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기다리시니 나도 기다린다.

날짜: 
2010/01/17
설교: 

사30:18-19 하나님이 기다리시니 나도 기다린다.

거지가 깡통을 시끄럽게 차고 가고 있었습니다. 옆에 가는 이가 시끄럽다고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이사가는 것입니다. 나도 잘 살 날을 기다립니다." 여러분, 기다림은 좋은 것입니다. 기다림이라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생은 기다리는 시간들로 이어집니다. 어린아이는 자전거를 탈만한 나이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젊은이는 자를 운전할 수 있을 때가지 기다려야 합니다. 의학도는 졸업증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직장인은 승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가정이 평온하여지기 위하여 집을 살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의 기술은 한 순간에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라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기다림은 우리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지루한 숙제요 의무인 것 같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전혀 기다릴 필요가 없으신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하나님도 기다리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도 기다려야 하고 우리들도 기다려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그 이유에 대해 너무나 분명히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은혜를 베푸시려고 하나님은 그렇게 기다리시는 것일까요?
1.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신다.
유명한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탕자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탕자는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고 죽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졸랐습니다. 이스라엘 유산법은 장자에게 3분의 2, 차자에게 3분의 1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탕자는 재산 3분의 1을 미리 받아 가지고 나가 창녀들과 허랑방탕하였습니다. 마침내 거지가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천히 여기는 돼지를 치며 주엄열매로 굶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잘 곳도, 먹을 곳도, 사랑을 할 곳도, 사랑을 줄 곳도 없었습니다. 육적 거지요, 정신적 거지요, 영적 거지가 되었습니다.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고 있을 때에 아버지는 아들을 계속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에 능숙한 아버지였습니다. 마치 한없이 기다리려고 이 아들을 낳은 것만 같았습니다. 만약 기다림 대회가 있다면 단연 일등할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계속 기다렸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렸습니까? 아들이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아버지가 기다리던 보람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탕자는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15:17-19)
탕자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았으니 더 이상 탕자가 아닙니다. 그는 겸손해져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효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깨닫지 못한 아들을 아버지가 하인을 풀어서 강제로 끌어오면 그는 또 다시 아버지 속을 지지리 썩이고 아버지 품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깨달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연로한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다가 언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 기다렸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때때로 나와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를 돌이키기 위해 힘써도 안되고, 애써도 안되고, 앞을 봐도 절망이요, 뒤를 봐도 가망이 없을 때에 우리는 종종 삶을 포기하거나 극단적인 방법을 모색하려는 충동이 일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은 답답하고 해결 방법은 없을 때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좀 단순하고 무식해보이지만 탕자의 아버지처럼 아들이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주었으니 우리도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2. 기도응답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응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당한 방법으로 기도응답을 주시기 위하여 기다리시고 있습니다.
재벌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들이 중학교 다니고 있습니다. "아버지! 나 아버지처럼 큰 사업가가 되고 싶어요. 일찍 일을 배우는 것이 좋겠어요. 학교 중퇴할 터이니 자본금 1억을 주세요." 그러면 어느 아버지가 선뜻 임하면서 돈을 주겠습니까? 아버지는 말할 것입니다. "준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다.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거라. 공부를 다 마치면 더 주리라."
자녀의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줄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버지 심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다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하나님도 아브라함도 2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100세가 되어 기적적으로 아들을 얻으므로 더욱 큰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아무리 확실하게 약속을 했어도 그 약속에 대한 성취에는 반드시 기다림이 전제됩니다. 즉 기다리는 자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때를 따라서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습니다.
3. 구원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신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죽기에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 일을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8)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아 시대처럼 물로, 소돔과 고모라같이 유황불로 당장 멸하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 시원한 해결을 택하시지 않으시고 오랜 고통의 기다림을 선택하셨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면서 속이 지글지글 타시면서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제불능임에도 불구하고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기다림은 구원의 기다림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 그는 종종 워싱턴 D.C.의 뉴욕 에비뉴 교회에 출석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곤 하였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은 조셉 C. G.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펴놓은 성경을 옆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 낡은 성경에 여러 번 손으로 짚어서 손자국이 많이 나고 눈물자국이 있는 성경 한 페이지를 눈여겨볼 수 있었답니다. 그것은 시편 37편 7절이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링컨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이 말씀을 수없이 읽고 명상했다는 흔적을 그의 성경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옛날 어느 부부가 사는 집에 도사가 지나가다가 들러서 말했습니다. "이 집에 살기와 재난이 있습니다. 안 좋은 기운이 돌고 있습니다." 부부는 놀라서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도사가 대답하였습니다. "남편이 나를 따라 와서 비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도사를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서 도사의 시중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가정의 살기와 재난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도사는 말했습니다. "기다려라." 도사는 밥하는 일, 장작 패는 일, 물 긷는 일, 청소를 시키면서 계속 기다리라는 말만 하였습니다. 3년이 지났습니다. 3년 동안 배운 것은 오직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남편은 더 이상 도사 곁에 있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몰래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며칠이 걸렸습니다. 그는 집으로 와서 몰래 들어가 아내를 놀라게 하여 주려고 하였습니다. 담을 뛰어 넘어 방을 엿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놀라고 말았습니다. 밤중이었는데 아내가 누구와 나란히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밖에는 남자 신발이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도끼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가서 죽이려고 도끼를 내려치려는 순간 도사 말이 생각이 났습니다. "기다려라." 그러나 그는 다시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놈은 그냥 둘 수 없다. 죽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도끼를 내려치려는 순간 또 도사 음성이 들렸습니다. "기다려라." 그는 다시 도끼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인기척을 듣고 두 명이 깨어났습니다. 불을 키고 보니 처제였습니다. 그리고 여자만 있는 집에 강도가 들까 두려워 일부러 남자가 있는 것처럼 하려고 남자 신발을 항상 두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기다리지 않았다면 이 집에는 어처구니없는 살인이 일어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깨달을 때까지, 기도 응답이 임할 때까지 구원이 임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기다리셨으니 우리도 기다립니다. 아무쪼록 기다리는 중에 저와 여러분들의 희망이 성취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