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9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10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11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 말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명대사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작은 아버지와 또 그와 결혼한 어머니를 보며 삶의 의미와 의욕을 상실한 채 존재의 가치마저 회의를 품은 햄릿의 유명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굳이 햄릿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도 인생을 살다보면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하며 때로는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하나님, 죽여주세요.” 하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는 말도 상당히 힘든 처지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 죽여주세요.” 하는 말은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는 말보다 어찌 보면 더욱 힘든 상황일겁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고 절실하게 기도해본 적이 있나요? 혹은 인생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죽여주세요.” 하고 기도해본 적이 있나요? 그런데 어떤가요?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알았다. 내가 즉시 죽여주마. 어떻게 죽여줄까? 목 졸라 죽여줄까? 총으로 쏴서 죽여줄까?” 하면서 평상시에는 기도에 잘 응답도 안하시는 하나님이 이때는 즉시 응답하여 바로 죽여줍니까?
여러분, 제가 지난 주 설교 때에도 말씀했잖아요. 아무리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해도 그 뜻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으면 안 들어주신다고요. 그리고 예수님도 말씀했잖아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땅에 떨어져 죽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하고 기도한 사람들이 몇 명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없고 의지가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라 도리어 믿음이 좋고, 상당히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누구일까요? 놀라지 마십시오. 모세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성경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둘 다 능력의 사람이이요, 지도자 중의 지도자입니다.
이 분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한 공통적인 이유는 어떤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극한 고통 때문에 죽여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여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요즘도 우리 주위에 죽고 싶은 사람들을 보면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 때문에 죽고 싶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세의 고백입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1, 14-15)
여러분, 사람이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지 않나요?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급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데 일단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것도 없는 그 광야에서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합니다. 만나는 지긋지긋 하다고 합니다.
아- 뭐! 이해가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똑같은 것을 계속 먹으면 솔직히 질릴 겁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하나님께 바른 자세를 가지고 기도해야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여태까지 광야에서 굶어죽지 않도록 만나를 계속 내려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만나를 계속 먹으니까 좀 질려요. 혹시 다른 음식도 주실 수 있나요? 안되면 관두시고요. 저는 괜찮아요.”
아 뭐! 이런 식으로 일단 감사를 깔아놓고 기도해야지, 그 동안 준 만나를 “이게 뭐야?” 하고 평가절하 하고 불평하면서 고기를 내놓으라고, 무슨 빚쟁이가 빚 독촉하듯이 하면 되겠습니까? 더구나 “우리가 애급에 있을 때에는 마늘과 부추 같은 정욕에 좋은 맛있는 음식을 먹었는데 하나님 믿고 따라 나왔더니 이렇게 광야에서 개고생 하네. 차라리 애급으로 돌아가자.” 하고 원망불평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건 도리어 하나님을 열 받게 하는 거잖아요? 아-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도 고기 먹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곳이 광야라 고기가 없는 걸 어떡해요. 왜 없는 걸 자꾸 달래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잖아요. 더구나 어린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 밤새도록 철야하면서 고기를 달라고 때를 쓰며 우는 겁니다. 아- 평상시에 철야예배는 안 나오면서 이렇게 철야하면서 불평하면 되겠어요?
그리고 우는 것도 한계가 있지. 여러분, 애들 중에서 잘 우는 아이 있잖아요. 뭐 애들은 우는 게 그냥 일상이에요. 딴 뜻 없어요. 배고프니까 젖 달라는 신호고, 졸립다는 신호고, 뭔가 불편하다는 신호고, 혹은 아프다는 신호입니다. 그거 해결해주면 됩니다. 그러면 울음 그쳐요.
근데 이건 애들도 아니고 어른이 고기 달라고 우는 겁니다. 그것도 철야하면서... 고기 안주면 애급으로 돌아간대요. 아- 에이비씨! 증말!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신 출애급의 모든 기적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잖아요. 몽땅 도루묵이 되잖아요. 아- 이런 백성들을 데리고 어떻게 같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아요?
