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

날짜: 
2012/04/07
설교: 

전7:4 죽음과 부활
부활의 아침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우신 분이십니까? 아니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분이십니까?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냐 혹은 어리석은 사람이냐에 대한 평가를 하려면 그 평가 기준이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평가 기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0:2의 말씀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 성경은 오른편은 진리와 정의의 자리로 묘사합니다. 반면 불의와 거짓의 자리는 왼편으로 묘사합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진리와 정의를 좇아가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거짓과 불의를 좇아갑니다. 진리와 정의를 좇아가려면 때때로 당장 눈앞에 있는 좋은 환경과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정의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때문에 진리와 정의를 좇아가면 결국 행복과 축복으로 연결됩니다. 고로 진리와 정의를 좇아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반면 거짓과 불의를 좇아가면 당장은 편하고 당장은 유익이 될지라도 나중은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짓과 진리는 마귀의 성품이요, 마귀를 따라가는 그 끝은 항상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혜자와 우매자의 기준이 되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전도서 7:9의 말씀입니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그리고 이와 상통하는 또 다른 말씀입니다. 잠언 14:29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여러분,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는 우매자입니다. 반면 화를 좀처럼 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는 지혜자입니다.
또한 지혜자와 우매자를 기준 짓는 또 다른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4:1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하나님이 없다니!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마서 1:20 말씀입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즉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만물을 보고, 사람을 보고, 별들을 보고, 각종 동식물들을 보고, 미생물들을 보면서 조금만 생각을 하면 누구나 창조주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있다면 한번 보여줘 보아라. 그러면 내가 믿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꼭 자기 눈으로 봐야만 믿습니까? 실례지만 시력이 어떻게 되는데요? "2.0, 2.0입니다."
와- 참 시력 참 좋으시군요. 저는 2.0, 2.0의 거꾸로인 0.2 0.2인데...그것도 난시... 그리고 노안인데... 그런데 여러분의 그 좋은 시력으로 어디까지 볼 수 있습니까? 100미터 거리 밖에 있는 파리의 눈썹을 볼 수 있습니까? 못 보잖아요. 아니 독수리보다도 훨씬 시력이 나쁘시면서 그 눈으로 하나님이 안보여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목사님, 독수리보다 훨씬 눈이 좋은 고배율 망원경을 사용하고, 고배율 현미경을 사용해서 봐도 하나님이 안 보이는데요?" 여러분,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의 세계는 우리 인간의 눈에 안보입니다. 인간이 만든 현미경이나 망원경으로도 안보입니다. "아니 그러면 목사님은 어떻게 하나님이 있다고 합니까? 그거 다 사기 치는 것 아닙니까?"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즉 예수님을 통하여 보면 하나님이 보이고, 천국도 보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이 성령님으로 내 마음 속에 오실 수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자- 그리고 또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기준에 대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7:4) '초상집'이란 문자적으로 '애곡하는 집(the house of mourning)'입니다. 그리고 '잔치집'이란 술을 마시며 희락을 즐기는 곳을 암시합니다.
즉 이 세상의 허무한 쾌락을 즐기면서 아무 생각 없이 방탕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반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함으로 보다 유익하고 보람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초상집에 가면 이런 지혜를 배우기가 참 좋습니다. 먼저 초상집에 가면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죽은 사람을 보면서 누구나 느끼고 깨닫습니다. "아- 사람은 다 죽는구나! 인생은 이렇게 짧고 허무하구나!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데 뭐 그렇게 아옹다옹 싸우고 살 필요가 있겠는가? 나도 언젠가는 죽게 되겠지! 죽음이 오기 전에 착한 일을 하고 살아야겠다. 그런데 죽으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진짜 지옥과 천국이 있기는 있는 거야?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부활이 있다고 하는데 부활은 도대체 또 뭐야?"
우리는 이렇게 초상집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초상집에서 죽은 이를 보면서 내 자신의 모습도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각자가 초상집에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초상집을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요? 오늘의 성경은 말씀하기를 초상집을 생각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오늘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봅시다.
