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 폭스 당신을 그리워하며......

글쓴이: 
안경록

ESL학교에서 캐나다를 빛낸 인물중 테리폭스에대해 알게되고
또 우연히 김성규씨를 접하고 그동안 제가 너무 감사가 부족하지 않았는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건강한 가정 주시니 감사...
교만하지 않게 적당한 물질 주시니 감사...
자녀들 잘 자라주니 감사...
교회안에서 믿음생활하니 감사...
좋은분 만나서 주님 안에서 교제나누니 감사....

퍼온글 입니다.

테리 폭스 당신을 그리워하며......

1999년 6월
난 테리폭스가 힘겹게 뛰었을 어떤 길을
“캐나다 자동차 대륙횡단”이란이름으로 난 무심히 달리고 있었나 보다.
난 한달 여 전에서야 테리폭스란 사람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 뒤론....나도 이젠 뛴다
그가 뛰었던 이유로........
1999년 6월...우린 벤쿠버에서 시작하여 캐나다 안의 록키산맥을 거쳐 토론토를 지나
오타와, 몬트리얼을 여행하고...퀘벡을 지나..가스페 반도를 가고 있었다
6월30일...
우린 아주 작은 마을에 아름다운 성당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여행을 더는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난 7월 16일쯤에서야 의식을 찾았고....한 사람은 벌써 하늘나라로.....
또 한 사람인 내 아내는 뇌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또 난....목과척추골절.오른쪽 무릎아래 절단,
심하게 다친 왼쪽발목 발등은 콘크리트 치듯해.. 겨우 살려놓았다

몇일 뒤 의사들은......내 아내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회생확율은 0%...2년 정도는 생명연장장치 의존하여 살 수 있고
고통은 느끼나 표현할 수 없다는 거 또 내가 퇴원할 무렵...
원하면 엠블란스 비행기로 한국에 아내를 보내줄 수 있다는 거.......그게 다였다
난....내가 너무 아픈 가운데 있었기에...아파해야 한다는...사실에
난....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내기로 선택했다 슬프게도 그 방법 외엔 없었으니깐...
살아있는 사람들에 욕심으로 그녀를 고통 중에 있게 할 순 없었다
왜냐면 내가 너무 아팠으므로...도무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내와 내 바램대로...우린 장기기증을 결정 했다
이세상 어디엔가 살아있어 줄 내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도 기쁘다

이렇게 힘들어 할 때
캐나다 의료진들은.....자주 날 감동시켰다
아내 일로 우울해 있을 때 어떤 레지던트는...그런 내게 탭댄스와 코믹댄스를 춰줬다
아내의 유골함을 병실 탁자에 올려놓고 한 달을 보낼 땐.....
한 간호사는 내게 한국말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몇일 뒤 그는.....출근, 퇴근 때..또 내가 잠들 땐...한국말로 인사해주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땐 아내를 보고싶다고 조르면.....안된다면서도...결국엔...
큰 내 침대 채로 아내 병실로 옮겨...간호사가준 거울로 아내를 볼수있게 해줬다
조그맣고 창백한...아내의..얼굴.......그렇게 몇 번 본 게 마지막이 될 줄은.....
그 때 난...목뼈와 척추골절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 그분들 앞에서 난 걷게 되면 제일 먼저 너무나 고마운 당신들에게 보이겠다구 약속하구선
다음해2월 난 그 약속을 지키러 캐나다를 다시 갔었다
얼마나들 좋아하는지...눈물로 날 반겨주었다...평생 못잊을 분들이다

이제 캐나다에 대해서 글을 적는다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난 암담함 자체 였다
그런 내게.....퀘벡주 의회는 내게 큰 선물을 주었다
의료비 에다, 아내사망위로금 내 장애 위로금. 세 아이 교육비.....등.....
그건...내게...큰 희망이 되었다.....적어도 살아갈 방법은 해결되어 주었으니깐......
난 아이들 때문에,또 아내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싶어 그 해9월12일 치료가 끝나기 전에 난 귀국을 해서 한국병원에 입원했었다 참 많은 것들이 캐나다와 비교되었다 슬프게시리....

