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공동체

날짜: 
2009/10/19
설교: 

행2:43-47 밥상 공동체
우리나라 속담에 "한 솥에 밥을 먹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가족을 말할 때 몇 명이 살고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식구(食口)가 몇 이냐고 물어 봅니다. 즉 <먹는 입>이 몇이냐고 묻고 있는 말말입니다. 한 솥에 밥을 같이 먹는 이가 바로 한 가족입니다. 우리나라는 한 솥에 밥을 같이 먹는다는데 대단히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동지를 한 솥에 밥을 먹은 사람이라고 말을 말합니다.
1992년 12월 18일 로스앤젤레스 산마테오에 살고 있는 메리 제인 셰퍼드라는 여인이 죽었을 때 그 일대 모든 상가들은 문을 닫고 공휴일처럼 지내면서 그를 애도하였습니다. 마치 약속한 것같이 되었습니다. 그 여자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여자가 아닙니다. 평범한 가정 주부였는데 한 도시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며 슬퍼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메리 제인 셰퍼드는 예수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영접한 후 예수님을 닮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모신 후부터 그의 생각과 행동은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평범한 가정주부입니다. 먼 곳까지 가서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으니 자기가 살고 있는 이웃들을 사랑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늘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 대접을 하면서 사랑하였습니다. 정성껏 이웃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주방 천장에 빨랫줄같이 거미줄처럼 이리 저리 줄을 매어 놓고 그 집에 초대되어 식사한 이들의 이름을 한 종이에 한 명씩 적어서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방문한 날짜도 같이 적었습니다. 카드 색깔도 다양하게 하였습니다. 어느덧 그녀 집의 천장은 만국기가 펄럭이는 것같이 온통 방문자 이름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자연히 하루 기도시간도 늘어났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평범한 가정주부인 자기가 이웃을
위하여 할 일이라고 확신하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웃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자기들을 위하여 늘 기도하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가 지나가면 마치 개선장군이 지나가는 것처럼 환영하였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 장례식을 치룰 때는 온 도시가 애도분위기였습니다.
이렇게 한 솥에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밥상 공동체는 놀라운 공동체가 됩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밥상 공동체였습니다. 밥상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1. 밥상 공동체는 이야기 공동체입니다.
오늘 본문 초대 교회는 위대한 밥상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120 문도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은 한 곳에 모여 떡을 같이 떼었다고 하였습니다. 밥상 공동체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42절)
한 솥에서 밥을 같이 먹으면 자연히 식사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밥상 공동체는 이야기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나라 어른들은 옛날부터 밥 먹으면서 말을 하면 복이 달아난다고 밥 먹을 때에는 조용히 빨리 먹고 나가라고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식사하면서 조용히 먹는 것이 최고의 예의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식사시간이 이야기 시간입니다. 식사 시간 외에는 묵묵히 일하는 시간입니다. 침묵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식사 시간만 되면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중국은 아예 식사 시간이 두 시간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도 식사 시간이 거의 두 시간입니다. 식사 시간은 매우 즐거운 만남의 시간이요, 유쾌한 정보 교환의 시간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곳 캘거리에서 대표적인 밥상 공동체입니다. 주일에는 어김없이 같이 밥을 먹습니다. 그리고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200여명이 다 함께 뷔페식당에 갔습니다. 이날은 여선교회 회원들의 밥하는 수고, 청년들의 설거지 수고, 남선교회 회원들의 청소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 모두가 중국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도 전도하고 또 모든 교인들이 총동원하여 같이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밥상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2. 밥상 공동체는 성숙 공동체입니다.
