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한때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 앞에, 죽을죄를 지어서 처형을 기다리던 한 병사가 끌려왔습니다. 그는 이미 모든 희망이 끊긴 상태였지만, 마지막으로 대왕의 발 앞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때 알렉산더 대왕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습니다.
”네가 무엇이기에 감히 나에게 용서를 구하느냐? 네가 우리 군대를 위해 세운 공로가 있느냐? 아니면 내가 너를 살려줄 가치가 있을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춘 인물이냐? 도대체 네가 무엇을 근거로 나에게 자비를 바라는 것인가?“
이 질문은 마치 율법의 칼날과 같았습니다. 병사에게는 내세울 실력도, 자격도, 공로도 없었습니다. 법대로라면 그는 마땅히 그 자리에서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때 그 병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역사에 남을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대왕이시여,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저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제가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저는 지금 저의 자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은혜’만을 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용서받을 만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은혜를 베푸시는 왕이기 때문에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알렉산더 대왕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병사는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한 채, 오직 왕의 자비에만 매달린 것입니다. 대왕은 칼을 거두며 말했습니다. “네 말이 옳다. 내가 너를 살려주는 것은 네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가 자비로운 왕이라는 사실을 네가 믿었기 때문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사단은 늘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따지며 묻습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기도를 해? 너의 실력이 고작 이것뿐인데, 하나님이 너를 쓰시겠어?“ 이때 우리는 이 병사처럼 대답해야 합니다. ”맞다. 나는 실력도 없고 자격도 없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나의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여러분, 사단은 정죄의 율법을 가지고 끊임없이 우리를 고발합니다. ”너는 자격이 없어.“ ”너는 이미 실패자야.“ 그러나 은혜는 그 고발의 목소리보다 훨씬 큽니다. 은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 그대로 나와 너를 받아줍니다. 구약의 율법은 ”너는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라고 몰아붙이지만, 신약의 은혜는 “너가 죄인이니까 용서가 필요하다. 너는 그래도 살아야 한다.”라고 끝까지 변호해줍니다.
오늘의 본문을 봅시다. 사람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서 외칩니다. “예수여,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때 예수님은 그녀를 향해 “그래, 너는 마땅히 죽을 큰 죄를 저질렀구나. 돌에 맞아 죽어도 싸다 싸.“라고 말하며 그녀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곤 예수님은 땅에다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을 본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 자리를 하나둘 다 떠났습니다. 여자가 혼자 흐느껴 울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즉 율법대로 따지면 너와 나 모두가 죽습니다. 율법대로 따지면 오늘 이 자리에 여기에 앉아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발을 붙이고 살아 있고, 여기 하나님께 나와서 떳떳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늘 우리들의 ‘자격’을 따집니다. 너가 실력이 얼마인지, 결격 사유가 없는지, 성품이 얼마나 훌륭한지...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자격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너와 내가 비록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비록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 그대로 나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다 받아줍니다. 이것이 바로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종교개혁을 주도한 ’마르틴 루터‘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루터는 역사상 그 누구보다 ‘정죄’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꼈던 인물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하나님의 심판(정죄)이 두려워 매일 몇 시간씩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잣대로 자신을 비추어보니 아무리 고행을 해도 마음의 평안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나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증오한다.”고 고백할 만큼 정죄의 사슬에 꽁꽁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로마서 1장 17절,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즉 구원은 나의 고행(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은혜)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유럽 전체를 뒤흔든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자 루터를 정죄의 괴로움에서 해방시킨 것은 더 철저한 금식이나 고행이 아니었습니다. 2000년 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귀한 구원은 바로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고로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정죄의 감옥에 갇히지 마십시오. 이제는 담대히 정죄의 감옥 문을 열고 은혜의 광장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십시오.
‘설교의 황태자’라 불린 스펄전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그가 꿈을 꾸었는데, 사탄이 나타나 그가 평생 지은 죄의 목록이 적힌 긴 두루마리를 펼치며 그를 심히 정죄했습니다. 스펄전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낙심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죄의 목록 밑에 빨간 잉크로 이렇게 써넣어라.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가 이 글을 써넣자 그 순간 그를 정죄하던 사탄은 떠나갔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정죄를 이기고 은혜 안에 거하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는 너 같은 악인,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의 은혜로 넉넉히 들어가게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아주 하찮게 보는 조롱 섞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습니다. 세리는 당시 가장 저질적이고 못된 죄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그런 죄인조차 정죄하지 않고 은혜로 모두 받아주었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세리와 죄인들조차 예수님을 친구처럼 가까이 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마태’는 전직이 세리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끊임없이 저와 여러분을 정죄하는 분이었다면 누가 그분께 가까이 가고 싶고, 누가 그분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몰아붙입니다. 그렇게 계속 정죄를 당하면 누구나 자신감이 떨어집니다. 자존감도 떨어지고 살 희망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은혜의 주님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상태를 모두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합니까? 일단 내 죄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너의 죄는 내가 다 청산했으니, 이제 더 이상 너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고로 더 이상 정죄에 빠져서 스스로 괴로워하거나,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포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겁니다. 회개하면 다 용서한다는 겁니다. 아니- 이미 다 용서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잘 다니다가 나중에 교회 나오는 것을 주저하거나 포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정죄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 매우 부끄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없다는 겁니다.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렇게 죄를 짓고 살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양심에 찔린다는 겁니다. 그렇게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자신이 모습이 어쩐지 위선자 같고 싫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죄를 전혀 안 짓고 살 수도 없고, 그렇게 또 죄를 지으면 또 기분이 상하고, 아- 하나님을 안 믿었을 때는 이런 정죄함이 덜 했는데, 하나님을 믿고 나서 도리어 이 정죄함이 더 많아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믿지 않았을 때보다 믿을 때가 더 괴롭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면 죽었던 양심, 마비된 양심이 살아납니다. 고로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때보다 하나님을 믿고 나서 더욱 죄에 대해 민감해집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민감해질수록 죄로 인한 질책과 정죄함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게 당연합니다. 옛날에 불신자 때는 죄를 짓고 나서도 어느 정도 뻔뻔하게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런 뻔뻔함이 사라졌습니다. 양심이 자꾸 찔립니다.
