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날짜: 
2005/12/12
설교: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인형을 좋아하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인형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웃집 아저씨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얘야, 많은 인형들 중에 어떤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 소녀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습니다. "아저씨, 제가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 드리겠어요. 하지만 그 인형을 보여 드릴 때 절대로 웃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셔야 해요"
아저씨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약속을 했습니다. 소녀는 자기 방안에 들어가더니 코는 주저앉고, 팔다리는 떨어져 나가고, 옷은 다 해어진 낡은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와서 그것이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이라고 했습니다. 이웃집 아저씨가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 소녀는 대답했습니다. "제가 사랑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은혜와 긍휼입니다. 아무런 잘난 것이 없지만 불쌍해서 도와주고 싶고 사랑하고 어여삐 보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의 죄가 크고 허물이 많이 있지만, 그리고 힘없고 깨지고 병들고 약하여 넘어지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시며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나폴레옹에게 한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그 아들이 큰 죄를 두 번이나 지어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아들이 두 번이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법에 따라 사형 받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사령관님, 저는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이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그런 긍휼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 아닙니까? 자격이 있다면 긍휼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어머니의 호소를 듣고 나폴레옹은 그 아들을 완전히 사면시켜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긍휼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긍휼이란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비요,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인격의 속성은 긍휼임을 알게 됩니다. 사무엘하 24:14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긍휼히 크시다"고 하였습니다. 시편 145:9에는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 3:22에서도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구약 성경 레위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수할 때에 모퉁이의 곡식은 거두지 말고 남겨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곡식을 거두다가 땅에 떨어진 것이 있으면 다시 줍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라고 했습니다. 또한 포도원의 열매도 다 따지 말고 얼마간을 남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혹시 굶주림으로 죽을까봐 이것들을 먹고 살라는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요 긍휼이었습니다.
간혹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아니, 북한을 왜 돕습니까? 그렇게 북한을 돕는다고 해결이 됩니까?“ 이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한국이 통일이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북한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북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아니, 당신들은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주지도 않았고, 굶어 죽을 때에 소식도 없다가 이제 와서 '예수를 믿어라. 하나님을 믿어라.' 하니 그게 무슨 소리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통일될 때 무슨 얼굴로 그들을 대하겠습니까? 우리가 저들에게 긍휼을 느끼고, 긍휼의 성품을 가지고, 긍휼을 실천하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가 되고 원하는 통일을 맞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떳떳이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같이 믿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긍휼의 마음이 없이 통일이 되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이질감만 생겨 오히려 더 큰 고통이 따를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긍휼이 없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갓난아이를 낳은 어머니에게 긍휼이 없다면 “아니, 이 엄동설한에 저것이 왜 태어나서 나를 귀찮게 해!” 하고 내다가 버릴 것입니다. 만약 모든 어머니에게 이렇게 긍휼이 없었다면 우리 중에 살아남을 사람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로 성경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여러분, 우리는 긍휼 속에서 자라나고, 긍휼 속에서 존재하고, 긍휼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긍휼을 통하여 심판을 이기고, 긍휼을 통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꾸려갑니다. 만약 긍휼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벌한 전쟁터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에게는 여전한 암흑이요, 여전한 불행이요, 여전한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0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즉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엡2:4)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하셨나니”(딛3:5)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여러분, 우리에게는 주님의 긍휼이 임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까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주님의 긍휼을 받았습니까? 차를 몰면서 주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죽을 뻔한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병에 걸려도 주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오랫동안 병상에 드러누워 있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이 있기에 가정이 있고, 사업이 있고, 주님의 긍휼이 있기에 천국이 있고, 영생이 있고, 오늘의 너와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도 주님의 긍휼이 있어야 삽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은 마태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그랬습니다. 그러자 마태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마태는 너무 신이 나서 친구들을 다 초대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세관 직원들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유대인들에 의해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동족에게 세를 받아서 이방인인 로마 정부에 갖다 바치는 직업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늘 죄책감을 안고 살았으며,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지냈습니다. 요즈음도 우편 배달물 중에 제일 보기 싫은 것이 무슨 고지서, 세금독촉장이 아닙니까? 그러니 그 당시에 세리들을 다정스럽게 맞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모두다 원수처럼 따가운 눈초리로 그들을 흘기며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사람을 찾아가셨고, 하나도 아니고 집단적으로 그들과 식사를 같이 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난리가 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와서 욕을 합니다. “아니, 너희들이 선생이라고 하며 따라다니더니 예수라는 자가 이제 보니 순 악질 녀석들과 한패 거리로구나.”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뭔지 아십니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 호세아 6:6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라는 것이 오늘날로 말하면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가 아닙니까? 즉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복을 달라고 하면서 긍휼이 없는 사람이 되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인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원하니 긍휼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자기 자녀가 아파서 끙끙대고 울면 부모는 그 자녀를 애처롭게 여기고 불쌍히 여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뱃세다 빈들에서 5000명을 배불리 먹이신 것의 동기도 긍휼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또한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의 무덤에 찾아가 그를 다시 살린 것의 동기도 긍휼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요11:33) 여기서 통분히 여기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은 불쌍히 긍휼히 여기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인성에 사는 과부의 외아들이 죽은 것을 살리신 동기도 긍휼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7:13) 그리고 수많은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동기가 긍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5:11)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고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 긍휼을 드러냅니까?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죽게 되어 신음하는 자를 외면하고 가버렸습니다.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그도 긍휼을 베풀지 않고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를 보자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겨 도움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누가복음 10:33-35를 보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행동이 긍휼입니다. 긍휼은 단순히 동정이나 측은히 여기는 감정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잠언 14:21에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긍휼히 여기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이 있습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반드시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이요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의 씨를 심으면 긍휼의 열매를 거둘 것이요, 무정의 씨를 뿌리면 무정의 열매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서 2:13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여러분, 복수의 칼을 갈고 상대방을 꺾으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이 패배한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두고 보자!’고 복수의 칼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원수가 된 우리에게도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긍휼을 실천할 때입니다. 너와 내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긍휼이 있는 곳에는 용서도 있고, 사랑도 있고, 평안도 있고, 행복도 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없으면 불안합니다. 긍휼이 없다면 행복이란 두 글자는 도저히 잡을 수 없는 먼 산 너머의 무지개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심판조차도 이기는 긍휼의 사람입니까? 심판을 스스로 자초하는 무정한 사람입니까? 당신은 긍휼히 여기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사람입니까? 무정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차버리는 사람입니까? 긍휼의 사람이 되느냐 무정한 사람이 되느냐는 스스로 결정하십시오. 그리고 그에 따른 축복과 저주를 스스로 선택하십시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긍휼의 하나님은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행복 속에 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