밥상 공동체는 다 같이 모여 같은 솥에서 밥을 먹으면서 다 같이 닮아가고 성숙하여 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6-47절)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와 교제하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같이 성숙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회사 입사 시험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당신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길에 운전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 정류장을 지나고 있는 데 세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거의 죽어가는 할머니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사경을 헤맬 때 치료하여 살려준 생명의 은인 의사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지금까지 자기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이상형 여자였습니다. 자동차에 한 명 밖에 태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셋 중에 누구를 태우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떤 대답을 하여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죽어가는 할머니를 태워 가지고 가서 살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고 누가 무어라고 할 없습니다. 생명의 은인인 의사를 태워 가지고 가서 은혜를 보답하는 것도 의미 있는 것입니다. 일생 구하던 여인을 만났으니 그를 태우는 것도 누가 무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런 기회를 맛보지 못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일등 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의사에게 자동차 키를 주어서 죽어가는 할머니를 태우고 가서 살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이상형 여자 곁에서 같이 버스를 기다려 타고 같이 가는 것입니다." 즉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해답이었습니다.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최선의 해답이었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습니다. 도랑치고 가제 잡는 것입니다. 마당 쓸고 돈도 줍는 격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같이 밥상 공동체로 지내면서 같이 성숙하여야 합니다. 옛날에 우리나라는 동네마다 사랑방이 네 개는 꼭 있었습니다. 노인들이 모이는 노사랑, 중년들이 모이는 중사랑, 10대들이 모이는 아사랑 그리로 여인들이 모이는 안사랑이었습니다.
노사랑에는 늘 노인들이 모였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노인정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아이 이름 짓기, 이사나 장 담그는 날 받기, 문맹자가 많던 시대니까 글쓰기 등은 노사랑에서 담당하였습니다. 대신에 동네에서 소나 돼지를 잡으면 내장은 무조건 노사랑으로 보내어 노인들을 대접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습니다. 중사랑에는 중년들이 모여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하였습니다. 동네 새우젓 장수, 소금장수, 땜장이들이 오면 중사랑에 들러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들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정보 교환소였습니다.
10대들이 모이는 아사랑에서는 멍석 만드는 법, 짚신 만드는 법, 예절 공부들을 하였습니다. 안사랑에는 저녁 설거지를 다 하고 여인들이 모여서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는 여자들의 스트레스 푸는 장소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은 또래로 모이기를 좋아 하였던 민족이었습니다. 늘 같이 모이는 이들이 한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일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먹는 것만은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돌아가면서 밥을 해 날랐습니다. 아니면 쌀을 모아 같이 밥을 해먹었습니다. 밥을 한 사람이 가지고 오든지, 해 먹던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솥 밥입니다. 밥상 공동체는 이같이 같이 어울려 지내면서 서로 성숙해가는 아름다운 공동체인 것입니다.
3. 밥상 공동체는 선교 공동체입니다.
이렇게 같이 지낸 공동체 사람들은 드디어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교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6-47절)
구원받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밥상 공동체가 선교 공동체가 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밥상 공동체는 선교 공동체에서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밥상 공동체의 목적이 선교 곧 영혼구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같이 나가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 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전4:9-12)
어떤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강도는 집 주인에게 권총을 겨누며 손을 들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집주인은 왼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강도는 외쳤습니다. "오른 손은 왜 안 드는 거냐?" "신경통 때문입니다" 강도는 신경통이라는 말에 한결 부드러워지며 말했습니다. "뭐라고? 신경통이라고? 사실은 나도 신경통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네..." 둘이는 앉아서 신경통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였습니다. 강도는 강도인 것도 잊은 채 본래 목적을 망각한 채 신경통에 좋다는 약을 설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집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강도의 말에 몰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신경통 치료받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긴장과 공포가 풀린 사랑의 대화였습니다. 이것은 오 헨리가 쓴 단편소설 내용입니다.
즉 목적이 같으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 외국 땅에서 같은 동포끼리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로가 다 잘 살 수 있는 덕담을 나누고, 정보를 나누고, 정을 나누고, 우정을 나눕니다. 그러면서 같이 성숙해갑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선교의 목적을 위하여 힘을 합합니다.
