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8:21-22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 하였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세 번까지 용서하고, 네 번째는 용서해 주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랍비 호세벤하니나는 말하기를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는 세 번 이상 용서해 달라고 하지 말 것이요. 용서하는 자는 네 번째에는 용서해 주지 말 것이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원칙을 구약 성경 아모스서에 그 근거를 두었는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그 이방 도시들에게 세 번 경고 하신 후, 네 번째에는 그들의 죄 때문에 심판하셨다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 랍비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일곱 번까지 용서하겠다고 말하고는 예수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일흔 번의 일곱 번 즉 490번까지만 용서하고 491번째에는 용서하지 말라는 뜻이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참으신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용서를 상징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남을 용서하라고만 하신 말씀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나를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용서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좁은 마음으로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똑같은 죄를 계속해서 세 번이 아니라 일곱 번까지 저질렀는데 과연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실까? 과연 하나님이 나를 용서했을까?
이렇게 자신의 좁은 마음으로 생각하여 자신은 더 이상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 일뿐 하나님의 생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똑같은 죄를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저질러도 버~얼써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또다시 당신이 지을 일흔 번의 일곱 번의 죄도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아니,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부모와 자녀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철부지 어린 자녀 때에는 자신이 잘못하면 부모님에게 손을 싹싹 빌면서 “아빠 엄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이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안그럴께요.”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엄마 아빠는 그 어린 자녀가 또 다시 잘못을 저지를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웃습니다. “이 녀석아, 네가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잘못을 저질러도 내가 다 용서할 텐데 너는 이번만 용서해달라고, 한번만 더 용서해달라고... 부모가 너처럼 그렇게 속이 좁은 줄 아냐?”
여러분, 부모가 자녀에게 때로는 잘못을 저지를 때 자녀는 부모의 죄를 세 번까지, 혹은 베드로처럼 일곱 번까지 용서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용서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랴 오죽 하시겠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녀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1)
여러분, 자기의 어린 자녀가 넘어지면 그 부모가 그 넘어진 자녀를 몇 번이나 일으켜줍니까? 일곱 번만 일으켜 줍니까? 아닙니다.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부모는 자기가 죽더라도 넘어진 자녀를 일으키고 죽으려고 합니다. “나는 죽어도 너는 일어나서 살아라.“고 애를 쓰며 죽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이런 부모의 마음을 모르고 ”어머님, 아버님, 내가 어렸을 때 몇 번이나 나를 일으켜 주었어요?“라고 묻는 자녀가 있다면 그대의 이름은 ‘철부지’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되어서 자기 부모가 자기를 일으켜 준 숫자를 계산 한다는 것은 바보입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바보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의 속 좁은 질문을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도 이런 베드로와 같은 인간적인 속 좁은 생각을 같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 번만 용서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세 번만 축복하실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답답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속이 좁은 분으로 만드는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이 들으면 굉장히 섭섭하여 눈물을 흘릴 지경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원한 용서, 영원한 축복, 영원한 사랑을 백년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의 유한의 울타리에 가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이 죽어서 분토가 되어도 계속해서 용서하시는 분이시요, 계속해서 사랑하시는 분이시요, 계속해서 축복하시고,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죽는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용감한 여호수아 장군이 죽는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합한 다윗 왕이 죽는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내팽기지 않습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은 계속해서 영원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영원까지 우리를 보호하시고, 영원까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고로 시편 기자는 반복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라”(시103:17)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한 두 번의 관계가 아닙니다. 서너 번의 관계도 아닙니다. 또한 연수로 계산하여 백년 이백 년간의 관계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영원까지 지속되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영원토록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요,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영원토록 신천신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듯이 장차 우리도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영원토록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원토록 우리를 축복하시고, 영원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원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도 하나님처럼 그렇게 영원토록 남을 용서하고, 그렇게 영원토록 남을 축복하고, 그렇게 영원토록 남을 사랑하라는 교훈이 바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라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과연 남을 얼마만큼 용서하고, 얼마만큼 사랑하고, 얼마만큼 축복하고 있습니까?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의 가족관계라면 좀더 많이 용서하고, 좀더 많이 참고, 좀더 많이 사랑하겠지요. 그러나 가족 관계가 아닌 이웃과 친구 관계라면 아마 가족보다는 조금 덜 용서하고, 조금 덜 참고, 조금 덜 사랑하겠지요. 그리고 좀더 멀리 떨어진 관계라고 생각되는 직상상사나 혹은 부하직원들은 그보다 덜 용서하고, 그 보다 덜 참고, 그 보다 덜 사랑하겠지요.
그렇다면 하늘나라 가족인 성도들 간에는 어떻습니까? 한 번만 용서하고, 한 번만, 참고, 한 번만 사랑합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선생인 랍비처럼 세 번까지만 용서하고, 세 번까지만 참고, 세 번까지만 사랑합니까? 아니면 베드로처럼 일곱 번까지 용서하고, 일곱 번까지 참고, 일곱 번까지 사랑합니까? 아니면 주님처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고, 참고, 사랑합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창녀를 용서했습니다. 창녀가 한 남자하고만 부정을 저지른 여자입니까? 아닙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부정을 저지른 여자가 창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녀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하신 것입니까?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즉 무한대로 용서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은 자도 창녀와 같이 간음을 저질렀다고 보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들을 얼마나 많이 용서하신 것입니까?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한두 번만 축복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세 번만 기회를 주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성공할 때까지, 내가 축복 받을 때까지, 내가 천국에 올라갈 때까지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시어 나를 축복하시고, 나에게 기회를 주고, 결국 나를 만족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2-5)
잠언서 24장 16절에 보면 “의인은 일곱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이 뜻은 여덟 번째에는 못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의인은 여덟 번째에도, 일흔 번의 일곱 번째에도 다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고로 지금 나는 넘어졌다고, 실패했다고, 버림받았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일어납니다. 내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다시 일어납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일곱 번만 용서했다면 그리고 그 후에는 용서하지 않았다면 우리 중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사람이 감히 누가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이 나를 일곱 번만 치료해 주시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치료해주지 않으셨다면 이 자리에 건강한 모습으로 나올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믿으십시오. 나는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치료해 주셨습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일으켜 주셨습니다. 고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리라.”(욥5:18-19)
여러분,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고로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고로 스스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일으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고로 스스로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굳건한 약속을 붙잡고 일어나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서로를 격려하십시오. 결론을 맺습니다.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날짜:
2006/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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