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5:20-27 세 가지 얼굴
보통 여성들이 연예인처럼 예뻐지기 위해서 성형수술을 하면 돈이 얼마나 들까요? 제가 어제 대충 뽑아 봤습니다. 물론 서울 강남의 이름 있는 병원이 아니라 지방의 보통 성형외과에서 낸 견적입니다. 부위별로 본 수술비가 이랬습니다. 눈 230만원, 코 350만원, 볼록한 이마 250만원, 사각턱 450만원, 광대뼈 축소 500만원, 귓볼성형 200만원, 귓볼지방이식 100만원, 이게 얼굴만 이렇구요.
몸매도 예뻐야 하니까 아래로 내려가서 가슴확대 700만원, 엉덩이 힙업 600만원, 종아리 및 발목 300만원, 허벅지 450만원, 양옆구리 230만원, 팔뚝 300만원, 복부 450만원, 이것 외에도 수십 가지가 더 있는데 거기서 반 정도만 해도 대략 8000만원에서 1억 원 정도가 듭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흔히 하는 얘기로 '야매'로 할 때가 이 가격입니다.
이 가격으로 해주는 병원은 아래 조그만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단 수술 후 부작용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술 후 부작용까지 보장을 받으려면 서울의 좋은 성형외과를 가야 되는데 그러면 가격은 최소 10배 정도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최소 8억에서 10억 정도 들여야 안심하고 예뻐지는 성형수술을 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은 외모지상주의가 된 것 같습니다.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되고 예쁘면 어떻든 길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어떻게든 외모만 가꾸려고 합니다. 물론 몸도 얼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잘 가꾸어야 합니다. 비싼 화장품과 보석으로 가꾸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인격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9-10의 말씀입니다.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오늘은 우리가 가꾸어야 할 얼굴에 대하여 같이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는 거울을 보면서 자기의 겉 얼굴에 대해서는 자만심도, 열등감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고 그 분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자기 얼굴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리는 게 되고 하나님의 작품에 악평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절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아울러 자기 얼굴이 좀 예쁘고 잘났다고 자랑하거나 교만할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저 감사하면서 내면의 얼굴, 즉 인격까지 아름답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내면의 얼굴인 인격이 아름다워야 정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나아만은 당시 강대국인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문둥병자입니다. 그러나 워낙 위대한 사람이라 격리수용을 하지 않고 어떻게든 치료를 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백약이 무효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데리고 있는 이스라엘 출신 여자 아이 종에게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기 고향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사람은 어떤 불치병이라도 고칠 수 있다는 겁니다. 나아만 장군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엘리사에게 왔습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하라는 대로 요단 강물에 일곱 번 몸을 담갔더니 병이 완전히 나왔습니다. 얼마나 완벽하게 나았는지 썩어가던 살이 어린아이 피부처럼 깨끗하게 됐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자기가 가지고 온 선물을 주려고 합니다. 그 선물은 아람 왕이 특별히 마련해 준 건데, 은 십 달란트, 금 육천 개, 좋은 의복 열 벌 등 그 가치로나 모양으로나 어마어마한 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그 선물을 사양했습니다. 여기에 나아만도 지지 않고 받으라고 강권했는데, 그렇게 서로 받아라 못 받겠다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나아만은 그 선물을 주지 못하고 그냥 가야 됐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사환이었던 게하시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봤는데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이 떠난 뒤 아무래도 그 예물을 받아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앞서 떠난 나아만 장군의 뒤를 부지런히 좇아갑니다. 그리고 나아만 장군을 불러 세우고, 엘리사 선지자가 시킨 일이라면서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 선지자를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오늘의 사건을 보면서 세 가지의 얼굴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얼굴은 정도의 차이만 있지 우리 모두가 다 소유하고 있는 얼굴들입니다.
1. 전면의 겉 얼굴입니다.
즉 겉으로 보이는 얼굴로서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나면 거울로 보는 얼굴이요, 씻고 단장하는 그 얼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떨 거다 지레 짐작하는 그 얼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얼굴을 미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이 얼굴의 특징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게하시는 이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아만이 보니까 게하시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그에게 묻습니다. "평안한 일로냐?" 게하시가 대답합니다. "평안입니다." 이때 게하시의 얼굴은 그의 진짜 얼굴이 아닙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신약에도 나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고 하속들을 데리고 오면서,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면서 예수님의 입을 맞췄다고 했습니다. 게하시나 가룟 유다나 전면의 얼굴은 평안이요, 안녕이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의 얼굴 뒤에는 탐욕이, 유다 얼굴 뒤에는 음모가 숨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은 겉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속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영적 생활이란 속사람의 문제라는 겁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우리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겉 사람, 즉 전면의 얼굴을 중요하게 보셨다면, 햇볕에 그을린 거무튀튀한 어부들을 제자 삼으셨겠습니까?