여러분, 이때 우리는 정죄함에 빠져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즉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그분의 은혜에 더욱 기대야 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그리고 이어서 사도 바울은 이런 승리의 고백을 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3-3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마귀도 귀신도 나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나의 모든 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 청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내가 뭘 잘한 것도 없고, 내가 의인도 아니고, 계속 죄를 짓고 사는 부족한 사람인데 어찌 그게 가능합니까?
예- 그게 인간적으로 따지면 도무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은혜’라고 하는 겁니다. 즉 자격이 없는 사람을 그냥 자격이 있다고 받아주는 겁니다. 의인이 아니지만 그냥 의인으로 인정해주는 겁니다. 저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룩한 성도’라고 말할 수 없는데 그냥 거룩한 성도라고 불러주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런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우리가 또다시 남을 정죄하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즉 나도 그 사람을 은혜로 대해야 하고, 나도 그 사람을 은혜로 받아줘야만 합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왕에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 큰 빚을 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은 자비로운 분이라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큰 빚을 모두 탕감받은 사람은 너무나 기뻐하며 행복해하며 동네들 활기차게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어-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누군가 자세히 보았더니 얼마 전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꿔간 동료입니다.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아주 작은 액수입니다.
그는 사납게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이놈! 너 빨리 내 돈을 갚아라.” 하고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동료가 통사정합니다. “아- 갚겠습니다. 제발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나 그는 동료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왕이 그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을 다시 불러서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너의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18:32-33) 그리고 왕은 노하여 그 사람에게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넘기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신 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즉 용서를 받은 자는 자신도 남을 용서해야 하고, 은혜를 받은 자는 자신도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고,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라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용서와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백 데나리온 빚진 남을 용서하지 않고 계속 정죄하는 것은, 내가 받은 그 거대한 은혜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은혜는 받은 만큼 베풀고 나누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는 나만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증거는, 그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은혜는 저수지처럼 가두면 썩지만, 파이프처럼 흘려보내면 늘 신선합니다.
즉 은혜는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유통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함을 받았다면 나도 누군가를 용서하고 은혜를 베풀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내 삶이라는 파이프를 통해 더욱 신선하고 강력하게 흐르게 됩니다. 고로 은혜 속에 사는 우리는 이제 내 손에 든 정죄의 돌멩이와 율법의 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이웃을 용서하고 안아주는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캘거리의 날씨 이야기 좀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캘거리의 겨울은 춥고 깁니다. 때로는 영하 30도의 강추위와 눈보라가 몰아칠 때면 우리들의 인생도 마치 꽁꽁 얼어붙은 광야와 같습니다. 또한 외국에서 겪는 언어의 장벽과 문화의 차이, 부족한 실력, 타향살이의 외로움... 등등 이런저런 현실의 무게로 인해 어느새 우리 마음속에 정죄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거봐. 너는 이것밖에 안 돼.” “너의 실력으로는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어.”
그러나 여러분, 캘거리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캘거리에는 그 유명한 ’시눅(Chinook)‘ 바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혹독한 추위도 시눅 바람이 불면 언제 그랬듯이 금방 따뜻해집니다. 그 많던 눈도 어느새 금방 녹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이런 시눅 바람과 같습니다.
고로 이 외국 땅 캘거리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괴로워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어느새 금방 은혜의 바람이 불어오고, 금방 또 괜찮아집니다. 아무쪼록 계속 은혜 안에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힘을 내고 또다시 믿음의 힘찬 행진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이 낯선 땅에서 나의 부족함과 실력 없음 때문에 눈물 흘렸던 시간들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나는 안 된다.”는 정죄의 목소리에 속지 않게 하옵소서. 내가 약하기에 주님이 더 필요하며, 내가 부족하기에 주님의 능력이 더 크게 나타날 줄 믿습니다.
주님, 오늘 이 시간 결단합니다. 내 손에 들었던 정죄의 돌멩이를 내려놓고, 주님의 은혜의 손을 붙잡습니다. 나를 연주하시는 하나님의 솜씨에 내 인생을 맡깁니다. 캘거리의 겨울을 녹이는 시눅 바람처럼, 나의 삶이 누군가를 살리고 위로하는 은혜의 파이프가 되게 하옵소서. 나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새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성가 ‘은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