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라. 그리고 울지 말라.

날짜: 
2022/03/13
말씀: 
눅23:27-31
말씀구절: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설교: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동물들도 눈물을 흘리나요?” 하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Yes. 그렇습니다."입니다. 눈물샘이 있는 모든 포유류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동물과 인간은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동물들도 역시 인간처럼 눈물을 흘리므로 눈의 먼지를 청소하고, 눈물을 통하여 윤활작용으로 눈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인간처럼 감정의 변화에 따라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듭니다. 최근에는 바다 수달이나 일부 동물들도 감정의 눈물을 흘린다는 동물학자들의 관찰결과가 사이언스 잡지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보면 소가 도축장에 끌려가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진도 종종 보이고 있습니다.

개의 경우는 슬플 때에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슬픈 감정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석에 웅크려 앉아 밥도 먹지 않고 지낸다든지, 슬프게 짖어 내거나, 끙끙대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굳이 인간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자신들만의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감정표현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포유류에게 눈물샘을 주시고 눈물을 흘리도록 만드신 것은 다 유익되기에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다른 포유류보다 더욱 눈물을 많이 흘릴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최근에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릴 때, 그 유익성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연구가 나오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눈물을 통하여 각종 스트레스 호르몬의 혈중 농도를 떨어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플 때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안정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눈물을 통하여 스트레스 호르몬이 배출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눈물을 흘리면 눈의 분비샘이 자극되어 부교감 신경계가 활성화됩니다. 이는 전신에 긍정적인 이완감이 생기어 마음이 훨씬 후련해지고 편안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요즘 안구 건조증으로 인해 고생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는 눈물샘이 막혔거나, 눈물이 제대로 눈을 적셔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평상시에 항상 눈물이 눈에 적셔있습니다. 그리고 3초마다 눈을 깜빡거리면서 눈물로 안구를 촉촉하게 적시면서 눈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와 TV 화면을 오래 들여다봅니다.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를 볼 때에는 눈의 깜박이는 횟수가 평상시의 반으로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안구 건조증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에는 잠시 화면에서 눈을 떼고 먼 곳을 바라보고 눈을 깜빡여주든지, 눈 주위를 마사지 해주거나, 혹은 찬물로 눈을 씻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혹시 ‘악어의 눈물’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일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악어는 먹이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아니, 먹이를 먹으면 기뻐해야 되는데 왜 눈물을 흘릴까요? 그래서 ‘악어의 눈물을 흘린다.’는 뜻은 속으로는 기쁘지만 겉으로는 슬픈 척하는 위선을 떠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눈물은 슬픔의 상징으로 인식됩니다. 그런데 악어의 경우 먹이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눈물샘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습니다. 그래서 먹이를 삼키기 좋게 입 안에 수분을 보총하려고 입을 움직이다 보니 눈물샘도 같이 움직여서 눈물이 나오는 겁니다.

이를 사람들이 착각하여 “어- 악어가 먹이를 먹으면서 왜 눈물을 흘리지? 악어가 그 먹이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먹는 건가? 어- 악어가 좀 양심적인가?” 이런 오해를 하는 데서 만들어진 단어가 바로 ‘악어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독일의 시인인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이야기하지 마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극한 고난과 슬픔과 고통을 통해서 눈물을 흘려봐야 인격이 자라나고 성숙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울보가 보다 인격자이고, 울지 않는 사람은 비인격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여러 고난을 통하여 눈물을 많이 흘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격이 성숙될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성경에 보면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도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고백 중에 이런 고백들이 있습니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시42:3) “내가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과 요를 적셨나이다.”(시6:6)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시119:136)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유리병에 담으소서.”(시56:8) 즉 하나님이 나의 그 많은 눈물을 보시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뜻입니다. 내 죄를 용서해 달라는 뜻입니다.

특히 다윗은 자신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고 나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 죗값으로 결국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압살롬도 자신을 반역하다가 군인들에게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자녀의 죽음 앞에서 울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는 심히 통곡하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 중에 예레미야도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릴 정도로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입니다. 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애3:49) 그는 죄로 말미암아 조국이 망한다는 예언을 받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 예언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 역시 눈물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나인성의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장례행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과부의 흐느끼는 눈물을 보시며 예수님은 같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 하시며 그 아들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이 망하는 것을 미리 내다보시며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느니라.”(히5:7)

오늘의 본문에 보니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여인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눅23:28) 이제 잠시 후 40년이 지나면 예루살렘 성이 적군에 포위되어 잔혹하게 파괴됩니다. 수많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굶어서 죽게 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그 장면을 미리 보시며 우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딸들에게도 장차 다가올 환난으로 인해 울라고 말씀합니다. 즉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울고, 가족 구원을 위해서 울고, 저 지옥 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울라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는 것입니다.

흔히 기독교를 ‘눈물의 종교’라고 말을 합니다. 기독교인이 되면 눈물을 많이 흘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회개하며 울고,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안타까워 울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지옥 가는 영혼들을 위해 울고, 나와 내 가족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하소연 하며 울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울고, 성경보다 울고, 찬송하다가 울고, 주의 일 하면서 울고... 참 많이도 울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지 눈물만 흘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눈물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 눈물을 씻어주시고 위로해주십니다. 고로 우리의 눈물 뒤에는 큰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시고 우리를 불쌍히 보시는 하나님의 큰 역사가 있습니다. 치료가 있습니다.

고로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내려놓고 그냥 울어보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신의 자녀의 그 눈물을 보시고 위로해주십니다. 주님도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6)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열심히 잘 섬기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39세에 죽을병이 걸렸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 병은 곧 죽을병이니 집안 정리를 하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이때 히스기야는 벽을 향하여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았고 그의 애통하는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삼일 만에 낫게 하리라. 내가 너의 수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리라. 이 성을 보호하리라.”(왕하20:5-6)

여러분, 부모로서 자녀의 울음소리가 나면 부모는 그 자녀에게 즉시 달려갑니다. 사랑하는 내 자녀가 도대체 왜 우는지 그 사연을 물어봅니다. 그리고 그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부모로서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 역시 자녀인 우리가 울면 즉시 달려옵니다. 고로 울음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뒤따르게 됩니다.

더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통곡이 나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뒤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게 됩니다. 우는 자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게 됩니다.(계21:4) 그리고 죽음 후에도 슬픔의 눈물이 없는 그 곳, 천국으로 저와 여러분을 인도해주십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고난 속에서 누구나 슬픔의 눈물을 흘립니다. 고통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나를 위로해 줄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나의 눈물을 보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나를 눈물이 없는 그곳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있습니다.

고로 오늘은 눈물을 흘려도 내일은 웃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들의 눈물을 갚아주십니다. 주님을 위해서 흘린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모두 기억하시고, 그 눈물의 대가를 갚아주십니다. 고로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흘리는 그 눈물은 나중에 큰 기쁨과 행복이 되어서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