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되도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림을 받은 자여

날짜: 
2012/10/15
설교: 

시32:1-7 복되도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림을 받은 자여-
어느 교회에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대단히 능력이 많고, 영적 지식이 매우 풍부하고, 인품도 청결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역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며 복음을 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저 분은 성자이시다!"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은 늘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를 성자라고 말하지 마시오. 나의 겉모습은 성자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의 죄를 여러분 앞에 다 펼쳐 놓는다면 깜짝 놀라서 기겁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를 향해 '저 위선자! 목사가 그럴 수 있나?' 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나는 성자가 아닙니다.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여러분, 이 고백은 바로 신약성경의 반을 기록한 위대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실제 모습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성자라고 하지만 그는 죄악 가운데 몸부림치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내랴?"(롬7:24)하고 신음하며 고통을 겪었던 한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제가 이곳 캐나다에 와보니 성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 명칭에 'Saint 아무개 교회'라는 말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 중인 이 건물도 이전에는 'Saint Martin's Anglican Church'이었습니다. 영어 좀 아시는 분은 'Saint'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입니다. '거룩한 성자'라는 뜻입니다. 즉 성자 아무개의 이름을 붙여 교회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진짜 거-룩하신 분입니까? 진짜 깨끗하신 분입니까? 진짜 떳떳하신 분입니까? 혹시 남 몰래 저지른 죄는 없나요? 마음으로 지은 죄는 혹시 없나요? 이 자리에 모든 사람 앞에서 당신의 모든 죄를 필름 돌리듯 돌려도 떳떳이 남아있을 수 있나요?
"아이고, 목사님, 무슨 그런 살벌한 소리를 하십니까? 만약 저의 지은 죄를 필름 돌이듯이 돌려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영화 스크린에다 띠운다면 저는 얼굴을 붉히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버려야만 됩니다." 아마 이런 고백이 우리 인간들의 참 모습일 것입니다.
여러분! 죄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우리들을 사망으로 몰아갑니다. 저주로 몰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죄가 남들에게 들통이 날 때의 당혹감은 얼마나 크며 파괴력이 있는지, 참으로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자존심의 큰 상처를 입습니다. 그렇게 떳떳했던 아담과 하와도 죄를 지으니 수치심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불러도 쥐구멍에 숨듯이 나무 뒤에 숨어야만 했습니다.
한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여자 중학교 교실에서 학기말 시험을 치렀습니다. 학생들이 너도 나도 커닝을 했습니다. 영어로는 치팅(Cheating)이라고 합니다. 시험 감독이 '이래선 안 되겠다.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 하고 샘플로 한 학생을 잡았습니다. "학생 이리 나와!" 그 여학생은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고개를 못 들었습니다. 시험 감독은 그 여학생에게 이 말을 따라하라고 시켰습니다. "나는 커닝을 했습니다. 나는 나쁜 학생입니다." 그 여학생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독의 말을 따라했습니다. "나는 커닝을 했습니다. 나는 나쁜 학생입니다."
친구들이 그 말을 듣고 막 웃었습니다. 그 후 이 학생은 친구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습니다. 결국 이 학생은 자살로 자기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학생의 방에서 유서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엄마, 아빠, 이젠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어요. 살 용기가 안나요. 엄마, 아빠, 미안해요."
여러분, 이 학생이 커닝을 한 죄인이기에 죽어야 한다면 그 시험 때에 같이 커닝을 했던 학생들은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도 죽어야 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죄를 들키지 않은 죄인은 아무렇지 않게 친구들과 밝은 학창시절을 보내고, 죄를 들킨 여학생은 끝내 자살로 인생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죄를 저지른 다윗의 고백이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훌륭한 왕이요, 하나님도 '그는 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라고 인정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훌륭한 사람이 아주 큰 죄를 지었습니다. 자기의 충신인 우리아가 전쟁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자기는 궁궐에서 편안히 거닐며 그의 아내인 밧세바를 간음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임신을 하자, 이런 죄가 들통날까봐 그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를 가로챘습니다.
