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파악

날짜: 
2011/06/26
설교: 

갈2:20 주제파악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주님이라고 말을 합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주권자이신 주인이시고 우리들은 그분의 하인이라는 것입니다. 바른 주제파악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연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입니까? 오히려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면서 실제는 예수님을 하인으로 부려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즉 말로는 주제파악을 바로 하는데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주제파악이 제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니 주제파악을 거꾸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행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본래의 뜻은 도리어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뜻은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에 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주제파악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이단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 영어와 한국어의 차이점 중에 하나를 들라고 하면 영어는 주어와 목적어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국어는 주어나 목적어가 문장에 없어도 해석이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 청소년들이 잘 쓰는 속어입니다. "아- 쪽팔려!"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습니다. '아'가 주어도 아니고, '쪽'이 주어도 아닙니다. 만약 '쪽'이 주어라면 '쪽'이라는 사람이 팔린다는 뜻이 됩니다. 쪽이 팔린다. 쪽이 팔렸다. 뭐야 이거? 쪽이 인신매매를 당했나? 쪽이 얼마에 팔린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쪽은 주어는 아닙니다.
이 경우 도대체 누가 쪽팔린 것입니까? 한국어는 그 이야기의 문맥을 통하여 말하는 당사자가 쪽팔린 경우가 있고, 말하는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거나, 혹은 누구를 빗대어 말하면 상대방이, 혹은 제 3자가 쪽팔린 경우가 됩니다. 주어와 목적어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 쪽팔려!"를 영어로 번역해 봅시다. "It's shame on you!" "너가 쪽팔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It's shame on me!"하면 내가 쪽팔리다는 것입니다. 주어나 목적어가 분명합니다.
여기가 영어를 쓰는 캐나다이니까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봅시다. 한국말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해!" 이 말을 영어로 그대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Love!" 이게 뭡니까? 주어나 목적어가 빠지니까 영어에서는 문장이 안됩니다. 이 경우 문장이 되도록 하려면 주어나 목적어를 반드시 집어넣어야 합니다. "Juliet! I love you." "Romeo! I love you." 좀 징그럽지요?
아무튼 영어는 직설적이고 주제파악이 잘되는 언어입니다. 또 사실적이고 실용적인 언어입니다. 반면 한국어는 시적이고 낭만적입니다. 간접적이고 은유적입니다. 두 언어의 장단점이 각각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영어를 배우면서 주어나 목적어를 파악하는 훈련도 함께 배웠으면 합니다. 특히 요즘은 영어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분이 참 많습니다. 그럴 경우 주제 파악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 주제파악이 안되면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적으로는 교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혹은 불쌍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라는 인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원숭이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주제파악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반면 자기가 뭐 대단한 사람인줄 생각하며 거들먹거립니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제파악이 제대로 안되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교만의 자리에 자칫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시며, 인간의 생사화목을 주관하시는 주인인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주제파악이 안되면 신앙의 기초가 안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열렬히 예수님을 환호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에다가 레드카펫을 까는 것처럼 옷을 깔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이 타고 있던 나귀가 "히히힝!" 거리면서 날 뙵니다. 아니- 이 나귀가 갑자기 왜 그럽니까? 주제파악을 못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인데 나귀를 환영하는 것인 줄 착각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우쭐된 것입니다. 꼴불견이지요.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진짜 그런 식으로 하면 나 교회에 안 다닐 겁니다. 십일조 안냅니다. 그러면 하나님, 굉장히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좋은 말할 때 내 소원 빨리 들어주시고, 내 말에 순종 좀 잘하십시오. 안 그러면 재미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경우도 주제파악이 안되서 그런 것입니다. 