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이 축복이다

날짜: 
2006/01/29
설교: 

출32:25-29 헌신이 축복이다
오늘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기도하러 가서 제법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요합니다. “아니, 모세는 도대체 어디를 간 거야? 우리를 광야에 내버려 두고 자기 혼자 기도하러 가면 다야? 아니, 나이가 먹은 노인네가 도대체 그 험한 산에 가서 죽은 거야 살은 거야? 우리가 이 광야에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한 신이 필요하잖아!”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형이요 제사장인 아론에게 나아가 요청합니다. “이보시오. 당신 형 모세는 산에 가서 내려오지도 않고 우리를 이렇게 내팽개쳤으니 이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시오.” 이때 아론이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시는 신이십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면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이렇게 말하여 백성들을 선도하면 좋았는데 이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을 안들어주면 자기를 해할까봐 금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그 말에는 순종하여 금고리를 가지고 옵니다. 도대체 이 금고리가 어디서 났습니까? 다름이 아닌 출애급시 애급 사람들에게 얻은 것입니다. 이 금을 성막을 만들 때 다 하나님께 드리면 좋았을 텐데, 남겨 둔 것이 오히려 재앙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론이 그 금고리를 녹여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줍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그 금송아지를 보고 자기들을 인도한 신이라고 하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절을 하고, 회목제를 드리고, 춤추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이 다 아시고 산에서 기도하고 있던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모세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패하였다.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가리켜 자신들을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말을 하며 그 우상을 섬기고 있다. 내가 보니 그들은 목이 상당히 곧은 백성들이다. 그러니 내가 그들을 멸하고, 너로 말미암아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그러자 모세가 대답합니다. “아니 하나님, 그러면 어떡합니까? 만약 애급 사람들이 들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 능력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죽였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진노를 거두시고 백성들에게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하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를 내리시지 아니합니다.
이런 대화가 있은 후 모세가 산으로 내려오는 데 진중에서 심히 떠드는 소리가 납니다. 모세의 수종을 드는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묻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혹시 적이 침범하지 않았을까요?” 가까이 가서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절하고 춤추고 난리를 합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모세가 화가 나서 산에서 하나님이 써주신 십계명 두 돌판을 집어 던져 깨트립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부수고, 가루를 만들어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먹입니다. 그리고 아론에게 묻습니다. “아니,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 백성들이 이렇게 중한 죄를 짓도록 했습니까?” 그러자 아론이 대답합니다. “당신도 이 백성들의 악함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자기들을 위하여 신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데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느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굉장히 힘이 들기에 이 사건을 그냥 이렇게 끝내고 넘어갔으면 좋았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 중에 하나님 편에 있는 자는 나아오라” 레위 자손들이 나아오니까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을 합니다. “너희는 각기 칼을 차고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명대로 행하매 죽은 사람이 삼천명 가량이 되었습니다.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 29절에 보니 모세가 이런 말씀을 합니다.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출32:29)
여기서 ‘헌신’이란 말을 적용한 것을 보고 “아하, 이것도 헌신이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기 아들들과 자기 형제들을 죽인 것이 헌신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이 인질범이 되어 수많은 생명을 인질로 잡고, 그 인질들을 죽이려고 할 때, 그 모습을 지켜 본 의로운 아버지가 그 인질범이 자기 아들이지만 자기 손으로 그 아들을 죽이는 경우입니다.
물론 아들을 죽이는 아버지의 심정은 무척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무고한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면 그 아버지는 대단히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대개의 부모는 다른 사람들은 다 죽어도 내 자녀만큼은 살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성애를 포기하면서까지, 자기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모세는 이 어려운 일을 한 레위인을 가리켜 “너희가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환경이 좋을 때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든 상황에서 헌신하는 것, 특히 이런 상황에서 레위인과 같이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즉 쉬울 때 하는 헌신이 있고, 어려울 때 하는 헌신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개척교회를 잘 가지 않는 이유는 헌신을 해도 환경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민 교회는 헌신하기가 한국 교회보다 더욱 어렵습니다. 이 점에서는 목사님도 그렇고 성도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어떡합니까? 우리는 죽으나 사나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아멘? 왜 그렇게 헌신하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받았다면 헌신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위해 생명을 주기까지 사랑하신 분을 위하여 우리가 감사한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나의 모습이 어땠습니까? 버림을 받아야 마땅할 죄인이었지 않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관계였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인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셔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나를 대신 살려 주셨습니다. 심판을 면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 귀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크리스천은 자연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이 됩니다. 혹시 당신이 하나님께 헌신을 못하고 있다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거나,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거나, 이 사실을 체험하지 못했거나, 혹은 이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을 하면서 축복의 자리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찌 헌신이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원합니다. 부디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넉넉히 받으십시오. 그리고 남이 시켜서가 아닌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헌신을 하겠다고 결단을 하십시오.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에 처했어도 헌신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헌신을 하는 레위인을 향하여 모세는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렇게 헌신을 하였으니 하나님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즉 ‘헌신=축복’의 공식이 성립이 됩니다. 특히 어려울 때 헌신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확실히 축복해 주십니다. 스스로 한번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어려울 때 헌신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물론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요, 우리는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입니다. 몸이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붙어있는 지체들이 각각 헌신을 해야 합니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헌신을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환경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때,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앞이 캄캄하다고 눈을 감아버리면 안됩니다. 잘 보이지 않을수록, 캄캄할수록 눈은 더욱 크게 떠서 집중력을 가지고 사물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어두운 데에서 위험한 것에 부딪히지 않게 됩니다.
몸의 기둥 역할을 하는 다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제까지 험한 길을 무거운 몸을 떠받치고 걸어왔는데, 왜 나만 고생해야 되느냐고 하면서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도 않았는데 다리가 태업을 하고 더 이상 걷지 않겠다고 하면 그 몸은 그곳에서 무덤을 만들어야 합니다. 같이 죽고 맙니다. 즉 우리는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자신의 맡은 일에 충실하게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 튼튼하게 설 수 있고 너와 내가 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가 튼튼하게 서기 위해서는 어려울 때 헌신하는 분들이 필요합니다. 국가가 번영하기 위해서도 어려울 때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는 지도자와 백성들이 필요합니다.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도 어려울 때 같이 인내하며 용기를 북돋우며 나아갈 수 있는 가족들이 필요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헌신하며 하나님께 칭찬과 축복을 받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어려우면 도망가고, 좋으면 다가오는 얌체 같은 사람입니까?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의 등불이었습니다. 그가 아프리카에서 헌신하고 있었을 때 영국에 있던 동료들이 리빙스턴을 도울 것을 의논하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보게 리빙스톤, 우리는 자네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 몇 명을 현지에 보내려고 한다네. 자네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어떤 길이 좋은가? 가장 좋은 길을 가르쳐 주게" 그러자 리빙스턴은 이 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곳까지 오는데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의미가 없네. 나는 길이 없어도 오겠다는 사람을 원한다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처음 나아갈 때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어야만 자신도 헌신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최선의 모습이 아니면 차선책이라도 제시를 해주어야만 주일 예배에 참석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그동안 어떻게 헌신하셨던 것을 알면 그러한 조건을 내세우는 나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고 초라하기만 합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헌신은 이기적인 조건을 내세우는 헌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조건 없이 어려울 때에도 헌신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의 인생의 앞길에는 여러 번 어려운 상황이 닥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아름답게 헌신하여 하나님께 축복과 사랑을 받는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