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
요즘 한국에서 한창 잘나가는 사람들 중에 개통령이라고 하는 반려견 훈련사 ‘강형욱’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저도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다보니 가끔 이 분 동영상을 보게 됩니다. 아주 긴 영상은 시간 관계상 못보고 짧은 동영상을 보게 되는데, 최근에는 견종별 특성에 대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저의 집 강아지가 ‘비숑’과 ‘푸들’ 믹스견이라 일단 비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애를 키우다 보니 말을 참 안 듣습니다. 자기 좋아하는 것만 하고, 자기 싫어하는 것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집안에 오래 두는 것이 좀 딱해보여서 집 마당에 풀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집안에서는 별로 안 짖는 애가 밖에다가 두면 계속 짖습니다. 아- 참 시끄럽습니다. 아무리 조용히 하라고 해도 계속해서 짖습니다. 이웃에게 매우 피해가 됩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이 녀석을 다시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민트-(강아지 이름) 이리 와.“ 하고 말을 했는데 도리어 그 낌새를 알아채고 눈치를 보면서 살살 도망을 갑니다. 그래서 잡으려고 하면 또 도망가고... ”나 잡아봐라.“ 하고 계속 마당을 빙글빙글 돌며 도망을 갑니다. 절대 안 잡힙니다. 아- 참! 열 받습니다. 진짜 말 되게 안 듣습니다.
결국 먹을 것으로 꾀든지, 아니면 목줄을 가지고 와서 “산책가자.” 하고 꾀어서 간신히 잡습니다. 그리고 “이놈! 너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니?” 하고 엉덩이를 아주 살짝(?) 때려줍니다. 그런데 저희 집 강아지만 말을 안 듣는 건지, 다른 강아지들도 말을 안 듣는 건지, 혹은 견종에 따라 다른 건지 좀 궁금합니다.
얼마 전 이곳 캘거리 연합 집회에 오신 ‘이찬수’ 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저는 이 분에 대해 잘 모르는데 저희 집 사람이 이전에 이 분 설교 동영상을 보면서 이 분이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아- 우리 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말을 얼마나 안 듣든지 매우 화가 난다.” 그런데 그 강아지 견종이 저희 집과 같은 ‘비숑’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하- 이 견종은 말을 잘 안 듣는 경향이 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저희 집 강아지는 ‘푸들’과 섞인 믹스견입니다. 강아지에 대해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푸들은 아이큐가 매우 뛰어난 견종입니다. 그래서 훈련을 시키는데 용이합니다. 반면 아이큐가 너무 좋다 보니 머리를 잘 굴립니다. 자기가 싫은 것은 머리를 굴려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강형욱 훈련사도 포기한 진짜 못 말리는 녀석이 있습니다. 어느 견종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다름 아닌 ‘늑대’입니다. 늑대는 강아지와 99.9% 유전인자가 같다고 합니다. 이 늑대가 어렸을 때는 제법 훈련이 되는 것 같은데, 결국 커서는 늑대의 특성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사람 말 안 듣고 사람과 같이 지내기 힘이 든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혹시 이 자리에 “아- 목사님이 왜 주일 아침부터 개 이야기를 하십니까? 나는 솔직히 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고, 복음을 들으러 왔는데...“ 하고 좀 언짢으신 분이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복음과 연관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서론으로 꺼낸 겁니다.
즉 사람 중에도 못 말리는 부류가 있습니다. 안 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아- 예, 우리 남편입니다. 이 사람 진짜 못 말립니다. 안 통합니다.” 하고 말하고 싶은 아내 분이 있을 겁니다. 물론 이 말은 남편 역시 하고 싶은 말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남편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 우리 아내 진짜 못 말립니다. 안 통합니다.”라고 말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경우가 되고, 쪼다 남편이 되다 보니 그냥 끙- 하고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 자리에 오신 남편 여러분들이여- 말도 못하고 사니까 좀 답답하시지요? 제가 여러분 사정을 잘 압니다. 이렇게 남편 분들이 참 많이 답답할 텐데 하물며 아내 분들은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 여러분들이여, 그냥 “팔자려니..” 하고 포기하고 사십시오. 그게 속이 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 하십시오. “주여- 당신이 짝지어준 이 사람하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매우 답답합니다. 주여- 제 마음을 위로해 주세요.”