초상집에서는 먼저 죽음을 생각합니다. 어제는 그 사람이 죽었습니다. 오늘은 이 사람이 죽었습니다. 내일 즉 미래에는 누가 죽을까요? 따라해 봅시다. "미래에는 내가 죽는다." 물론 이 말을 따라 하기가 좀 껄끄럽겠지요. 그렇다고 "나는 죽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그 사람 돌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한참, 매우, 아주, 대단히, 많이, 굉장히 돌은 사람입니다. 즉 우리는 초상집에서 나의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죽음을 어찌하든지 면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어야할 때에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말씀했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아시다시피 우리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가 흙으로 지어졌습니다. "흙은 흙으로 돌아가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판결입니다. 누가 감히 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달라서 하나님의 영이 흙으로 지은 육체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즉 우리가 죽으면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첫째는 내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둘째는 내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다가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에 주안에서 죽은 자는 육체와 영혼이 다시 합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할 때에 얻는 육체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저급한 육체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의 육체는 썩어질 육체입니다. 아무리 건장하고 아름답고 잘생긴 사람도 그 육체가 100년을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늙고 썩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부활의 육체는 썩지 않을 육체입니다. 썩지 않는 육체라는 것은 어떤 병이라도 이기는 몸이요, 피곤을 모르는 몸이요, 늙지 않는 몸이요, 콤플렉스가 전혀 없는 몸입니다.
그리고 부활 때에 얻는 육체는 죄와 상관이 없는 영화로운 몸입니다. 지금 우리의 육체는 죄를 완벽하게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예수님 믿고 나서 죄를 안 짓고 살려고 발버둥을 쳐도 현재의 육체로는 죄를 100%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죄는 우리를 수치스럽게 합니다. 곤고하게 합니다. 자존감을 파괴합니다. 하나님 앞에 떳떳이 서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부활 때에 입는 육체는 죄를 완벽히 이기는 육체입니다. 그때에는 미움도 음란도 불평도 안하게 됩니다. 죄와 상관없는 육체이므로 수치와 두려움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표현을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죄가 없는 육체이므로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이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 때에 얻는 육체는 신령한 육체입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육체로는 영하 50도의 추위나 영상 50도의 더위조차 제대로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육체는 영하 5000도나 영상 5000도 그 이상의 추위와 더위도 이겨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금 육체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육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두려움으로 인해 문을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문이 잠겼는데도 문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부활의 몸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무협소설에 보면 축지법이 나옵니다. 축지법을 사용하면 짧은 시간에 먼 거리를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축지법의 도사라고 해도 지구를 떠나서 달나라에 1초 만에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령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되면 1초 안에 온 우주를 여행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몸은 너무나 신기한 몸입니다.
분명히 우리의 육체는 죽음으로 인해 썩었습니다. 2000년 전에 죽은 사람은 뼈도 없고, 살도 없고, 그냥 먼지처럼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먼지에서 다시 육체가 태어납니까? 이는 생명 공학자들이 DNA를 사용하여 죽은 사람과 똑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그런 육체가 아닙니다. 생명 공학자들이 만들어 내는 육체는 다시 썩고 맙니다.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없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시에 우리들은 신령한 육체, 썩지 않는 육체, 영화로운 육체를 입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입니다. 즉 부활은 변화의 극치입니다. 징그럽게 꿈틀대는 애벌레가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창공을 훨훨 나릅니다. 변화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 때에는 완전히 변화가 됩니다. 그 누구도 부러울 것이 없는 찬란한 모습입니다. 천사도 부러워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 변화의 능력을 우리는 날마다 체험해야 합니다. 즉 죄를 좇아가는 옛날의 내가 죽고, 의를 좇아가는 모습으로 날마다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 간에 살다가 종종 위기가 다가오면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대로는 못살겠다." 너가 변하든지, 내가 변하든지, 환경이 변화가 되든지 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환경은 쉽게 변할지라도 사람 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 변하기도 쉽지 않고, 나라고 하는 사람도 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썩을 몸도 썩지 않게 변화시키고, 육의 몸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키고, 죄의 몸도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면 가능합니다. 즉 너도 변할 수 있고, 나도 변할 수 있습니다. 고로 "이대로는 못살겠다."가 변하여 "이제는 살만하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부활의 변화의 능력이 현실 속에서 나타나면 "나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나는 행복하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그냥 "예수님 부활했네!"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 따라서 나도 부활 하네! 예수님 따라서 나도 변화되네!"라고 외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