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사랑하자.

날짜: 
2010/01/25
설교: 

눅14:13-14 장애인을 사랑하자.
베트남전쟁에서 마지막으로 돌아온 한 병사에 관한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오늘 말씀의 서두를 꺼내려고 합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그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 아버지, 전 이제 집에 돌아왔어요. 그런데 함께 갈 친구가 있어요." "그렇게 하려무나." 부모님이 대답했다. "우리도 그를 만나보고 싶구나."
"우선...부모님이 아셔야 할 것이 있어요..." 병사가 말을 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어요. 지뢰를 밟아서 다리 하나와 팔 하나를 잃었거든요. 그는 갈 곳도 없구요. 그래서...나는 그와 함께 지내고 싶어요." "안됐구나! 얘야...아마 우리가 그가 살 곳을 마련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나는 그와 우리 집에서 함께 살고 싶어요." "얘야..."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구나... 그런 장애가 있는 사람은 어쩌면 우리에게 큰 짐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태껏 우리끼리 잘 살아왔어. 우리는 우리 삶에 이런 골칫덩어리가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 생각에는 너만 집으로 오고 그 친구에 관한 것은 없었던 것으로 하면 싶구나. 그는 스스로 살 길을 찾을 수 있을게다..."
잠시 후...아들은 아무 소리도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경찰에게서 그들의 아들로 여겨지는 남자가 한 빌딩에서 추락사 한 것 같다고 전화로 알려주었다. 경찰관은 아마도 자살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깜짝 놀란 병사의 부모는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고 시체공시소에서 그 시체가 자신들의 아들임을 확인했다. 그들은 그가 그들의 아들임은 금방 알아보았지만 여태껏 그들이 모르고 있던 것을 알고는 경악스러웠다. 그들의 아들이 바로 팔 하나와 다리 하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병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장애인의 사정은 참으로 딱하게 생각하고 동정하지만 나와 내 가족이 그 장애인을 돌보기에는 너무나 희생이 많이 요구되고, 그 희생을 치르기에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의 입장에서 자기 자녀가 장애인이 될 때에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앞선 병사의 이야기에서처럼 그 장애를 당한 병사가 자기 아들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 부모의 태도는 어땠을까요?
아마 그 장애인 아들을 껴안고 "애야, 용기를 내라. 희망을 잃지 말자." 하고 그를 격려하며 그에게 온갖 사랑과 정성을 쏟으면서 평생에 아들의 곁에서 돌보아 줄 것입니다. 그런데 장애인에 대한 이런 사랑과 격려가 비단 자기 자녀, 자기 가족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가족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웃을 생각할 때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나한테 늘 좋은 칭찬의 말만 하고, 나에게 늘 밥을 사주고, 나를 늘 좋아하고, 나에게 항상 유익이 되고, 나에 대한 비난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만 가리켜 이웃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만이 네 이웃이니 그런 사람만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장애인은 우리의 이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웃이라고 할 때에는 그 사람이 때로는 나를 비난하고, 때로는 나를 공격하여 나를 쓰러트리려고 하는 사람도 이웃이니 그런 사람도 사랑하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원수가 이웃이 될 수가 있고, 때로는 원수가 가족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원수가 될 소지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고 했습니다.
먼 친척이나 먼 친구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안보면 그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족 식구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안볼 수도 없고, 관계를 끊을 수도 없고, 벙어리 냉가슴 앓는 것처럼 답답하게 됩니다. 더구나 같이 교회에, 혹은 직장에, 혹은 학교에 다니면서 늘 얼굴을 대해야만 하는 사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이라면, 즉 그 사람이 육체적 장애인은 아니지만 정신적 장애인 수준으로서 나를 괴롭힌다면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의 원수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니면 그 사람도 이웃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우리는 살면서 나를 괴롭히는 많은 정신적 장애인을 만납니다.
1996년 모 방송국에서 양심냉장고라는 선물을 걸고 이런 프로그램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통행이 거의 없는 새벽 시간에 교통표지 정지 신호등을 누가 양심적으로 지키는가 하고 숨어서 엿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캐나다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신 분들은 의아하게 생각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캐나다에서는 거의 모든 운전자가 아무리 새벽시간이라도 신호등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이라는 현실은 당시에 그렇지 못했나 봅니다. 지금은 상당히 좋아졌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프로를 진행하던 방송국의 모든 분들이 아주 실망을 했습니다. 그 프로를 시작하기 위해 모두를 숨어서 엿보고 있는데 운전자들 모두가 통행인이 없다고 그냥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지나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벽 4시경 방송국 직원들이 지쳐서 모두 철수하자고 할 때에 차 한대가 빨간 신호등에 정확히 섰습니다.
숨어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환호를 하는 동안 담당 프로듀서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 급히 그 차량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차안을 들여다보는데 운전자 석에서 얼굴이 심하게 찌그러져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순간 그 프로듀서는 "아- 이 사람 술 취한 사람이구나! 망했다!"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차 유리창에 붙어있는 딱지를 보니까 장애인 표지가 보였습니다.
