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다. 구주 오셨네!

날짜: 
2022/12/23
말씀: 
시98:1-9
말씀구절: 

1 <시>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3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4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5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6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

7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8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

9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설교: 

한국에서는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를 ‘새 찬송가’라고 하고, 그 이전에 썼던 찬송가를 ‘통일 찬송가’라고 합니다. 저처럼 좀 나이가 드신 분들은 아무래도 이전에 썼던 ‘통일 찬송가’에 매우 익숙해져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통일 찬송가’에 수록된 찬송가 중 상당수를 몇 장, 몇 절, 가사의 토씨까지 거의 암송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새 찬송가’가 나오니 찬송가 장수 찾기가 좀 어려워졌습니다. 가사도 이전 통일 찬송가와 많이 바뀌었습니다. 어떤 곡은 아예 곡조까지 싹- 다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 이렇게 바꿔도 되는 거야?” 하고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옛 것과 다르다보니 실수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아- 이거 안 되겠다.” 싶어 ‘새 찬송가’와 ‘통일 찬송가’를 비교하면서 도대체 뭐가 바뀌었는지 하나하나 일일이 체크해보았습니다. 그거 체크하고 새로 첨가된 곡들을 다시 연습하고 배우기까지 몇 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저의 경우는 남들보다 음악에 좀 재능이 부족하다 보니 지금도 어떤 곡은 반주 없이 부르면 좀 불안하기도 합니다.

뭐- 혼자 부를 때에는 박자가 좀 틀려도 그냥 신나게 노래에 취하여 부르면 됩니다. 그러나 회중과 같이 부를 때에는 박자 음정 틀리면 난처해집니다. 특히 저희 교회는 음악 전공하고, 음악 잘 하시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아- 왜 그렇게 음악을 잘하시는 거예요? 솔직히 좀 부담됩니다. 그 분들 앞에서 박자 음정 틀릴 것 같아서요. 좀 봐주세요.

그렇게 제가 몇 개월 동안 ‘새 찬송가’와 ‘통일 찬송가’를 비교해 보았더니 옛 찬송가 중에 빠진 곡이 74곡이구요. 새로 첨부된 곡이 161곡입니다. 그리고 찬송가를 주제별로 배치해놓았는데 ‘성탄’에 관한 찬송가가 총 24곡이고, 그 중 8곡이 새로 첨부되었습니다. 622장 ‘거룩한 밤’ 까지 치면 9곡이 새로 첨부되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에 관한 찬송가 중에 안 믿는 사람들도 아주 잘 아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기쁘다. 구주 오셨네.’입니다. 제가 구글 서치 엔진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치니까 이런 글이 가장 먼저 나왔습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성탄절 캐럴의 하나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영국의 찬송 작사자 ‘아이작 와츠’가 성경의 시편 98편을 기반으로 쓴 것이다.”

“아- 그렇구나!” 생각하고 작곡가는 누구인가 찾아보았더니 그 유명한 ‘헨델’이란 분입니다. 그리고 이 찬송가 가사가 시편 98편을 기반으로 쓰였다고 하니 제가 시편 98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시편 98편을 본문 삼고 같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아- 노래, 찬송 참 좋습니다. 근데 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합니까? 찬송 안 하면 안 됩니까? 이에 대한 대답이 이사야 43:21에 나와 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즉 하나님이 우리들을 창조하셨는데 그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는 것입니다. 아-그래요? 근데요. 찬송이 꼭 우리의 의무입니까? 찬송하기 싫어도 꼭 해야만 합니까? 아니요.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근데 살다 보면 기분이 아주 좋을 때가 있잖아요. 그때는 “얼씨구 좋다.“ 하고 자연스럽게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잖아요.

이번에도 월드컵을 보니까 아- 관중들이 자기 나라를 응원하며 신나게 노래를 하더라고요. 뭐 한국도 이런 면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민족입니다. 특히 떼창을 하는 아주 유명한 국민들입니다. 아주 신나게 노래합니다. 여러분, 찬송은 절대 강요가 아닙니다. 그냥 하라고 했으니 해야 되고, 까라고 했으니 까야 되는 그런 식의 의무와 명령이 아닙니다.

도리어 찬송은 마음에 감동이 올 때 부르는 곡조 있는 기도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감동도 안 오고, 하기도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은 찬송이 아니라 소음입니다. 비명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하는 노래는 하나님 듣기에 매우 거북합니다.