중국을 변화시켰던 헤드슨 테일러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느 날 배를 타고 선교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지 않아 돛단배는 움직이지 않고 물결 따라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식인종들이 살고 있는 섬이 보였습니다. 배가 그 섬으로 밀려오는 것을 보자 식인종들이 해변에 새카맣게 모여 어서 배가 해변에 닿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고기 파티준비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식인종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 선장이 선교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바람이 불게 하여 줄 수 없겠습니까?" 이때 테일러 선교사는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기도하면 바람이 다시 불게 될 것을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그러면 닫을 올리십시오." 선장은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믿음으로 닫을 올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자 테일러는 지하실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배에 타고 있는 교인들을 모아 같이 바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두 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바로 기도하는 공동체요 응답받는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람을 보내 달라고 맹렬히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를 저녁 식사용으로 알고 기다리는 식인종들에게 가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한참 기도하는데 선장이 와서 노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님! 이제 그만 기도하십시오, 감당할 수 없이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습니다." 배는 돛에 의하여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은 선교로 종결지었습니다. 멋진 전도였습니다.
어느 교회의 한 자매님이 남편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하다가 총동원 주일을 통하여 남편을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목사님이 새로 등록한 그 남편을 만나러 심방을 갔습니다. 아내는 정성을 다 하여 식사를 준비하였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여야 오래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 남편이 물었습니다. "목사님, 예수 믿는데 비용이 얼마나 듭니까? 친척들이 예수교를 다니면 비용이 많이 드니까 천주교를 다니라고 했습니다." 목사님과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얼마나 비용이 들면 믿으시렵니까?" "담배 값 정도만 괜찮겠습니다." "왜 담배 값 정도를 생각했습니까?" "예수 믿으면 담배를 끊을 테니까 그 돈을 예수님께 바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 정도면 넉넉합니다." "비용이 별로 안드네요?"
그 다음 주일부터 그 남자는 착실하게 교회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교인들과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남선교회 회원들이 잘 인도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헌금 액수가 조금 올랐습니다. 목사님이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비용이 올랐습니까?" "예, 예수님 믿고 술까지 끊어서 술값을 더 보탰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생활을 착실히 하는 것을 보고 목사님이 세례를 받을 때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거절하였습니다. 아내가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님, 제 남편이 무슨 말을 들어서 세례를 안받습니다." "그래요. 무슨 얘기인데요?" "세례 받으면 십일조 바쳐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 안 바치려고 세례를 안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3년이 흘렀습니다. 이 남자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십일조를 바치려면 수확의 십일조입니까 비용을 다 제하고 십일조입니까?"
목사님은 "비용을 제하고 바쳐도 되고 수확의 십일조를 바쳐도 되는데 믿음대로 하면 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비용을 다 제하고 나면 얼마 안 되는데..." 중얼거리면서 그 해 비용을 제하고 쌀 두 가마니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해 세례를 받고 몇 년 후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놀라운 사실이 벌어졌는데 이 분이 추수감사주일에 쌀 20가마니를 바쳤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아니 무슨 비용이 10배나 올랐습니까?" "목사님 비용을 많이 올렸습니다. 자식도 공부 잘 시키려면 유학비용이 많이 들고 옷도 좋은 옷을 사 입으려면 비용을 많이 들이는데 내가 천국 백성이 되어서 어떻게 비용을 값싸게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께서 감동하셔서 비용을 비싸게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밥상 공동체는 선교 공동체가 되어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완성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 솥에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밥상 공동체는 이같이 세 가지 공동체가 됩니다. 1. 밥상 공동체는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하는 이야기 공동체입니다. 2. 밥상 공동체는 서로의 인격이 성숙해가고 서로 돕는 성숙 공동체입니다. 3. 밥상 공동체는 기도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 공동체입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 같은 하늘나라 가족끼리 아름다운 밥상 공동체를 이루어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