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4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악을 행하지 말게 하시며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말게 하소서
미국의 어느 목사님은 ‘불평록’이라는 아주 특이한 노트 한 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다른 교인을 비방하거나 이런저런 일에 대해 불평을 하려고 찾아 왔을 때, 그 목사님은 그 불평록을 꺼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불평록에 당신의 말을 모두 적어놓을 테니 나중에 서명이나 해주십시오. 여기에 적힌 것은 모두 시정이 되도록 관계자들에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불평하려고 찾아왔던 사람들은 “아니, 사실은 그게 아니고... 뭐 기록까지 남기고 서명까지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고 꼬리를 감추고 당황한 채 돌아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름 아닌 이런 저런 사소한 일에도 불평을 터뜨리면서 막상 그 불평에 대한 책임은 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은 40년이 넘도록 불평록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 한 줄의 불평의 이야기도 그 노트에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제가 생각했습니다. “아- 이것 참 좋겠다. 나도 이 목사님처럼 불평록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그러면 모든 불평이 사라지고 목회하는데 참 편하고 좋을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 우리 교회 성도님들 중에 진짜 이때에 쓸데없이 용감한 분이 나타나서 그 불평록에 진짜 자기 서명을 하고 불평을 잔뜩 쓰면 어떡하지! 에이-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하고 이 아이디어를 접어버렸습니다. 어때요? 잘 접었지요?(몰라요?)
여러분, 우리도 한 마디 한 마디를 쏟아내는 말에 내가 직접 책임을 지고 서명을 한다는 심정으로 말을 하면 어떠할 것 같습니까? 그러면 자기의 인격이 파탄되는 거짓말이나 터무니없는 루머를 지어내는 말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자기의 인품을 떨어트리고, 결국은 자기도 망하고 남들도 불행하게 만드는 원망 불평의 말도 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요즘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 앞에서 혹시 불평을 늘어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불평을 들으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그 사람과 같이 마음이 짝짜꿍 동조가 돼서 더욱 신나고 열을 받습니까? 아니면 속으로 “에이- 이 저질아!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고 그 불평하는 사람과 그 사람의 말을 물리치는 편입니까?
여러분, 사람들이 불평하는 말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뭐 나름대로 일리가 있기도 하지만, 대개는 자기가 책임을 지지 못하는 불평과 원망이 대부분입니다. 즉 우리는 불평하지 않아도 될 것을 불평하고, 때로는 감사해야 될 일을 도리어 불평과 원망으로 바꾸는 일을 자주 합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로 행했습니다. 즉 범사에 불평했습니다. 꼭 청개구리 같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하루에 일흔 번의 일곱 번까지 감사를 해야 하는데, 툭-하면 불평했습니다. 종일토록 불평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오늘 이에 대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모세는 각 지파별로 한 명씩, 이스라엘의 족장 12명을 선발해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40일 동안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 보고합니다. 12명 중 10명은 그 땅에 대해 악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그 땅은 좋은 땅이라고 하는데 왜 자꾸 반대로 말하는 겁니까? 덧붙여 하나님에 대해 불평을 하고, 모세를 향해 원망을 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모두 다 낙심을 하며, 하나님과 모세에 대해 원망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책임 있는 10명의 지도자들의 불평 한 마디 한 마디가 결국 모든 백성들의 믿음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의 희망을 산산조각 깨트렸습니다. 큰 절망감에 빠트렸습니다. 그러자 가나안 땅에 들어갈 힘이 없어졌습니다. 다시 노예의 땅인 애급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미움을 사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 축복의 약속을 받은 백성들이지만 축복의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40년 동안 광야에서 모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아- 고지가 바로 눈앞인데 안타깝게도 그 앞에서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반면 12명의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그들 다수의 원망과 불평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다 듣고, 다 보고, 다 아시는 분입니다. 누가 환경만 보고 불평하는지, 누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지키는지 다 아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뿌린 대로, 심은 대로 각각 그 열매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원망 불평하는 자들은 다 쓰러졌고, 그때 믿음을 지켰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살면서 한번도 원망 불평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평을 너무 자주하고, 그 도가 너무 지나치면 안 됩니다. 