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5:13 고난 속에 피는 부활의 꽃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애급의 피라미드를 연구하던 중 그 안에서 미이라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미이라의 손에 쥐어져 있는 한줄기 꽃을 발견했습니다. 그 꽃은 외부의 공기와 접촉하자 순간적으로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단지 꽃씨만 남았습니다. 고고학자들은 3천년이 넘은 그 꽃씨를 영국으로 가져와 화단에 심었습니다. 그러자 싹이 나고 잎이 피어 아름다운 꽃이 피었습니다. 그러나 그 꽃은 영국 식물학회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웨덴 식물학자 다알의 이름을 따서 그 이름을 다알리아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다알리아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3천년의 세월이 흘러 그 꽃씨는 바짝 말라서 미이라처럼 되었으나 그 안에 부활의 생명이 들어있으므로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었습니다. 여러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 속에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란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부활의 생명이 있다면 우리는 그 숫한 고난의 텃밭을 뚫고 아름답게 꽃피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 속에서 피는 부활의 꽃에 대하여 알아보므로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이 외국 땅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딛고 부활의 꽃을 피우기를 축원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설치된 한 강제수용소의 벽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믿노라. 구름에 가리워져 햇빛이 비취지 않을 때도 태양이 존재하는 것을... 나는 믿노라. 내가 느낄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나는 믿노라.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그 침묵 뒤에 여전히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에게 고난이 다가오면 종종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구름에 가려 태양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태양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독한 고난과 역경으로 인생에 먹구름이 가득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저와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을 믿으면 그 믿음은 결국 고난 속에서도 아름다운 부활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고통은 참으로 참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통을 죽기까지 참을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그 고통의 잔을 마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원수들에게는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3년 반 동안 예수님이 복음을 증거했는데 원수들은 집요하게 예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로마의 법과 유대인의 모함으로 예수님은 잡혀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원수들은 예수님에게 심한 모욕과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쇳조각이이 박힌 채찍으로 온 몸에 살이 터지고 피가 흐르도록 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틀에 올려놓고 대못을 박았습니다. 머리에는 찔레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씌워서 얼굴과 눈에 피가 흥건히 고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들은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합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지어다.”
원수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고 난 후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은 아주 끝난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고난이 다가오자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도망을 갔습니다. 심지어 수제자인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며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원수들이 생각할 때 예수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서 완전히 파멸 당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난의 텃밭에서 찬란한 부활의 꽃을 피우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보면서 우리들의 삶에도 고통과 고난이 따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살기 좋다고 하는 이곳 캐나다 땅에서도 고통과 고난은 있습니다. 더욱이 낮선 외국 땅에서 겪는 고난의 느낌은 고향 땅에서 겪는 고통보다 더욱 세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때때로 우리들에게 큰 스트레스를 주기고 하고, 때로는 슬픔과 함께 복받치는 통곡의 눈물을 흘리게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고난 속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찬란한 부활의 꽃을 피우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극한 고난 속에서도 부활의 꽃을 피우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남편의 학대에 시달리다가 결핵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심히 폭력적인 아버지가 농민들을 괴롭히다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는 것을 18살 때 목격했습니다. 그 큰 충격으로 인하여 그는 평생에 간질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학교에서 따돌림 받고 공부에는 낙제를 하였습니다. 그의 인생은 고통과 고독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청년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여 기독교를 권력에 붙은 종교라고 혐오하며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로 혁명을 일으키려고 비밀조직에 가담한 죄로 체포되어 총살형을 받고 마침내 사형대에 묶였습니다. 그는 사형대에서 자신의 28년의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그러나 막 사형집행이 시작될 무렵 멀리서 한 병사가 흰 손수건을 들면서 고함을 치며 달려옵니다. “사형중지! 사형중지!” “황제의 특명이요. 사형 집행을 중지하시요." 그래서 그는 기적적으로 사형을 면했습니다. 그리고 사형대신 시베리아로 유배 가는 기차를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시베리아로 유배 가는 간이역에 설 때에 한 부인이 그에게 조그만 성경책을 건네주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시베리아에서 온갖 흉악한 범죄자들과 부대끼고 혹독한 추위와 싸우며 힘든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틈틈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작은 성경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뜨거운 신앙 고백했습니다.