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9:71 고난을 통하여 피는 부활의 꽃
여러분, 혹시 이런 시를 들어 본 적이 있지는 않습니까?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을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여러분, 이 시의 저자는 ‘서정주’라고 하는 한국 시인입니다. 그리고 제목은 ‘국화 옆에서’입니다. 이 시의 주제는 같이 감상을 해서 아시다시피 인고의 세월을 거쳐서 도달한 생의 원숙미입니다. 즉 한 사람의 아름다운 인격의 국화꽃이 형성되기 위하여 수많은 고난과 역경의 세월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 시의 주제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성경은 우리들도 고난을 통하여 더욱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표적 성경구절은 시편 119편 67절과 71절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즉 고난은 나를 파괴하는 도구가 아니라 나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고난에 대하여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결이 됩니다. 그리고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잔잔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음 주일은 기쁨의 부활주일입니다. 그러나 항상 부활주일이 있기 전 고난주일이 먼저 있습니다. 즉 기쁨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하여 먼저 슬픔의 고난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의 신자들은 고난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난주일은 없고 오직 부활주일만 맞이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가져다주는 구원과 치료와 축복에만 관심이 있고, 예수님이 함께 지자고 하는 고난의 십자가는 지려고 생각을 하지 않는 아주 약삭빠른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똑똑한 것 같지만 실지는 진리를 벗어난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기적이요 타락한 신앙입니다. 올바르지 못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쁨의 부활주일을 맞이하기 위하여 먼저 슬픔의 고난주일도 맞이하기 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예수님은 우리를 그냥 구원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먼저 버리셨습니다. 우리에게 치료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찢는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영광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먼저 고난을 통하여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영광을 취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이 고난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고난은 부활의 전주곡입니다. 고난의 팡파르가 울리면 잠시 후 부활의 팡파르도 함께 울리게 됩니다. 고로 고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신앙심 깊은 어머니가 남편 학대에 시달리다가 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심히 폭력적인 아버지가 농민들을 괴롭히다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는 것을 18살 때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그는 평생에 간질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학교에서 따돌림 받고 공부에 낙제하여 고독한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청년시절에는 문학과 사회주의에 심취하여 기독교를 ‘권력에 붙은 종교’라고 혐오하며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8살 때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려고 비밀조직에 가담한 죄로 체포되어 총살형을 받고 사형대에 묶여 ‘내 인생이 이제 이렇게 끝나는구나!’ 생각하며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사형집행이 막 시작될 무렵 멀리서 한 병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고함을 칩니다. “사형중지! 사형중지! 황제의 특명이요, 이렇게 그는 기적적으로 사형을 면하는 대신에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자들을 태우고 가는 기차가 간이역에서 잠시 설 때에 한 부인이 그에게 조그마한 성경책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의 유배지에서 온갖 흉악한 범죄자들과 부대끼고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힘든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틈틈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작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고 증명해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 나는 진리보다 차라리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다.'고 뜨거운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4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동안의 고난의 체험과 깨달음을 통해 주옥같은 소설들을 써내려갔습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러한 불후의 명작들은 그가 겪은 고통이 작품 속에 절묘하게 스며들어 새롭게 태어난 작품들입니다. 사형을 언도받고 죽어야 했던 그가 하나님의 섭리로 구제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예수님에 대한 꿈을 갖게 되고 믿음을 얻게 되자 그 고난의 텃밭이 오히려 위대한 문학작품을 생산해내는 텃밭이 된 것입니다.
