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7:1-2 절망이냐 희망이냐?
이스라엘 사마리아성이 아람 군대에 장기간 포위를 당했습니다. 결국 성 안에 물이 떨어지고 양식이 다 끊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고파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왕이 신하들을 불러놓고 하는 말이 "지금도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살아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를 안도와주시니 선지자 엘리사를 살려 놓을 수가 있냐? 가서 그 목을 베라"
그래서 군대 장관이 군사들과 함께 왕의 명령을 받아 엘리사 선지자를 죽이려고 엘리사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엘리사가 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내일 이맘때면 밀가루와 보리가 산더미처럼 사마리아 성 입구에 쌓일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니까 국무총리 되는 사람이 웃으면서 말합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창문을 낸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자 엘리사가 선언합니다. "네가 내일 눈으로 보기는 보지만 먹지는 못하리라."
그런데 사마리아 성문 밖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보게, 우리가 성 안으로 들어가도 성 안에 굶주림이 있으니 굶어죽을 것이고, 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대로 굶어죽을 것이니 희망을 향하여 용감하게 나아가자. 살길은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은 절망하기를 거부하고 일어나서 희망을 향하여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나병환자들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절망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나병환자들은 희망을 품고 희망의 사람이 되어 전진합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희망을 품고 전진하자 하나님이 그들과 같이 하셔서 그들의 전진하는 소리를 아람 군인들에게는 큰 전차바퀴 소리와 대군대의 외치는 소리로 들리게 하셨습니다. 아람군인들이 말하기를 "야, 이스라엘 왕이 애굽 왕과 주변에 있는 국가의 왕들에게 돈을 주고 군대를 사서 우리를 포위 하는 모양이다. 빨리 달아나자!" 하며 모든 양식을 비롯해 군수물자를 내버려 놓고 달아났습니다.
네 사람의 나병환자가 아람진에 도착하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양식이 산더미처럼 쌓여져 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금은을 감추다가 "우리 이러다가 하나님께 벌 받을 것이다. 빨리 가서 굶주려있는 사마리아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들이 사마리아성에 가서 알리자 사마리아 성의 굶주린 사람들이 벌떼처럼 나와서 아람 진을 탈취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양식들을 걸머지고 왔던지 성 밖에 밀가루와 보리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먹으려고 야단법석을 하는데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국무총리 되는 왕에 의지하는 장관이 와서 사람들을 정리하다가 사람들에게 밀려서 밟혀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는 양식을 눈으로 보았으나 먹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해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의 왕이나 군대 장관들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희망을 비웃으며 절망에 사로잡힌 군대 장관은 희망이 성취되자 사람들에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문둥병자이지만 희망을 외치며 전진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출하셨습니다. 즉 아무리 환경이 힘들어지고 절망적이라도 희망을 외치고 나아가면 희망의 하나님이 결국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주시므로 희망을 맛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였던 빅터 프랭클 박사는 2차 대전 당시 그가 유대인이라고 독일 사람에게 잡혀서 나치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는 600만 유대인이 참사를 당한 나치수용소의 그 체험담을 책으로 기록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이 위기의 상황에서도 소망을 가질 때 놀라운 힘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나치 수용소에서 다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던 사람은 모진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고 혹사를 당해도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선택하기로 결단할 때, 우리 삶은 현재의 고통과 상관없이 희망찬 내일의 소망으로 가득할 수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문에 있던 네 사람의 나병환자 역시 희망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희망을 저버리면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망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잊지 말 것은 희망도 끊임없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바라보고 희망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죽는다. 절망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하고는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희망의 하나님이시고 희망의 사람을 쓰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로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전력을 다하자. 노력하자."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셔서 희망을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러 오셨습니다. 죽는 자에게 생명과 삶을, 아픈 자에게 치료를, 배고픈 자에게 배불리 먹게 함을, 없는 자에게 있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희망의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병이 일선에서 총에 맞아서 중태에 이르렀습니다.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군의관들이 다 모여가지고서 이 사람 못 살리겠다고 하는데 그중 한사람의 군의관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 내일 새벽까지만 견디면 산다." 이 환자는 몽롱한 가운데 기억이 사라지려고 하는 그 시점에 다 죽는다고 하니까 자기는 죽을 줄 알았는데 군의관 한 사람이 내일 새벽까지만 살아 있으면 산다는 말을 듣자 그 마음속에 내일 새벽까지 안 죽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반대했습니다. "나는 안 죽는다. 나는 내일 새벽까지 살아야 된다. 결코 살아야 된다." 그는 몸부림치고 저항을 했습니다. 밤 12시가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자 갑자기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온몸에 생기가 돌고 새로운 생기가 넘쳐나서 그는 살아난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간증한 것이 그 군의관이 무의식중에 새벽까지만 있으면 산다는 희망의 말을 해주었기 때문에 그는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희망의 말 한마디를 한 것이 군의관은 우연히 말했지만 이 사람에게는 새벽까지 안 죽고 살 수 있는 투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보고도 "이 바보 천치야, 너 같은 놈은 바보고 세상에서 살아갈 자격도 없다."면 그는 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바보천치라도 "너는 잘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이 특별히 네게 은사를 준 것이 있다. 너는 잘된다."고 용기를 주면 그 말이 그 마음속에 큰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을 의지하고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학교에 갔다가 쫓겨났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수학을 가르치는데 "하나 보태기 하나는 둘이다."라고 하니까 이 소년이 손을 들고 "선생님, 하나 보태기 하나가 둘이 반드시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느냐?" "고양이 플러스 쥐는 하나밖에 안 남습니다. 고양이가 잡아먹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니까 선생이 도저히 애들을 가르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아이는 바보니까 더 가르칠 수 없다고 학교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때 그 어머니가 에디슨을 데리고서 "너는 특별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다. 보통 애들보다 다른 상상을 하는 특별한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 반드시 세계를 변화 시키는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다."고 격려했습니다. 에디슨은 어머니의 격려의 말 을 듣고 "그렇지,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에디슨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발명왕이 된 것인 것입니다. 한마디의 격려의 말, 희망의 말이 그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올해는 우리 교회에 희망의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냥 앉아서 희망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희망의 사람이 되고, 희망을 보고, 희망을 듣고, 희망을 말하면서 희망을 만들어나가기를 원합니다. 물론 환경이 희망과 정반대인 절망으로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경에 져서 부정적인 말이나 절망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이미 충분히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정과 절망이 안개처럼 쌓여서 살고 있습니다. 고로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말은 안 해도 다가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미 부정이 있고 이미 절망이 있습니다. 고로 이런 곳에 또 다시 부정을 말하고 또 다시 절망을 말해봤자 도움이 안됩니다. 우리는 부정과 절망적인 환경에서 희망을 말해야 됩니다.
여러분, 올해는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내 앞길이 칠흑 같이 어두워도 희망을 향해서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 합심 기도제목입니다. 한 번 같이 따라 합시다. "희망의 사람이 되어, 희망을 보고, 희망을 듣고, 희망을 말하게 하소서."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 2010년도가 희망의 한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희망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