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고 증명해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 나는 진리보다 차라리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다.”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간의 시베리아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고난의 체험과 깨달음을 통하여 주옥같은 소설들을 써내려 갔습니다. 그의 이러한 작품들은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제목으로 우리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불후의 명작들은 그가 겪은 큰 고통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꽃을 피우며 탄생된 작품들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믿음의 선진들에게도 고난이 있듯이 우리들에게도 나름대로 크고 작은 고난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고난이 있었고, 이곳 캐나다에서도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앞으로도 우리의 삶 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난 속에서 낙심하고 절망하며 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 찬란한 부활의 꽃을 피우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꽃은 죽음이라고 하는 고난을 통하여 피우게 됩니다. 즉 고난 없이는 부활의 꽃도 없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고난은 찬란한 부활의 꽃을
피우는 텃밭이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어떠한 고난도 우리를 파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또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부활의 꽃을 피우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늘의 고난 속에서 원망불평을 하며 스스로 늪 속에 빠지고 말지만, 우리는 오히려 고난을 영양분으로 삼고 부활의 꽃을 피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할 때 우리는 그 고난이 영광을 얻는 길이라는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그것만 바라보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면 스스로 파멸되고 맙니다. 우리는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는 이곳 외국 땅에서 어떠한 고난이 다가와도 찬란한 부활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잠시 동안 고난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찬란하고 영원한 부활의 주인공입니다. 우리에게는 잠시 고난주간도 있지만 찬란한 부활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됩니다.
영국의 조지왕이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거기에는 두개의 꽃병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 꽃병들은 같은 원료로 만들어졌고 스타일과 무늬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광채가 찬란하게 났고, 하나는 희미하고 뿌옇고 광채가 전혀 나지 않았었습니다. 참으로 볼품이 없었습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조지왕은 관리인에게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관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하나는 구워지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제작하여 전시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가 고난을 당하면 그 고난이 나를 파괴하고 망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을 당하면 마치 불에 구운 도기와 같아서 더욱 빛이 날것이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뜨거운 불 속에서의 고난을 당하지 않고 굽은 토기는 빛이 나지 않고 쉽게 깨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뜨거운 고난을 견디고 나온 토기는 견고합니다. 빛이 납니다. 성경도 이 사실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그러므로 이곳 외국 땅에서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찬란한 부활의 꽃을 피우는 것을 바라보십시오. 내게 다가오는 고난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부활을 가져온다는 꿈을 꾸십시오.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의 처절한 아픔과 고통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 고난의 텃밭에 심어졌으므로 나는 부활의 꽃을 피운다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이 있는 백성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꿈을 꾸면 하나님은 그 고난 속에서 반드시 부활의 꽃을 피우게 만들어주십니다.
향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발칸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향수제조자는 반드시 한밤중에 장미를 딴다고 합니다. 그들은 밤 12시에서 새벽 2시까지 발칸산맥에 가서 그 장미꽃을 따서 향수를 만듭니다. 왜냐하면 장미는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발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태양이 비취는 낮에는 장미향기의 40% 가량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밤 12시에서 새벽 2시까지, 즉 캄캄한 인생의 고난을 통할 때 향기를 발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지 아니하면 평범하게 살았어야 될 사람도 고난을 통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굉장한 향기를 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삶에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 고난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물론 고난은 예수님에게조차 힘이 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고난을 싫어하고 부활의 영광은 원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영광의 꽃은 고난의 텃밭에서 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절대로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밤을 지날 때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리이다.’ 하고 기도하며, 잘 인내하고 나아가면 마침내 부활의 아침이 다가옵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도 고난을 극복하고 찬란한 부활의 꽃을 피우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 속에 피는 부활의 꽃
날짜:
2008/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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