한국 격언에 ‘젊어서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고난이 당시에는 슬퍼보여도 그 고난을 잘 통과하면 나중에는 더욱 큰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유익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그에게 미래의 찬란한 꿈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먼저 요셉에게 고난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요셉은 배다른 형들로부터 인신매매를 당하여 애급의 노예로 끌려가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억울하게도 강간범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3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하여 요셉에게 인내를 배우게 하셨습니다. 억울해도 참고 용서하는 넓은 마음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의 인격이 갖추어지자 하나님은 그를 애급의 국무총리가 되게 하시고 자신을 인신매매한 형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기근에서 구출하도록 하셨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형들은 원수와도 같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인신매매한 배다른 형제들에게 큰 기근시에 양식을 주지 않고 그들을 그냥 굶주려 죽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자신을 인신매매한 배다른 형들과 그 가족들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이 이렇게 국무총리가 된 것은 바로 원수 같은 형들과 그 가족들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과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냥 생기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이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고난을 통하여 이런 교훈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그 형제들을 죽였을 것이요, 결국 그 형제 가운데 유다라는 형에서 나오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까지도 막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즉 요셉의 고난이 결국 메시아 예수임을 이 땅에 오시게 하는 길을 닦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요셉의 고난이 저와 여러분을 살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난이 자신을 죽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이 자신을 살리고 가족을 살리고 이웃을 살립니다.
이러한 고난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고난이 다가오면 무조건 불평하고 무조건 원망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고난의 기독교는 미련하고 값어치 없는 골동품에 불과합니다. 고로 그들은 결국 참된 신자가 되지 못합니다. 고난에 대한 바른 신앙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신자는 불량품신자가 되고 맙니다.
하루는 영국의 조지왕이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왕은 두개의 꽃병이 전시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 꽃병들은 같은 원료로 만들어졌고 그 스타일과 무늬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광채가 찬란하게 나고, 하나는 희미하고 뿌옇고 광채가 나지 않았었습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조지왕은 관리인에게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관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하나는 불에 구워지지 않았습니다. 즉 고난은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특별히 제작하여 전시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관리인의 말처럼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마치 불에 구운 도기와 같아서 빛이 나고 영광이 납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굽지 아니한 토기와 같아서 빛이 나지 않고 쉽게 깨어지고 맙니다. 고로 베드로전서 1장 7절은 이렇게 진리를 말씀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향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발칸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향수제조자는 반드시 한밤중에 장미를 딴다고 합니다. 그들은 밤 12시에서 새벽 2시까지 발칸산맥에 가서 그 장미꽃을 따서 향수를 만듭니다. 왜냐하면 장미는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발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태양이 비취는 낮에는 장미향기의 40% 가량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밤 12시에서 새벽 2시까지의 캄캄한 인생을 통과할 때 우리의 믿음이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고난을 통하지 아니하면 평범하게 살았어야 될 사람도 고난을 통하면 그를 통해서 굉장한 향기를 발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그의 삶에 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고난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아름다운 부활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부활의 꽃을 피운 사람들을 역사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루주벨트는 소아마비와 알바레스씨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회담에 나갈 때마다 보좌관의 부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과 싸우면서 미국 경제공항을 타개한 유명한 정치인이 될 수 있었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을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윈스턴 처칠은 항상 심장병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노력이 결국에는 부활의 영광의 꽃을 피우며 그를 위대한 정치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프랑스의 영웅이었던 드골도 일평생을 당뇨병과 백내장으로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그 병과 싸우면서 부활의 영광의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와 나폴레옹은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폐결핵에 걸려 몸이 매우 허약했지만 영국 사회를 살리고 감리교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존 번연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불후의 명작인 ‘천로역정'을 썼으며 세계인의 영혼을 뒤흔든 헨델의 '메시아'도 호화스러운 작곡실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반신불수가 되어 감옥에 갇힌 후에 감옥에서 작곡한 것이 바로 헨델의 '메시아'인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고난의 씨앗으로 인하여 오히려 찬란한 부활을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고로 영국의 퀘이커 교도인 윌리암 펜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고통을 겪지 않은 승리는 없다. 가시의 길을 통과하지 않고 옥좌에 이룰 수는 없다. 환란 없는 영광은 없다. 친구들이여, 고난을 기뻐하라.” 결론을 맺습니다. 이 고난주간에 오히려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 고난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부활의 꽃을 피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