그는 거룩한 것 같았지만 강간범이요, 살인범이요, 도둑놈이었습니다. 그가 죄를 짓고 나자 양심의 가책이 다가왔습니다. 정죄감이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 정죄감이 얼마나 큰지 다윗은 본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시32:3-4)
그가 이런 정죄의 고통에서 살아날 길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다윗이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고하자 하나님은 그의 진홍같이 붉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씻어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고통과 번민이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이 밀려왔습니다. 그러한 평안을 느끼며 다윗은 오늘 본문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
여기서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한 말을 '표준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께서 그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는 사람은 복되도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내가 지은 죄, 너가 지은 죄, 우리가 지은 죄를 일일이 꼬치꼬치 캐묻고, 따지며 정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도리어 남몰래 지은 죄와 허물을 가려주시는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의 허물을 가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창피와 수치와 비난과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를 감싸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도 나의 죄를 질책하고, 나를 수치스럽게 하고, 나의 인생을 파멸로 이끄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간음을 저지르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도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라." 말씀하시고 그녀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 그녀를 돌로 치려는 사람들을 다 쫓아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며 멸시받고 사는 세리들도 품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 함이라"(요12:47) 여러분!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저로 말미암아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닙니다.(요3:17)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53:5)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를 꼬치꼬치 캐묻고 따지고 비난합니다. 동방의 의인인 욥도 그렇게 당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큰 병이 들었습니다. 자녀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많은 재산도 오랑캐에게 약탈을 당하여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큰 고난을 당하자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욥에게 숨은 죄가 있어서 그렇게 재난을 당했다고 욥의 숨은 죄를 지적하며 그를 비난합니다.
친구들은 그렇게 욥을 비난하면서 자신들이 이전에 욥에게 상대적으로 눌렸던 마음을 분풀이 했습니다. 즉 의인인 욥을 정죄하고 깔아뭉개므로 자신들이 욥보다 더 의로움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도 아니하리라."(사50:9)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사44:22)
제가 사는 지역은 캘거리에서 상당히 높은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캘거리 올림픽 파크(COP)의 정상에 살고 있습니다. 거기는 캘거리 사방이 다 아래로 보이는 곳입니다. 하루는 새벽예배를 마치고 집에 오는데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캘거리 시내에 안개가 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안개였습니다. 가늘고 긴 원통 모양의 구름이었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런 구름의 이름을 '모닝글로리(아침의 영광)'라고 합니다. 호주 북부 지역이나 아주 제한된 지역에 나타나는 구름이었습니다. 그런 구름이 캘거리 지역에 아주 낮고 길게 깔렸습니다. 저는 그 구름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 안개는 빽빽한 구름으로 형성이 되어 웬만큼 센 바람이 불어도 쉽게 없어지지는 않겠다."
그런데 아침에 볼일을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데 궁금했습니다. 과연 그 구름이 어떻게 되었을까? 저는 높은 곳에 다가가 다시 캘거리 시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빽빽하고 많던 구름이 거짓말처럼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큰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많던 구름이 사라졌을까?" 저는 그때 하나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사44: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많이 지었습니까? 허물이 커서 괴롭습니까? 너무 괴로워하거나 번민하지 마십시오. 죄로 인하여 번민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또한 죄의 수치심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 모습 그대로, 잘못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죄지은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와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아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허물을 가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즉 주님은 죄로 인해 고통하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고로 죄의 문제가 있으신 분은 예수님께 나아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용서를 얻고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여러분! 죄에게는 '정죄'라고 하는 대단히 강력한 파괴력의 무기가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정죄함으로 우리들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그 정죄함에 빠지면 인간은 우울해집니다. 고달파집니다. 인생사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에이, 나 같은 것이 뭐하려고 인생을 사는가?" 하며 인생사는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8:33-34)
또한 이사야 50:7-9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의 허물과 죄를 자꾸 들추면서 살면 개인, 가정, 사회, 국가, 교회가 파괴되고 맙니다. 고로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 용서받고 살고 있으니, 너 같은 죄인도 하나님께 용서 받고 살아야 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들은 모두 그 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세상에 자식이 개천에 빠져서 더럽다고 그 자식을 버리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아무리 더러워도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다시 예수님의 피로 우리들의 죄를 씻겨주시고 허물을 가려주십니다. 이렇게 죄를 용서하시고 허물을 가려주시므로 우리들을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들에게도 넉넉히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