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약이나 신약에서나 똑같이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님의 아주 특이한 계명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원수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모든 크리스천들이 “아멘! 주여- 제가 그렇게 반드시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며 실천을 했다면, 적어도 오늘날의 세상이 이렇게 힘들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니, 모든 크리스천들이 원수를 사랑했다면 이 세상은 벌써 천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주여, 그렇게 하려고 하지만 저도 인간인지라... 그게 어디 쉽습니까?” 하면서 말꼬리를 흐리거나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고 합니다.
즉 이웃사랑, 가족사랑, 친구사랑, 애인사랑, 동물사랑은 하겠지만 원수 사랑까지는 잘 안 된다는 겁니다. 아니 그건 도저히 못하겠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그 말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솔직한 대답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잖아요.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인데, 그래서 이웃 사랑조차도 쉽지 않은데 원수를 사랑하라니요? 그건 너무 무거운 계명이 아닙니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신성을 가지신 분이나 혹은 뛰어난 성인이나 지킬 수 있는 그런 계명이 아닙니까?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몇몇 성인들에게나 한 말씀입니까? 아니면 나 같은 죄인에게도 하신 말씀입니까? 바로 나 같은 죄인에게도, 너 같은 죄인에게도,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도 똑같이 하신 말씀이지 않습니까?
보세요. 본문에 말씀하고 있잖아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7-48)
즉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본문에 보세요.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마5:45) 즉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못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너와 나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원수를 사랑하는데 그 자녀인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건 뭔가 이상한 겁니다. 그러잖아요. 자연법칙 중에 부모의 DNA가 자녀에게 전달되는 확실한 유전법칙이 있습니다. 싫든 좋든 간에 우리는 부모를 닮습니다. 겉모습도 닮고, 속 모습도 닮고, 더 나아가 성격도 인격도 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한다면 우리들에게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DNA가 있습니다. 고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불가능한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도 원수를 사랑했으니 그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너희 자녀들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아버지처럼 자녀인 너희들도 그대로 하면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말씀하고 있잖아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그런데 하나님을 오래 믿는 사람들조차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다른 계명들은 다 지키겠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솔직히 못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저보고 다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솔직히 그건 너무 부담이 됩니다.”
그러면서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 원수를 멀리하려고 하고, 원수를 피해가고, 원수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게 인생 살기에 편하다고 합니다. 사회생활도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게 지혜롭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좀 물어보고 싶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마음이 편합니까?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마음이 편합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모르시는 분들은 스스로 실험을 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그 사람, 그래서 꼬집어주고 싶고, 때려주고 싶은 그 사람을 생각하며 “야- 이 개××야! 나는 너를 미워하고 저주한다. 너 같은 놈은 지옥에나 가라.” 하고 매일 욕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반대로 원수를 생각하며 “나는 너를 그래도 사랑한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여, 내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니 나도 너를 사랑한단다. 그러니 우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 나는 끝까지 너를 사랑한단다.”라고 말해보십시오. 어느 쪽이 내 마음이 더 편합니까?
“아- 목사님! 그런 원수를 향해 실컷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부어야 솔직히 속이 좀 풀어집니다.”라고 하루 이틀, 몇 번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매일 원수를 저주하고 미워하며 한 달 동안 지내보십시오. 절대로 마음이 안 편합니다. 왜 그러지요?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 즉 하나님의 형상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악인은 악을 저지르며 사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마음이 편합니다. 아멘이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원수를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며 살면 가장 힘든 사람은 다름 아닌 본인 자신이 가장 힘들게 됩니다.
고로 원수가 생기면 자기 자신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라도 무조건 그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 물론 그 원수를 생각하면 미워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겁니다. 미워할 조건과 이유를 따지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조건을 따지면서 원수를 사랑하려고 하면 절대 하지 못합니다.