그런데 세상 노래는 감동이 잘 되는데 찬송가는 감동이 잘 안 되는 분들이 많습니다. 뭐- 저의 경우 보면 대학교 시절 때 팝송을 참 좋아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음악다방에서 몇 시간씩 죽치고 신청곡 계속 DJ에게 보내면서 팝송에 심취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면 왠지 입이 잘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대충 따라서 부르기는 하는데 그냥 의무적으로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이지, 별로 마음에 와 닫지 않았습니다. 전혀 감동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대 제대 후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 크신 예수님의 구원을 깨달았습니다. 거듭났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아- 마음에 벅찬 감격이 왔습니다. 마음속에서부터 ‘할렐루야‘(하나님을 찬양하라)가 계속 나옵니다. 그러고 난 후 찬송가를 부르니 아- 그 찬송가가 새롭습니다. 찬송은 똑같은 찬송인데 이전에 그냥 종교 의식으로만 불렀던 그런 찬송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찬송가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아-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는 것은 새로 작사 작곡한지 1년 이내에 만들어진 노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격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노래는 술 한 잔만 들어가면 감격이 충만하여 저절로 노래가 나오는데 왜 찬송가는 감격이 잘 안 올까요? 그건 하나님의 기적을, 하나님의 구원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입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이런 저런 일로 인해 가장 힘들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워 죽고 싶은데 하나님이 그런 나를 건져주셨습니다. 구원하셨습니다. 그건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아- 이제 살았습니다. 이전에는 나를 조롱하고 손가락질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를 우러러 봅니다. 부러워합니다.

가장 불행했던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아 저절로 노래가 나옵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이 나옵니다. 그게 바로 ‘새 노래’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저가 이스라엘 집에 향하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저주 속에서 신음하던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너희에게 구원자를 보내리라.” 그리고 그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대로 구원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모두가 역사 속에 오신 그 분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너와 내가 우리가 드디어 구원을 얻었습니다.

저주가 떠나가고 심판이 사라졌습니다. 아- 이제 됐습니다. 영광입니다. 고로 우리는 감격하며 노래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아라.” 본문 4절입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소리를 발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아멘!

5-8절도 봅시다. “수금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찬양할지어다. 나팔과 호각으로 왕 여호와 앞에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물이 박수하며 산악이 함께 즐거이 노래할지어다.” 아멘!

제가 이전에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 되신 것을 몰랐을 때에는 “아니, 왜 한국 사람이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찬양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종교가 예수를 찬양하나? 그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 은혜를 받고 보니 예수님이 단지 종교가요, 철학가요, 도덕가가 아니라, 나를, 너를, 우리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입니다.

그 분 때문에 내가 불행에서 행복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분 때문에 내가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분 때문에 저주가 축복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잠시 현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잠시 후 다시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친히 왕이 되시며, 이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완전히 새로운 평화의 나라, 행복의 나라로 바꾸어 주실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와 너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각각의 도시를 맡아서 작은 왕이 되어 세상을 다스릴 겁니다.

본문 9절입니다.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고로 우리는 지금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고 노래하지만, 잠시 후 우리는 “기쁘다, 구주 다시 오셨네.” 하고 노래할 겁니다. 그리고 그때 너와 내가 기쁨으로 그 노래를 감격스럽게 부를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왔다가 그냥 대책 없이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고 혼자 하늘나라로 가신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우리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으로 오셔서 늘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로 우리는 여전히 기쁩니다. 오늘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을 하고, 또 예수님 재림의 날에는 “기쁘다. 구주 다시 오셨네.” 하고 노래할 겁니다.

그러나 구원자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지 못하면 어찌 인생이 기쁘겠습니까? 물론 인생 살면서 잠시의 기쁨은 있어도 그 기쁨이 어찌 영원히 지속되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단지 어떤 사상과 종교와 윤리를 깨닫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실지 인격자이신 그 분이 내 안에 오셔서 나와 함께 인생을 영원토록 같이 사는 것입니다.

고로 나는 행복합니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행복합니다. 즐겁습니다. 아무쪼록 성탄절을 큰 기쁨과 행복으로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신나게 노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구주 탄생의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며, 우리가 사는 이곳 캘거리에도 전하며, 그들도 우리와 같이 기쁨을 나누는 귀한 성탄절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