정상인이라고 생각하는 운전자들은 모두가 교통 신호를 무시하고 가는 양심 장애인이었는데,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하면서 때로는 멸시하던 진짜 장애인은 누가 보든 안보든 양심적으로 교통신호를 지키는 지극히 모범적인 분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방송에 나간 후 그 다음 날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떴습니다. "누가 장애인인가?"
이 질문을 대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좀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즉 겉으로 나타난 장애인만 장애인이 아니라 눈에 나타나지 않는 정신적 장애인이 너무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 어떤 분은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인데 쇼핑을 하다가 자기가 가지고 싶은 물건이 앞에 보이면 갑자기 훔치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그리고 일을 저지릅니다. 이것도 일종의 정신장애입니다.
혹 어떤 분은 겉으로는 멀쩡한데 섹스에 대한 이상한 집착증이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만 만족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정신 장애요, 치료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어느 곳에든지 가도 불평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동창회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기회만 생기면 늘 병적으로 불평을 늘어놓는 것도 일종의 정신 장애입니다. 이 분도 역시 관심과 함께 치료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장애인'에 대한 정의는 이렇습니다. "신체적, 정신적장애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히 제약을 받는 자" 그리고 유형별로 본 장애인을 보면 지체 장애자, 뇌병변 장애자, 시각 장애자, 청각 장애자, 언어 장애자, 지적 장애자, 자폐성 장애자, 정신 장애자, 신장(콩팥) 장애자, 심장 장애자, 호흡기 장애자, 간 장애자, 안면 장애자, 간질 장애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등급별로는 장애의 정도가 가장 심한 1급 장애, 중간인 2급 장애, 그리고 장애의 정도가 약한 3급 장애가 있습니다.
특히 정신장애의 경우 가장 심한 1급 장애는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독립적으로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정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가정생활에서 적절한 식사를 준비하거나, 설거지 등의 가사나 청결 유지도 자발적으로 할 수 없고, 금전관리는 물론 소지품관리도 대부분 곤란한 경우입니다. 1급 정신 장애인은 친한 사람과의 교류도 적고,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발성이 현저히 적어 자발적 발언이 적고, 발언내용이 부적절하거나 불명료합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행동의 속도가 타인과 크게 차이 납니다. 또한 사소한 사건으로도 증상의 재발이나 악화가 되기 쉽습니다.
이런 경우가 가장 심한 1급 정신 장애인 수준이고, 이보다 증상이 덜한 2급이나 3급 정신 장애인의 경우를 보면 우리가 일상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는 사람들 중에 3급 정신장애자가 겪는 수준의 증상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즉 의외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장애자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두 가지 정도 못 말리는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사실적이고 성경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죄악을 범하고 타락한 이래로 모두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병이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세주가 필요하고, 구세주가 나타나 그들을 치료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셔서 수많은 병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육체적인 장애인들을 고쳐주셨고, 정신적 장애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장애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장애자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눅14:13-14)
우리는 장애인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장애인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무시하는 행위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애인이 바로 내 옆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장애인의 증상이 때때로 나의 삶을 힘들게 하고 나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이 장애인을 사랑하셨으니 나도 장애인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저 사람 왜 저래? 정신병자처럼!" 하고 왕따를 시키면 안됩니다. 나 보기에 그 사람이 정신병자 수준이라면, 나도 주님 보기에는 정신병자수준일 것입니다.
이 세상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이 세상에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장애인입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도 죽는 순간에는 1급 장애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조금 증상이 덜한 장애인이 조금 더 심한 장애인을 돌아봐야 합니다. 한 사람은 장님이고, 한 사람은 앉은뱅이라면 장님이 앉은뱅이를 업고, 앉은뱅이는 장님의 눈이 되어야 서로가 살 수가 있습니다.
부부가 살다 보면 서로의 좋은 점만 아니라 장애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배우자에게서 육체적이나 정신적이나 영적인 장애가 발견되면 어떻게 합니까? "저 사람은 장애자이니 저 사람과 같이 살면 내 인생이 불행해진다고 결혼 생활을 포기하고 맙니까?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는 것은 "애야, 그 사람이 장애자이니 네가 잘 돌보아주어라. 이 일을 잘 감당하면 내가 너에게 큰 상을 내리리라."는 것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너무나 뜨겁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과 같은 장애인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이 오는 곳이 아니라 장애인들이 와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고침을 받는 곳입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은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라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애인이기에 우리를 부른 것입니다.
누가복음 14:21에 주인이 이렇게 종에게 명령했습니다.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이들 장애인들을 데리고 와서 잔치를 차리고 즐겁게 해주려는 것이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진리로 우리 마음속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옆에 계신 장애인을 돌보는 중에 주님과 같은 마음을 품고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