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한국의 공휴일 중에 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성인들이 그렇듯이 이 땅에 오신 날 즉 탄생일이 있으면, 이 땅을 떠나신 날 즉 죽은 날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이 땅에 오신 날 즉 ‘성탄절’이 있고, 이 땅을 떠나신 날 즉 죽은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일반 성인들과는 다른 아주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도 다른 성인들처럼 죽기는 죽었는데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 이 땅에서 40일 동안 계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친히 증거하시다, 살아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부처님을 비롯해 죽어서 가신 분들은 다시 이 땅에 올 수 없지만, 살아서 가신 예수님은 이 땅에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즉 재림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확실한 증표로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요14:16)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16:7)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유일신입니다. 즉 한 분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이 하나를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이거 굉장히 중요합니다. 같이 한 번 따라해 봅시다. ‘삼위일체 하나님’. 그러니까 아버지 하나님도 하나님이시고, 아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님도 하나님이신데 이 세 분이 하나라는 겁니다.
그리고 세 분의 역할을 보면 아버지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를 담당하셨고, 아들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 속에 오셔서 우리들과 같이 지내면서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하신 것은 바로 보혜사 성령님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이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좀 복잡한 것 같지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40일 후에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천국 가신지 십일 후 오순절 날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천국 가신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아- 참! 가시고 오시고, 또 가시고 오시고 계속 바쁘네요. 그런데 예수님이 가시든지 오시든지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 물론 예수님이 오셔서 성탄절이 생겼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하루 더 노니까 좋기는 한데, 그건 뭐 부처님 오신 날도, 다른 공휴일도 노는 날이니까 같은 의미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는 분들을 위해 설명해드립니다. 지금 이 세상의 인구가 대략 80억 명이라고 합니다. 그들 중에 각 나라의 대통령도 있고, 각계각층의 유명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이 땅에 오신 날이 있고, 또 주어진 인생을 살다가 가신 날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온 날이 있고, 언젠가 이 땅을 떠나는 날이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오고가고 하는데, 즉 태어나고 죽고 하는데,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 오고 가는 것과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오고 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내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과 내가 모르는 사람이 돌아가신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일단 감정에서 차이가 생깁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매우 슬퍼서 눈물이 나옵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돌아가시면 “아- 또 한 분이 가셨구나.” 정도지, 솔직히 그렇게 슬퍼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솔직히 그 분은 한국 사람도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이잖아요? 그치요?
아- 한국의 대통령이 죽어도 그런가 보다 생각하는데 2000년 전 예수님이 오셨든지 가셨든지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냥 각자 자기 인생의 스케줄대로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는 거지, 그게 뭐가 그리 큰일입니까? 아- 맞습니다. 예수님이 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그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하고 어떤 관계인지를 분명히 아신다면 이 말은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셨을 때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2000km나 되는 먼 여행길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발견하고 매우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아니 왜요? 예수님과 동방 박사가 뭐 가까운 친척이라고 되는 겁니까? 같은 나라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다 큰 어른들이 왜 아기이신 예수님께 경배를 합니까? 그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동방박사가 그 먼 거리를 무릅쓰고 찾아와서 기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께 귀한 선물을 드리고 경배하는 겁니까?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 자신들과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타락하자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내시겠다고 여러 번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약속하신 구원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경배한 겁니다. 동방 박사 자신들을 지옥에서, 심판에서 건지시는 구원자가 탄생하셨기에 그들이 목숨 걸고 찾아와 경배를 드리는 겁니다.
초대 교회 때에도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예배드린다고 성도님들이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칼로 목이 잘렸습니다. 고통스럽게 산채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각종 고문을 당하고 불이익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아니 왜요? 바로 그 분이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외국 땅에 와서도 예수님을 믿고 매주일 예배에 나옵니다. 아니 왜요? 이민생활이 얼마나 바쁘고 피곤한데 그러는 겁니까? 다름 아닌 그 분이 나의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놓치면 내 영원한 생명이 완전히 끝장나는 겁니다.
그 분은 놓치면 나와 너는 영원한 파멸이고, 그 분을 믿지 못하면 저와 여러분들이 영원한 불행이고, 영원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에게 있어 예수님 보다 중요한 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찬송을 부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구약 성경의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하면 장차 구세주가 오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의 주제는 마침내 구세주가 오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구세주 예수님이 천국에 가셨지만 보혜사 성령님으로 우리 안에 오셨고, 장차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세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가시고, 또 오시고 가시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 제목이 이겁니다. ‘예수님 오신 날, 예수님 가신 날‘. 뭐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 분명히 오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분명히 가셨고, 또 다시 분명이 오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오셨다 가신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성령님으로 오셔서 우리와 같이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본문 18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우리는 부모가 없는 아이를 가리켜 ‘고아’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도 고아입니다. 20년 전에 저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기에 저도 고아가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이가 아니라 성인입니다. 이제는 저도 벌써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는 고아가 아닙니다.
암튼 고아는 자기를 돌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쌍한 신세, 처량하고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매일 울고 싶고, 매일 우울합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사랑도 못 받고 지내니까 행복의 웃음도 잃어버렸습니다. 인생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의지했던 예수님이 갑자기 떠나가셨습니다. 아- 참 난감합니다. 순식간에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합니까? 당장은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해 어부 출신인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 다시 갈릴리 바닷가에 갔습니다.
이전에 예수님이 “너희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는데 그 사명을 본의 아니게 잊어버렸습니다. 당장 생활이 우선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가면 제자들이 그렇게 될 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님으로 오시어 그들을 다시 돌봐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말씀하셨고,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천국에 가신 지 10일 만에 즉 오순절 날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명의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힘을 얻었습니다. 나가서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행2:38)
그러자 그 날 3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 이거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바입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원하던 바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가 성장이 되고 든든히 설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성령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때가 되면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이 내 곁을 떠나게 됩니다. 너도 나도 고아가 됩니다. 특히 이곳 캐나다 땅에서 살다가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되고. 그 장례를 치루고 다시 캐나다 땅으로 돌아올 때면 우리는 굉장한 허전함을 느끼게 됩니다. “도대체 나는 왜 여기 캐나다 땅에 다시 돌아와야만 하는가?” 하는 물음표도 생기고, 자칫 인생의 활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기분이 업되고 좋았는데, 예수님이 다시 하늘나라로 가시자 허전함이 밀려왔습니다. 불안함도 따라왔습니다. 이제는 도저히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먹고 살기에만 바빠졌습니다. 이런 그들을 다시 변화시킨 것이 바로 성령강림입니다.
즉 예수님이 영으로 다시 그들 속에 오시자 그들이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고, 그들의 불신은 확신으로 바뀌고, 그들의 무기력함은 에너제틱(energetic)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그들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주간이 지나고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아- 기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그런데 아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후 하늘나라로 떠나가셨습니다. 아- 이제 나는 어떡합니까? 아니- 뭘 어떡합니까? 예수님이 성령님으로 다시 오셨으니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살아야 합니다. 힘을 내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을 내십시오. 당신은 지금 혼자가 아닙니다. 고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여러분 안에 성령님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그 분은 이제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신다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오늘 그 분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속 힘을 내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사명도 감당하고 이 외국 땅에서도 계속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