그러니 모세가 솔직하게 하나님께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요 이 백성들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신 없어요. 힘들어 못살겠어요. 그러니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그렇게 모세가 즉시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했나요? “알았다. 모세야, 너 많이 힘들구나. 내가 너를 즉시 죽여서 힘들지 않게 하마.” 그랬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세의 그 힘든 사정을 아시고 그를 구원해주었습니다. 강한 바람으로 메추라기 떼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보내어 그들 앞에 떨어트려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달간 질리도록 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원망 불평한 백성들의 짐을 나눠지도록 모세를 위해 70명의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죽여 달라는 모세를 도리어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능력의 엘리야 선지자도 한때 너무 힘들어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왜 죽여 달라고 했나요? 다름 아닌 낙심입니다. 절망입니다. 그는 바로 전에 바알 선지자와 대결투를 치렀습니다. 큰 승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세벨 왕후가 내일 이맘때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니 그 여인의 협박이 두려워서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일단 살려고 도망간 겁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도저히 가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며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 그렇게 힘들어서 죽여 달라는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이 어떻게 했나요? 그를 죽시 죽여줬나요?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그를 살려주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그를 어루만지고 위로합니다. 숯불에 구운 맛있는 떡과 물을 가져와 먹고 마시고 푹- 잠을 자게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어루만지며 먹이고 다시 잠을 자게 합니다. 그렇게 푹- 쉬게 하면서 엘리야에게 영육 간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친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죽여달래도 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우리가 살려달라고 하는데 죽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분은 죽이기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살리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도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고, 가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습니다.
에스겔 16장에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자 아이가 들판에서 갓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 어미가 그 낳은 딸을 벌거숭이채로 들판에 버리고 사라졌습니다. 이 막 태어나서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갓난 아이, 조금 있으면 그대로 죽고 맙니다. 짐승의 밥이 될 신세요, 햇볕에 타죽을 신세요, 해가 지면 얼어 죽을 신세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 곁을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아이고 애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겔16:6) 그리고 그를 데리고 정성껏 씻어주고, 입혀주고, 먹여주고, 키워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보니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습니다. 왕의 아내 즉 왕비가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생명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을 살리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공중의 새들에게조차 먹을 것을 주시며 그들을 죽지 않게 기르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신다는 겁니다.(사42:3)
왜요?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이곳 캘거리 땅에서 사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시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엔 우리들도 갓 태어난 피투성이 아기가 살려고 발짓하는 불쌍한 모습처럼 보일 겁니다.
그리고 너무 힘이 들어 살려달라는 우리들에게 혹은 죽여 달라는 우리들에게도 각각 살 수 있도록 우리를 키워주시고 보살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인간이 보기에는 절망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희망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내 인생이 실패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성공입니다.
이대로 힘든 내 인생이 끝날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한 계획이 있습니다. 크고 비밀한 계획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그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미리부터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도저히 살지 못하도록 극한 상황까지 우리를 몰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당신은 아직까지 이 땅에 살아야할 의미가 있습니다. 사명이 있습니다. 고로 부탁합니다. 죽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죽으면 여러분을 낳아주신 부모님도 슬프지만 여러분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매우 슬픕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이 걸렸습니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을 향하고 울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이 그의 눈물을 보았고 그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보시고 살려주었습니다. 그 사명을 마치기까지 15년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를 영원히 살리고 싶었겠지만 어찌합니까? 인간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죽어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되면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더 좋은 영광스러운 육체를 입혀 변화시키고 부활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조차도, 원수조차도 죽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조차도 어찌하든지 살려내기를 기뻐합니다. 하물며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하나님의 자녀 된 저와 여러분들을, 그리고 때로는 힘들어서 죽여 달라고 요청하는 저와 여러분들을 일으켜 세우실 겁니다. 영광스럽게 만드실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참으시고 버텨보십시오. 하나님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감당치 못할 때에는 반드시 피할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당신의 앞길에는 좋은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외치며, 계속 믿음의 전진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