도대체 교회에 안나오면 누가 손해입니까? 십일조 안드리면 누가 손해입니까? 엄마가 밥상 차려 주었는데 심술이 나서 밥 안 먹으면 누가 손해입니까? 도대체 누가 은혜를 주신 분이고, 누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까? 주제파악을 못하면 참으로 못말리는 사람, 경우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자녀가 아무리 큰 효도를 부모님에게 갚을지라도 부모님이 자녀에게 쏟은 사랑과 정성만큼은 갚지를 못합니다. 괜히 부모님에게 조그만 선물 하나 사드렸다고, 아파트 한 채 마련해 드렸다고 마치 자신이 부모님의 베푸신 사랑보다도 더 큰 효도를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주제파악을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내가 하나님을 위해 큰 봉사를 하고, 아무리 큰 헌금을 해도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늘 부족합니다. 그런 줄 모르고 "내가 내가 제법 했는데..."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반면 큰일을 하더라도 "주님이 힘을 주셔서 봉사했습니다. 주님이 돈을 주셔서 헌금을 드렸습니다. 늘 죄송합니다."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교회도 보십시오. 교회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요, 교회의 주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떤 사람의 것이라고 하면 그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주제파악이 안된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교회를 개척했다고 해도, 내가 많은 돈을 들여서 교회 건물을 지었다고 해도 그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 되어야지 바른 교회지, 사람이 그 교회의 주인이라고 하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즉 주제 파악이 안된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세울 때에도 사람이, 사람의 방법대로, 사람이 원하는 장소에다가 교회를 세우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다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주제파악이 안되면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막상 자기의 일을 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 캐나다에 와서 교회를 선택할 때에도 누구의 지시를 받고 합니까? 물론 친구의 전도와 친구의 권유를 받고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친구를 움직인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즉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가라는 교회에 가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여러분, 사도 바울은 산다고 하는 것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내가 잘나서 큰일을 하고, 내가 잘나서 출세하고, 내가 잘나서 돈 많이 벌고, 내가 잘나서 이만큼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표현도 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즉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주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교회가 여기 캐나다 캘거리에 개척되어서 주일 출석인원이 153명이 되는데 10년 걸렸습니다. 그리고 153명에 또 153명, 즉 2배이면 306명이 됩니다. 얼마 전까지 저는 이 목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목표를 바꾸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53명의 10배인 1530명을 목표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목표에 대하여 저는 주제파악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내 힘으로는 안됩니다. 저는 그럴 만한 실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힘으로는 됩니다.
주님의 뜻이 있으면 306명이 되는 것이나 1530명이 되는 것이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이 목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와 같이 주제파악을 하십시오. 절대 내 힘으로, 너 힘으로, 우리 힘으로 안됩니다. 그리고 이 목표에 대하여 괜히 스트레스를 받지도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시면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고 하셨습니다. 즉 채우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기에 나는 단지 주님의 말씀을 좇아 입만 넓게 여는 것입니다. 마치 참새 새끼들이 둥지에서 엄마 참새가 먹이를 가지고 올 때 모두가 입을 아주 넓게 여는 것처럼 우리도 그냥 순수하게 입을 넓게 여는 것입니다. 저는 참새 새끼들이 그렇게 입을 넓게 여는 것을 보고 웃을 때가 있습니다. "자식들, 그렇게 입을 넓게 안열어도 되는데..."
여러분, 참새 새끼들이 입을 넓게 열었다고 "참- 되게 욕심 부린다."고 비난하는 사람 없습니다. 오히려 "햐- 자식들 순진하기는...귀엽네. 귀여워! " 하고 기특하게 봅니다. 아마 하나님도 우리가 이렇게 입을 넓게 여는 것을 보고 "자식들, 기특하기는... 내 말을 믿고 진짜 입을 크게 열었네! 아이고 좀 채워줘야 되겠다." 하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주의할 것은 만약 1530명이 되었다면 사람들이 혹시 우리 교회로 인터뷰하러 올지도 모릅니다. 그때 "우리 목사님이 하셨다."라고 전혀 주제파악 안되는 말씀을 하시지 마십시오. "우리가 했다."고도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때에도 바르게 주제 파악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주님이 하셨습니다." 결론입니다. 주제파악하고 살고 싶습니다. 주제파악하면서 신앙생활하고 바르게 하고 싶습니다. 주여, 주제 파악 잘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