아마도 사울왕이나 압살롬같은 잘 난 사람을 제자 삼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서 2장에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2:28-29)
여러분! 여러분의 겉 얼굴과 여러분의 속마음이 서로 다른 위선의 얼굴이 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겉 얼굴과 속마음이 다를 때 여러분의 자아는 다중인격자가 되고 그게 습관이 되면 나중에는 자기가 자기 하는 일을 모를 때가옵니다. 즉 양심과 얼굴이 완전히 분리되는 일이 닥칠 수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인도의 한 시골 도시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악명 높은 강도를 잡고 보니 바로 그 도시의 시장이었습니다. 콜라프라는 도시의 시장인 마하라자씨는 존경받는 시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밤만 되면 강도로 변해서 심지어는 자기 사무실까지 털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낮에는 이 강도를 꼭 잡아야 한다면서 현상금까지 걸었다는 거예요. 문제는 이 사람이 밤이 되면, 자기가 강도가 돼서 전혀 다른 인격이 되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강도질을 했겠지만 그런 시간이 점점 지나가니까 낮의 자신과 밤의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는, 일종의 정신병인 해리성 정체, 또는 다중인격장애라고 부르는 병에 걸린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의 겉 얼굴이 위선과 거짓의 얼굴이 아닌, 진실이 담겨 있는 얼굴이 되도록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면의 속 얼굴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얼굴입니다. 이 얼굴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그러나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얼굴입니다. 바로 이 내면의 얼굴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 얼굴을 보고서야 사람들은 그 사람이 선인인지 악인이지 판별합니다. 이 얼굴의 특징은 아무리 억만 금을 들여도 쉽게 고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게하시가 나아만 장군을 만났을 때 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청컨데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저희에게 주라 하였더이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그런데 이 얼굴이 바로 게하시의 진짜 얼굴이었습니다. 게하시의 전면의 얼굴은 평안이었지만 그 내면의 얼굴은 탐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룟 유다에게 진짜 얼굴을 보이라고 촉구하신 적이 있습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예수님은 이미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의 겉 얼굴은 안녕이었지만 내면의 얼굴은 배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내면의 얼굴을 가꾸는 데 주력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아름답게 될 때 여러분은 진정한 미인, 미남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겉 얼굴이 아니라 내면의 얼굴입니다. 내면의 인격이 바로 되지 않으면 아무리 유명세를 타고 열광적인 찬사를 들어도 우리 마음은 공허할 뿐입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속 얼굴은 어떻습니까?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속으로는 위선과 탐욕과 거짓이 가득찬 바리새인들과 같은 얼굴입니까? 아니면 겉보기에는 추하지만 내면이 순결하고 깨끗하고 정직한 사람입니까? 아무쪼록 내면의 얼굴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아름다운 얼굴로 가꾸시기를 축원합니다.
3. 후면의 최종 얼굴입니다.
이 얼굴은 앞의 두 얼굴의 결과로 나타나는 마지막 최종의 얼굴입니다. 게하시의 후면의 얼굴은 무엇이었습니까? 27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이것이 전면과 내면의 얼굴을 감추고 속인 결과로 나타난 최종의 얼굴이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후면의 얼굴은 목매 죽어 떨어져 창자가 터진 얼굴이었습니다. 음모와 배신의 두 얼굴이 끔찍한 마지막 얼굴로 나타난 거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전면의 얼굴도 정직해야 하고, 내면의 얼굴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후면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 얼굴이야말로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 얼굴은 영생과 멸망의 분기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기억나는 후면의 얼굴들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테레사 수녀는 늙고 쭈글쭈글한 전면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얼굴은 어떤 얼굴이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습니다. 이제 말씀의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 모두의 얼굴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랍니다. 전면과 내면과 후면의 얼굴이 모두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이 땅을 떠나는 날 우리의 얼굴이 떳떳한 얼굴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얼굴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가지 얼굴
날짜:
201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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