자- 오늘은 “그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을 때”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렇게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나발’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나발’이란 이름의 뜻은 ‘어리석은 자, 바보처럼 행동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나발은 자기 이름처럼 매사에 어리석고 자기만 아는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상당한 부자입니다. 하루는 이 사람이 많은 종들을 동원하여 양털을 깎는 큰 잔칫날을 잡았습니다. 이때 다윗이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사울왕의 낮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는 중이었습니다. 먹을 양식은 없고 모두가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나발에게 사람을 보내 부탁을 합니다.
“나발이여, 당신과 당신의 모든 것이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이전에 우리가 당신의 목자와 함께 있었을 때 우리가 그들을 보호해주므로 당신의 소유가 하나도 잃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마침 좋은 잔칫날에 왔으니 우리에게 먹을 것을 좀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자 나발이란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이 누구냐? 어느 집 종이냐? 요즘 종들 중에 주인을 떠난 종들이 많은데, 내가 왜 그에게 내 먹을 것을 주겠느냐?” 하면서 다윗을 모욕하며 다윗이 보낸 사람들을 빈손으로 보내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다윗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골리앗을 무찌르고 한때 이스라엘의 영웅이요, 군대장관인 다윗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이렇게 모욕을 하고, 심지어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좀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도 빵 한 조각 안 주었으니 다윗은 너무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윗 일행이 나발이란 사람을 치기 위해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토리를 잘 알고 있는 나발의 종이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주었습니다. “주인 나발님이 우리에게 이전에 은혜를 베푼 다윗 일행이 와서 음식을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도리어 주인님은 다윗을 모욕하며 빈손으로 보내었습니다. 잠시 후에 다윗이 우리 주인님을 치려고 올 텐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주인 나발님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삼상25:17)
자- 보십시오. 나발이란 사람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대신 말해주는 겁니다. 한편 아비가일이란 나발의 아내는 남편인 나발과 다르게 아주 지혜롭고 현명한 여자였습니다. 그 말을 듣자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에 대해 남편 나발에게 말해보았자 안 통합니다. 남편은 대화가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다급합니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다윗이 나발의 집을 칠 때에 나발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급히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밤에 다윗에게 달려가 절을 하며 말을 합니다. “내 주여- 저희 남편이 저지른 죄를 저에게 돌리시고 마음을 푸십시오.”
결국 다윗은 이러한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과 행동에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그래서 더 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 이렇게 급히 밤중에 달려가서 다윗의 마음을 풀어주고 화해와 화평을 이루고 집에 돌아온 아비가일이 남편을 보니 남편 나발은 술에 잔뜩 취해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도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있었으니 대화가 될 리도 없고 해서 아비가일은 아침까지 그 일을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 말을 해봤자 더 일이 꼬이게 되니까 차라리 말을 안 한 겁니다. 그게 현명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서양에서는 부모가 자기 딸의 이름을 ‘아비가일’이라고 지은 경우도 있습니다. 현명한 여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이전에 저의 집안에도 어머니를 보면 이런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님이 사업도 잘 안 되고 힘이 들 때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 안 믿을 때 일입니다. 그렇게 기분이 나빠서 집에 들어오시고 게다가 잔뜩 술에 취하셨으니 뭐 말을 해봤자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걸 저의 어머님이 아시고 아버님에게 아무 잔소리도 하지 않습니다. 세숫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와서 발 씻겨주시고 일찍 주무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술이 깨고 정신이 들 때 뭔 일이 있었느냐며 슬며시 물어봅니다. 물론 이런 지혜를 얻기까지 저희 어머님도 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이전에는 술에 취해서 들어오시면 잔소리를 하고, 큰 소리가 나고, 뭔가 획획- 날아가고, 저희 자녀들은 숨을 죽이고 눈치를 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님이 나이가 들고 나서 깨달은 겁니다. 사람이 대화가 안 통할 때가 있다. 그렇습니다. 저도 이제 63세가 돼서 깨닫는 것이 이겁니다. “대화가 안 통할 때가 있구나!” 그렇습니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고,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도 어느 주제에 대해서는 대화가 전혀 안 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민감한 주제의 경우입니다. 그걸 이야기 하면 서로 긴장감이 높아집니다. 기분이 상합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속으로만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그것에 대하여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아무리 대화를 하고 납득을 시키려고 해도 안 됩니다. 대충 뭔 뜻인지 아시지요?