그들은...그런 날 ..잊고있지 않았다
11월초..반가운 손님이 캐나다에서 왔다 주정부가 보낸...내상 태를 확인하러..사람이 왔다
난 그저 간접세 몇 푼 낸 ...관광객이었다
그 일로 우리병실사람..모두..기절할뻔했다^^
그분은 내게 ...적절한 상담치료기회를 만들어주었고(퇴원 후3개월 자택에서 받음)
또 전동휠체어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퇴원해서는 내 자동차 장애장치를 달아주고 처음1년간은 파출부비용을..
다음1년은 교통비 보조로 얼마씩 캐나다에서 보내주었다
물론 한국병원에서 의치료 비용과 의족도 해주었다
그건...돈...이상의 가치로 날 위로하고.....용기를 갖게 하였다
난 지금..세븐일레븐 매장 주인이기도 하고....조금 큰 팬시점 주인이기도 하다
연수입은 올해는 1억 가량 되려나 보다
이렇게 되기까지..
난...참 많은 도움을 캐나다로부터.....
캐나다 사람들로부터 받아왔다.
다시 살아났을 때부터 캐나다 는 내제2에 조국이 되었나 보다.

이제 테리폭스에 대해 글을 적는다
한 달 전...테리폭스를 알았을 때...난 큰 충격에 빠졌다
도대체...왜..당신은 그리 먼 길을 뛰어야 했는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유 만으로 그 큰 고통을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의족을 안해본 사람은 모른다
절단에 아픔을 안느껴본 사람은 결코 모른다 테리폭스에 또 다른 아픔은..짐작도 못하리라
지금도난 6개월에 한번수술실에서 15cm바늘로 마취해가며 척추신경차단주사를 맞는다
그리고 돌아올 땐 마약 성분에 진통제를 한 웅큼 받아온다
그렇지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에 진통이 오니깐.....
테리폭스는 어땠을까?
그 아픔을 ..그 고통을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다는 ....짐작하기 어려우리라
그러나.....
조금은 알 것 같은 나도 이젠 달린다 한달 전 부터는.....
한꺼번에500m 못걷고 하루 1km를 못걸었다 한달 전 나는.....

사람들은.....
내가 장애인 마라톤대회를 나간다니깐.....
그저 걷기도 하고 ...휠체어두 타기도 하며..완주나 하란다
그래도 된다는....친절한 설명까지.......
그러나 나는 매일 걸었다 500m...600m...조금씩 늘어나는 듯 하더니
아마도 테리폭스가 그랬던 것처럼..나도 무릎이 까지고 엉덩이에 상처가 나고 피가 나왔다
무엇보다 잘 맞지않던 내 의족은 날 자주 넘어지게 했다
결국 걷기를 중단하고...난 새 의족을 하기로 했다
8월26일 오토복 코리아의 독일인기술자 랄프는...내게 멋진 의족을 만들어주었다
이제 나는 하루 약 3km를 걷는다
여전히 엉덩이엔 상처가 생기지만......
아마 ...얼마지 않아..난 5km를 걸어볼 것이다
사람들은 반바지에 의족한 모습으로 걸으니....궁금한 모양이다
“택시 태워드릴까요?”하던...분도 있었다

난 눈물이 난다.......
과연 테리폭스적인 건 어떤 걸까? 하고 걸으며 고민 한다
내친구들이나
내 가족들은 날 걱정한다
걸을 때마다....조금씩 사라져가는 내 왼쪽 발뒤꿈치도 그렇고
골수염으로 2년 동안이나 고생한끝에 수술까지 한 탓도 있어서 일 것이다
그러나......그래봤자 5km아닌가...
50,..500도 아닌 5000km넘게 걸어간....테리폭스는 어쩌라고......
난..
남은 몇일 동안...불과 몇km일 테지만 .....걸을때 마다...테리폭스를 생각한다
그리고 9월 19일.....난..5km를 걸어서 완주하리라
살아있는 동안 테리폭스를 기억하리라
그가 얼마나 고통 중에 걸었으며 그가 어떤 의지로, .뜻으로 걸었는지를 기억하리라
한국에 장애 현실을 기억한다면......아마도 수십 수백에 테리폭스가 나와야할테지만........
난......그를 생각하며......내 남은 삶을 걸으리라