그냥 무조건 사랑해야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unconditional love'입니다. 성경 원어인 헬라어로 하면 ‘아가페’ 사랑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조건을 따지고 우리를 사랑했다면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는 죄로 인해 철천지원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원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즉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조건 따지지 말고 무조건 사랑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처럼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종종 이렇게 질문합니다. “목사님, 그래도 살다 보면 미운 놈도 있고, 예쁜 놈도 있고, 원수 같은 놈도 있잖아요. 안 그래요?”
아- 그렇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놈 밉다고 그 놈에게는 햇볕을 안 비쳐줍니까? 그 놈 밉다고 그 놈에게는 공기 즉 산소를 안 주십니까? 아니잖아요. 즉 하나님은 그런 사람도 사랑해요. 원수도 사랑해요. 그리고 그들에게도 햇볕과 산소를 끊임없이 공급해주고 있어요. 죽을 때까지 공급해주고 있어요.
오늘 본문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5:45) 그래도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는 분들에게는 성경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10절 말씀입니다.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걸 요즘 한국말로 하면 뭐라고 하지요? “지구를 떠나거라.”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했잖아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마10:36) 즉 원수는 나와 가까운 곳에 어디서나 있습니다. 혹시 원수가 없는 곳에 가서 살고 싶습니까? 그런 분들은 지구를 떠나 천국에 가면 됩니다. 아멘입니까?
근데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가면 거기서 묻지 않습니까? “아니, 너 왜 이렇게 천국에 일찍 올라왔느냐?” “아- 예, 그 원수 녀석 보기 싫어서 이곳에 일찍 왔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먼저 온 성도님들이 혀를 끌끌 차며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애야, 여기 천국은 원수를 사랑한 사람들이 오는 곳이란다. 너 같이 원수를 미워하면서 이곳에 피신하려고 오는 곳이 아니란다. 너 도로 지구에 내려가서 원수를 많이 사랑하고 오너라.”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아직도 살아있다는 이유는 아직까지 내가 사랑해야 할 원수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최후의 원수 한 사람까지 사랑을 해야 비로소 우리는 천국에 떳떳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보세요. 이 세상에 원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에게도 원수가 참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많은 원수를 사랑하므로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사랑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사랑이 아닌 원수 사랑으로 증명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거의 모두 원수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행복해지려면 일단 마음이 평안해야 합니다. 그런데 원수를 미워하면 절대로 마음이 평안하지 못합니다. 혹시 원수를 미워하고, 원수를 일부러 멀리하고 사는 데도 마음이 평안하다면 그건 가짜 평안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평안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가짜 평안입니다.
제가 이전에 오늘의 설교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제로 설교를 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어떤 분이 문자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도저히 그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까 자꾸 양심에 찔리고 괴롭습니다. 목사님,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까?”
아- 사실 우리가 각 사람의 사정과 형편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가끔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보면 아주 몸서리쳐지는 원수가 나옵니다. 누가ㅡ봐도 그런 경우 “으- 저 원수 새끼!” 하고 주먹이 쥐어집니다. 즉 ‘원수사랑’ 말은 쉽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까지 63세의 인생을 살면서, 그리고 37년간의 목회를 한 목사로서 단언합니다. 원수사랑 못하면 평안과 행복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잖아요. 가정에서도 원수가 있고, 일터에서도 원수가 있고, 학교에서도 원수가 있고, 한국에서도 원수가 있고, 여기 캐나다에서도 원수가 있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원수가 항상 있는데, 그 원수를 미워하며 살면 어떻게 평안하고 행복해집니까?
그렇다고 아직은 지구를 떠날 수도 없고! 아- 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행복하며 살다가 천국에 가든지, 아니면 원수를 미워하며 마귀의 자녀로 불행하게 살다가 지옥에 가든지! 여러분, 부탁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다가 다 같이 천국에 갑시다. 아멘!
같이 따라해 봅시다. “이 원수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끝까지 너를 사랑한다.” 아멘!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성품으로는 도저히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즉 너와 내가 타락하기 이전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원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그 분의 힘으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원수인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원수인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죄를 지으며 원수 짓을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나를 사랑하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하나님 아버지를 힘껏 본받아야 합니다. 원수인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은 오늘도 나에게 말씀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