본문 잠언 29장 9절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이 그침이 없느니라.” 즉 대화도 안 통하는데 그걸 억지로 계속 하다 보면 결국 다툼이 생기고, 기분이 상하고,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자칫 원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저같이 성격이 좀 급하고 완벽주의자들은 빨리 대화를 하든지, 뭘 하든지 일을 신속히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대화가 안 통하는데 억지로 하다 보면 더욱 일이 꼬이게 되고 맙니다. 더구나 도저히 안 통하는 주제에 대하여 말해보았자 결과는 뻔합니다. 때로는 상식적인 대화도 안 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 마음이 답답하지요. 인상이 찡그려집니다.
그래서 그때 기도가 필요한 겁니다. 모든 일에 대화가 잘 통하는 주님과 대화를 하는 겁니다. 주님께 고주알메주알 아뢰는 겁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안 좋은 마음을 푸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은 나의 상담자입니다. 그 분은 나를 잘 알고 있고, 내가 상대하고 있는 그 사람도 잘 알고 있고, 세상의 선과 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고, 그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도 잘 아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너무나 타락하여서 대화가 안 통하는 존재인 것을 잘 압니다. 더구나 말세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이기적이 되고, 고집이 세고, 마음이 강퍅하여 대화가 안 통합니다. 그러니 대화가 안 통한다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온라인상에만 들어가서 기분을 풀려고 하면 뭐- 그때 그 순간은 기분이 풀리겠지만 그리 추천할 것이 못됩니다. 나중에 스스로 고립이 되고 맙니다.
디도서 3장 10절에 보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합니다. 왜 그러지요? 미혹의 가르침과 미혹의 영에 깊이 빠졌는데 그걸 대화로 해서 해결이 안 된다는 겁니다. 도리어 시간 낭비만 되고, 기분이 상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내 가족인데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즉 기도를 세게 해서 미혹의 영을 쫓아내고, 인내와 사랑으로 풀라는 겁니다.
저의 경우 정반합의 논리로 설교하기를 좋아합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정반합의 논리로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교를 해도 그 이성과 상식조차 안 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거지? 그래서 또 제 나름대로 “아- 그래? 그러면 그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또 다시 정반합의 논리로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아무리해도 안 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럽니까? 그 사람이 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나와 성격도 다르고, 지식도 다르고, 감정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환경도 다르고, 믿음도 다르고... 더구나 고집이 센 사람, 좋게 말하면 자아와 주관이 강한 사람하고는 대화가 더욱 안 통합니다. 그런 사람은 논리로 설득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설득이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평상시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 도둑님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얼마나 상황이 힘들었으면 도둑질을 했겠느냐고 생각하여 그를 더 좋아하고 그를 두둔하고 불쌍히 여깁니다. 반면 자기가 평상시에 싫어하는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면 그는 정말 나쁜 도둑놈이라고 여기며 더 싫어할 겁니다.
예수님이 때로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베풀고 혹은 가르침을 하시고 난 후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반면 “이 일을,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도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 말을 해봤자 도리어 좋지 못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좋은 것도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나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아지 이야기 좀 할까요? 제가 강아지를 키우다 보니까 좀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아지에게 정반합의 논리로 아무리 잘 설명을 하고 대화를 해도 강아지는 고개를 꺄우뚱 합니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전혀 못 알아듣습니다. 그냥 강아지가 알아듣는 단순한 말로 “No! Stop! Wait!” 하든지 해야지 복잡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서로 힘듭니다.
더욱이 고등동물인 인간은 자기 주관과 자기사상이 있기에 대화로도 안 되고, 논리로도 안 먹힐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괜히 이를 가르치려다가 ‘꼰대’ 소리를 듣고, 관계가 서로 틀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저의 경우 이제 목회할 세월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괜히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걸 설명하다가 또 다시 세월이 낭비될까봐 두렵습니다.
그런 옳고 그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그 사람과 같이 천국에 올라가서 나중에 해도 됩니다. 지금은 그 사람 확실히 예수님 믿게 하고, 살살 달래서 천국에 데리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 지옥 가면 나중에 대화할 기회도 없어집니다. 물론 대화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의 주제는 대화가 안 통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해야 될 사람끼리, 혹은 가까이 사이좋게 지내야 할 사람끼리 대화가 안 통할 때, 그 때는 더욱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더욱 사랑해야 할 때입니다. 좀 더 인내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그도 천국에 가야하고, 나도 천국에서 더 많은 상을 받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주님께서 맡겨주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계속 끝까지 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