하이..테리폭스^^
얼마지 않아 난 자네에게로 갈 거야
그땐...꼭.....“테리폭스.!!.꼭 만나고 싶었어요. 사랑해요”
....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캐나다...
캐나다 사람들.......
모두 사랑합니다
1999년6월 마지막 날부터 나도 절반은..캐나다 사람이 되었나 봅니다.
내 제2에 조국..캐나다...
캐나다 사람들에게...사랑한다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5km 걷는 데 5년… 계속 걸을 터"

[주간조선 2004-10-04 14:17]

‘테리 폭스 달리기 대회’ 출전… 의족 달고 5㎞ 완주한 김성규씨

지난 9월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 둔치. ‘2004 테리 폭스 달리기’에 참가한 3000여명의 시민들은 휠체어에 앉은 한 남자를 주목하고 있었다. 송탄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성규(43)씨였다.

그는 1999년 6월, 캐나다 여행 중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를 잃고 그 자신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한 쪽 다리를 잃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한 달의 휴가를 얻은 김성규씨 부부는 교회 동료들과 함께 캐나다 횡단에 도전했고 6월 30일 오후 6시쯤, 세인트로렌스강 하구의 가스페반도의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운전하려고 하는데 친구가 자기가 하겠다며 나보고 눈 좀 붙이라고 했지요. 저는 SUV 차량 뒷좌석의 시트를 눕히고 벨트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누워 잠을 청했죠. 그런데 친구가 졸음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냈습니다. 저는 차밖으로 튕겨져 나갔고 아내는 뇌출혈을 일으켰습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교회 후배는 현장에서 사망했고요.”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의족 착용을 포기하고 휠체어나 목발을 이용했다. 그러다 지난 8월 초 우연히 골수암으로 다리를 절단한 채 암 연구기금 조성을 위해 캐나다 횡단에 도전했다가 숨진 테리 폭스(Terry Fox)를 알게 되었다. 테리 폭스는 그를 휠체어에서 일어나게 했다. 김씨는 ‘5㎞ 코스’에 도전을 결심하면서 캐나다대사관 홈페이지에 자신의 수기를 올렸다.

“테리 폭스가 매일 달린 거리가 42㎞였는데, 접합 부분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을까 조금은 짐작이 됩니다. 8월 26일 새 의족을 맞추고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걷기 연습을 해왔습니다. 집에서 가게까지 왕복 3㎞입니다. 3㎞까지는 그동안 여러 번 걸어봤습니다.”

‘테리 폭스 달리기’는 순위 경쟁이 없다. 대신 완주증만을 준다. 오전 9시40분쯤, 5㎞ 참가자들이 출발했다. 김성규씨는 뒷줄에서 걷기 시작했다. 약 1㎞쯤 걸었을까. 김성규씨가 진행요원에게 “물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가 목이 마른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니었다. 왼쪽발에 통증이 찾아온 것이다. 김씨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벨트 색을 열어 뭔가를 찾았다.

“아니, 됐습니다. 진통제를 차에 두고 왔네요.”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의족한 오른발은 오히려 편해요. 왼발 발등과 발꿈치가 너무 아픕니다. 마약 성분이 든 진통제는 왼발 때문에 먹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요즘은 병원에서 진통제를 한달치를 주곤 합니다.”

2㎞쯤 걷자 그의 어깨에선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앞서 출발한 10㎞ 참가자들이 반환점을 돌아 힘차게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반환점을 돌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는 조깅코스 옆에서 비디오를 찍는 젊은이를 가리켰다.

“이번에 토론토대학 입학 허가를 받은 큰 아들입니다. 제가 처음 사고를 당했을 때 캐나다 의료진이 한국총영사관의 영사에게 ‘거의 살아나기 어렵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한국의 가족에게는 ‘사망했다’고 전해졌다고 합니다. 당시 캐나다로 날아온 큰 아들은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있자 처음엔 꿈인지 생신지 했어요. 당시 여섯 살이던 외동딸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현재 학습장애를 보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3㎞쯤 지나면서 그는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아,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테리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아요. 집에서 연습할 때 이렇게 빠른 속도로 걸은 적이 없거든요.”

그는 약속대로 5㎞를 완주했다. 그는 완주증서를 받아들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가 두 발로 5㎞를 걷는 데는 장장 5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