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53:4-9 예수님은 왜 고난을 당하셨는가 ?
기독교에서는 이번 주간서부터 다음 주 부활절까지의 한 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로부터 배신과 버림을 당하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며, 침 뱉음을 당하며, 주먹과 채찍을 맞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한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신 주간을 기념하는 주간입니다.
이러한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얼마 전부터 영화관에서는 'The Passion of the Christ(예수님의 고난)'이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마다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난이 너무도 심하고 처절하여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짓고, 때로는 흐느끼기도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왜 온통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장면을 그렇게 적나라하게 표현을 하고 있는가 ? 이것 너무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 이런 잔인한 장면을 보여주므로 관객들을 만족시키려는 것, 그리고 이런 잔인한 영화를 통해 돈 버는 방법은 좀 심하지 않는가 ?"
그러나 기독교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의도하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목적, 즉 예수님이 이렇게 처절하게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이 영화가 시작되는 처음 장면에 나타난 성경구절과 같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라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입니다.
즉 예수님의 고난은 단지 한 의인이 너무도 억울하게 죽은 그 장면만을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저렇게 나쁜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군인들이 저렇게 무자비하게 예수님을 괴롭혔구나 하는 것이 중심사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저렇게 불쌍하게 고난을 당하셨으니 약자의 편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동정심을 일으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의도는 예수님이 그렇게 처절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함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더 나아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하고,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감사와 존경과 영광을 돌리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말을 하면 고개를 꺄우뚱하고 잘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렇게 말을 하기도 합니다. "아니, 예수님은 뭐하려고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는가 ? 누가 예수님보고 나 대신 고난을 당하라고 떠다밀었는가 ? 예수님은 괜히 이 땅에 와 가지고 고난을 당하셔서 사람 미안하게 만들고, 신세지게 만들어서 예수님 믿게 하다니 좀 유치한 방법이네요 ! 예수님, 나를 위해 고난 당하지 않아도 돼요 ? 나 예수님 아니라도 캐나다에서 잘먹고 잘살고 있어요. 그러니 나 때문에 괜히 고난 당하지 마시라고요. 나도 입장 난처해져요."
여러분, 이런 분들에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고난과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설명해 주겠습니까 ?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한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는 예수님을 믿지 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믿는 자기의 부인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남편을 늘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던 그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그 농부에게 설명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침에 그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닭장엘 같이 가보자고 했습니다. 가보니까 그 닭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 있는데 그 날개 밑에는 막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면서 한 마리씩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농부가 그 암탉을 건드려 보라고 해서 툭 건드렸더니 그 암탉은 죽어있었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말하기를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이 암탉의 몸에서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 그 놈이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순간적으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오, 저것이 바로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있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나는 멸망 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대속의 은혜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조롱을 당해야 되는데 예수님이 대신 조롱을 당하신 것입니다. 내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죽어야 되는데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나를 구원하려고 친히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신 것입니다. 고로 나는 살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이렇게 나 대신 저주와 고난을 당하므로 우리가 저주에서 해방되고, 질병에서 놓여나고, 가난에서 탈피하여 부요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아니었다면 저와 여러분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저주와 형벌을 받아야 되고, 영원히 멸망을 당할 형편이었는데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형벌을 당하시고 죽으시므로 나는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얻고, 부요와 축복을 얻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렇다면 당신과 저는 더 이상 저주에 빠질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니 기뻐해야 하고, 질병에서 건강을 얻었으니 감사해야 하고, 가난에서 축복으로 옮겨졌으니 행복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요, 복음입니다.
옛날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떤 술
주정뱅이가 만취하여 기차레일을 베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급행열차는 고동을 틀면서 달려오건만 그 술꾼은 정신 없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고 있습니다. 그때에 한 자비로운 사람이 그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서 "여보시오, 저기 기차가 옵니다. 속히 일어나시오" 하고 고함을 치나 그 술주정뱅이는 "기차는 무슨 기차, 우리 집 아랫목이야"하면서 돌아눕습니다.
그 자비로운 사람은 보고 견딜 수 없어 달려들어가 술주정뱅이 다리를 끌어 철둑 아래로 간신히 내동댕이를 쳤습니다. 그 술주정뱅이는 떽데굴 떽데굴 굴러갔으나 무정한 기차는 미처 정거를 못하고 그 건지던 그 사람을 끌고 들어갔습니다. 마침내 그 자비로운 사람은 목이 잘라지고, 다리가 끊어지고, 팔이 잘라지고, 창자가 나와 즉사를 하였습니다.
기차는 그제야 정거를 하고 기관수와 차장이 달려와서 머리 잘라진 것, 팔, 다리 끊어진 것을 모아 놓고 걱정들을 합니다. 그런데 술주정뱅이는 한참 굴러가는 바람에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합니다. " 아하, 기차가 정거를 하였구나. 웬 사람이 저렇게 많이 둘러싸고 있노 ? 누가 또 기차에 치인 것이로구먼 ! 어이구, 조심을 하지, 어떻게 하노 ! 어디 가서 구경을 좀 해야지 !" 하면서 비틀비틀 올라가 "그거 무엇들 그러시오" 하고 뚫고 들어가니 거기에는 참혹한 시체가 있었습니다.
"어이구, 끔찍해라. 저 사람 왜 저렇게 되었소 ?" 하고 물으니 옆 사람이 눈에서 불이 번쩍 나게 따귀를 후려갈겼습니다. "이 자식아 ! 이 사람은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어 !" 하니 그 술주정뱅이가 달려들면서 왜 생사람을 때리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덤볐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려. 네가 여기서 술을 먹고 기차 레일을 베고 잠자고 있는 것을 아무리 소리 질러 깨워도 안 깨니까 이 사람이 너를 건지러 들어갔다가 너는 건지고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하여 대신 끌려 들어가 이렇게 참살을 당했단 말이야 !" 그러자
그 술주정뱅이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정신을 차립시다.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각오를 새롭게 하십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도 그들 위한 인생을 사십시다. 또 다시 술주정뱅이처럼 방탕하게 살지 말고,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 분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온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 충성을 다하십시다.
이태리 어느 소읍에 개의 모습을 한 동상하나가 서 있는데 그 동상의 이름은 피도라고 하는 동상입니다. 이 이름은 그 동상의 주인공인 그 개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고 합니다. 이 개는 한때 물에 빠졌다가 죽음 일보직전에 어떤 신사에게 구출되었고, 그 신사는 그 개를 집에 데려다가 키웠습니다.
미물에 불과하지만 그 개는 주인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얼마나 주인을 잘 따르고 사랑하는지 주인이 직장에 갈 때는 매일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와 주인을 전송하고, 주인이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다시 퇴근할 때쯤이면 먼저 가서 정류장에서 기다리며 주인을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주인이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그만 버스가 폭탄을 맞아 주인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피도라는 개는 그 날도 어김없이 정류장에 와서 주인을 기다리는데 주인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그 개는 낮이고 밤이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장장 13년 동안이나 그 정류장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가 그 개한테 먹여주기도 하고 했는데... 결국 주인이 돌아오기를 밤낮 없이 기다리던 이 피도라고 하는 개는 그 정류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충성스런 개의 모습을 통하여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그 자리에 동상을 세운 것입니다. 자기를 죽을 자리에서 건져준 주인의 은혜를 기억한 개를 기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고난 주간에 우리도 나를 죽을 자리에서 건져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나를 위해 고난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십시다. 그리고 부활의 아침 주님을 만나며 다 함께 즐거워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