 오래 될수록 좋다."라는 유대인들의 속담이 있습니다. "먼 길을 갈 때에는 새신을 신지 말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이미 신고 있던 발에 익숙한 신발이 좋은 신발입니다. 그리고 "먼 길을 갈 때에는 새 수레를 몰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다가 불시에 고장 날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낡은 옷, 낡은 신, 낡은 수레는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은 익숙한 물건입니다. 낡은 가죽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종합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예수님은 다 사랑하십니다.
생베조각과 새 포도주는 새로운 질서, 좋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숙하고 아직 성숙하지 못한 질서나 제도를 의미합니다. 아직은 더 돌보아야 하고 더 익혀야 할 새로운 제도입니다. 그리고 낡은 가죽 부대나 낡은 옷은 나쁜 것, 없어져야 할 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익숙한 것, 이제 숙달된 것, 성숙한 사람이나 제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와 생베 조각 때문에 낡은 옷, 헌 가죽부대가 피해를 볼까 두려워하시는 것입니다. 낡은 옷도 찢어지면 안 됩니다. 헌 가죽부대도 터지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새 포도주, 생베 조각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둘 다 사랑하시고 둘 다 보호하시려는 장면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한 편만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를 모두 사랑합니다. 그렇기에 자녀 둘이 싸우면 부모는 한 사람 편만 들지 않습니다. 부모는 둘 다 사랑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다 사랑하십니다. 이런 의미로 하신 말씀이 오늘 분문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신기하게 말씀하신 비밀입니다. 정말 지혜로우시고 모든 것을 포용하시는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는 오래 다니신 옛신자도 있고 교회에 오신지 얼마 되지 않은 새신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더 사랑할까요? 정답입니다. "예수님은 다 사랑하십니다."
2. 예수님은 둘 다 보존되기를 원십니다.
본문에 예수님의 의도는 생베조각과 낡은 옷이 함께 보존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와 오래된 포도주, 새 부대 낡은 부대가 함께 보존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에 보면 동질성의 사람들만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양하였습니다. 다혈질인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물어 보시면 항상 제일 먼저 대답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반대로 차분한 제자였습니다. 백번 생각하고 한번 행동하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제자였습니다.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서 로마 정부에 바치는 세리였습니다. 고로 당시에 민족반역자란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러나 다대오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 로마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독립투쟁을 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길거리에서 세리와 다대오가 만났다면 칼부림이 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다양성 속에서 하나로 보존이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지체라는 것입니다. 발은 손이 아닙니다. 귀는 눈과 다릅니다. 코만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손만 있는 사람이란 상상도 못합니다. 발만 있는 사람은 인간이 아닙니다. 손 발 눈 입 코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한 사람이 됩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은 어찌 보면 큰 복입니다. 마찬가지로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모두 다 똑같은 사람만 살고 있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아마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로봇 왕국이 되고 말겠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각각 다르지만 다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만일 집을 지을 때 기둥만 있으면 어떻게 집이 되겠습니까? 기와만 있는 집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유리만 있으면 어찌 집이 이루어 질 수가 있겠습니까? 집을 지으려면 모든 재료가 다 필요하듯이 교회 안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우리들의 손가락 다섯 개는 각각 그 크기와 모양이 다릅니다. 이렇게 손가락이 각각 다르니까 참 편리한 것이라고 증명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컴퓨터로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의 손가락 5개를 모두 똑같은 모양 똑같은 크기로 만들어 일을 시켜 보았더니 일이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선진국일수록 모든 것이 다양합니다. 여기 북미 캐나다에 와서 보니 얼굴 색깔들이 다 다릅니다. 차가 다 다릅니다. 머리 모양이 다 다릅니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귀한 존재들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역할과 어머니 역할이 다릅니다. 교회에서도 모든 사람이 다릅니다.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일들을 다양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이민목회를 하다 보니 가끔 이렇게 말하는 성도님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우리 교회에서 없어져야 교회가 부흥된다." 그러나 저는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저 사람도 우리 교회에 있어야 우리 교회가 부흥된다."
만약 "저 사람이 우리 교회에서 없어져야 교회가 부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2의 히틀러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히틀러는 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일 민족이 속한 아리아 족이 가장 우수하며,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에 깔려 있는 라틴족은 인종의 쓰레기이며, 아시아의 황인종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저질 족속이고, 흑인들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낮은 생물이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가장 악질은 유대인으로서 이들을 모두 죽여 씨를 말리는 것이 인류의 밝은 내일을 위하는 것이다." 이런 끔직한 생각이 유대인들을 600만 명이나 죽이는 참극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보기가 안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보기가 좋습니다. 꽃밭에도 똑같은 꽃만 있는 것보다 여러 가지 꽃이 어울려 사시사철 꽃이 피는 것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보실 때에 한 사람 한 사람 다 필요한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고로 다 보존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서로 어울려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정원을 만들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안디옥 교회는 아주 큰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그 교회에는 왕족 마나엔과 종 니게르 시몬이 같이 있었습니다. 유대인 바울과 이방인 마나엔이 같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유식한 박사 학위를 가진 바울과 초등학교도 못나온 무식한 니게르 시므온도 같이 어울렸습니다. 예수님은 다양성을 보존하고 조화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의 결론은 "그래야 둘 다 보존되느니라."입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 너와 내가 서로 보존되고, 너와 내가 우리 모두가 어울려 아름다운 교회를 건설해 나가면서 하늘의 행복과 축복을 함께 맛보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