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12:7∼10 가시가 주는 유익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시는 사도 바울에게는 어찌된 영문인지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시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물론 이 일로 하나님께 기도도 많이 했지만 그 가시는 여전히 제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가시가 자기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가시로 인해서 약해지지는 않으셨습니까? 문제나 환난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대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가시를 주실까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이 가시를 우리에게 허용하실 때는 그 가시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가시가 우리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는지 같이 생각해 볼려고 합니다.
1. 가시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도 가시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해졌을 때는 다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이까!" 그러면서 절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게 마련입니다.
탕자가 그러했습니다. 강할 때는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약해졌을 때에 다시 두 손들고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형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서 자기를 죽이려고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그는 한없이 약해졌습니다. 그때 야곱은 어떻게 했습니까? 얍복 강변에 홀로 남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밤이 맞도록 씨름을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 손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제 힘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 날 밤 야곱은 자신의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항복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형 에서와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육적인 야곱이 변해서 영적인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패배자인 야곱이 진정한 승리자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혹시 가시가 있습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약해졌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부르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때로는 가시를 허락하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2. 가시는 우리를 겸손케 합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천국으로 이끌려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는 소지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찌르는 육체의 가시로 인해서 그는 교만의 시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겪었던 신비한 체험을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12:1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첫 단어가 무엇입니까? '무익하나마.' 즉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신비스러운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겸손하게 '무익하나마'라는 단어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을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14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여기서 말하는 '그'라고 지칭한 3인칭 대명사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바로 바울 자신입니다. 바울은 신비한 체험을 했지만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가 싫어서 '그'라고 하는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 하반부입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즉 바울은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면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만 높이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도 바울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놀라운 천국의 광경을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이것을 들었다, 내가 이것을 보았다"고 하면서 자기를 내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그러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셔서 더 귀하게 쓰시기 위하여 그 가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3. 가시로 약해졌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납니다.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여러분,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흙이 단단해서는 그릇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흙에 물이 들어가서 그 흙이 진흙처럼 부드러워져야 그릇을 제대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쇠로 연장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쇠가 단단해서는 연장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불에 달구어져서 쇠가 부드러워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연장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단단해져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가시를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우리를 찌릅니다. 온유한 심령, 애통하는 심령으로 부드럽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고 난 뒤에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드러날 그때가 우리는 강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시로 인해서 약해졌습니까? 가시가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겸손해져서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더 온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찌르는 가시의 의미가 무엇인가, 가시가 주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가시가 주는 유익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자기를 찌르는 가시를 오히려 기뻐하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물론 가시 자체가 선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사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괴롭힙니다. 못살게 굽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그 가시를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마지못해서 억지로 그 고통을 참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시가 주는 유익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 가시로 인해서 기뻐하고 그 가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자기의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신앙의 성숙한 단계까지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조개 두 마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한 조개가 옆에 있는 조개에게 얼굴을 찡그리면서 자기에게 있는 아픔을 호소했습니다. "아마도 내 몸 속에 가시가 있는 것 같아. 가시가 나를 찔러서 견딜 수가 없이 아파."
그러자 다른 조개가 뽐내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과 바다에 찬미 있어라.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너무나도 건강해. 내 몸 속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곁을 지나가던 게 한 마리가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게는 아픔을 호소하는 조개에게 다가와서 이렇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네가 아픔을 느끼고 있는 것은 너의 몸 속에 진주라고 하는 보석을 품고 있기 때문이란다."
여러분, 진주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부드러운 조갯살 속에 깔깔한 모래알이 하나 박힙니다. 그때 조개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육체의 가시입니다. 조개는 고통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생명의 즙을 짜냅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계속해서 잠시도 쉬지 아니하고 생명의 즙을 짜내고 또 짜내어서 그 깔깔한 모래를 감싸고 또 감쌉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진주입니다.
여러분, 가시가 찌릅니까? 우리는 진주를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엄청나게 값진 진주를 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가시가 있었는데 왜 우리에겐들 가시가 없겠습니까?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중병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성적이 떨어질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사업을 잘하는 사람도 때로는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도 때로는 가시와 같은 존재를 만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에게도 가룟 유다와 같은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룟 유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 정리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그 가시를 우리에게 허용해 주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가시로 인해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다. 그 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가시로 인해 약해졌을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쉽게 좌절해 버립니다. 때로는 자기의 목숨을 끊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가시가 우리를 찌를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더욱 겸손해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 가시를 기뻐하며 우리의 약함을 도리어 자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젠가 그 가시를 제해 주시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의 상처를 영광으로,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바꾸어 나가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가시가 주는 유익
날짜:
2004/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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