불평을 하더라도 빨리 돌이켜 감사로 바꿔야 합니다. 계속 불평을 달고 살면, 마귀가 너무 좋아하며 그에게 가까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귀가 가까이 오면 결국 마귀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인생이 파탄이 나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에 그 분이 단 한 마디라도 원망 불평을 하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 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지만 태어날 때에 호화로운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 어느 허름한 여관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여관에 방이 없어서 냄새나고 추운 마구간으로 쫓겨나다시피 하여 그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포근한 아기침대가 아닌 짐승의 밥그릇인 구유에 포대기로 싸서 뉘였습니다. 아니, 세상에 흑수저도 이런 흑수저가 없습니다. 오늘날 성탄절 크리스마스카드에는 이러한 모습을 아주 포근하고 아름답고 낭만스럽게 그렸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이건 너무나 비참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의 환경과 처지를 한탄하면서 부모님을 향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즘 보면 자녀들 중에 자기 부모님에게 “왜 우리는 가난해요?”라고 물어보는 아이들이 있을 겁니다. 아- 어린 자녀가 그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아마 가슴이 덜컹- 하며 상당히 큰 쇼크를 받을 겁니다. 여기 계신 부모님들 중에 혹시 이런 말을 자기 자녀에게 직접 들어보신 분이 있습니까? 아직 한 번도 가난해보지 않아서 이런 말을 자녀에게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에는 한국 사람들이 거의 다 가난한 처지였었습니다. 뭐- 가난이 일상이고, 일상이 가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이 부모에게 “왜 우리는 가난하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뭐- 당시엔 너도 나도 다 가난한데... 비교가 될 부자들이 어느 정도 있어야 그런 질문도 하지요.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제법 부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감한 청소년들이 이에 대해 상처도 생길 수 있고, 부모님에게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제가 상당히 궁금한데 자기 자녀들이 “왜 우리는 가난해요?”라고 질문하면 이때 부모님은 어떻게 대답하시는가요? “야- 이놈아! 그래, 니 애비 어미가 못나서 이렇게 가난하다. 너도 이렇게 가난하게 살기 싫으면 당장 집 나가면 될 것 아니야.”라고 자녀에게 버럭- 화를 내며 말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 분명히 가난이 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가난한 자가 무시 받고 멸시받는 것을 종종 봅니다. 이에 대해 자기 자녀들이 남들과 비교를 하면서 부모님에 대해 원망을 하거나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흑수저로 태어난 것에 대해 한 마디 불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성경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부모님을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2:51)
그리고 예수님이 자라나신 곳은 ‘나사렛’이라고 하는 아주 촌구석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요1:46)고 할 정도로 지독히 무시 받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깔보면서 부르는 것에 대해 그들을 향해 화를 내거나 원망하고 불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먹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심지어 12 제자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수제자라고 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면전에서 대놓고 욕하고 저주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아니, 뭐 저딴 저질 같은 녀석들이 다 있나?” 하고 그들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고 투덜거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을 향해 한 마디의 원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일생 중에 한 마디의 불평이라도 있었다면 우리들도 “아- 예수님도 그때 불평을 하셨잖아요.” 하고 뭔가 핑계를 댈 수 있을 텐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성경에 예수님이 불평하셨다는 것을 단 한마디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왜 예수님은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불평 한 마디 안하셨을까요? 이에 대해 좀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예수님이 한 마디라도 불평하셨다면 성경에 우리보고 감사하라고 하신 그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못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책임이 있는 자리의 사람들은 불평하면 안 됩니다. 만약 예수님이 몇 번이라도 불평을 했다면 그건 메시아이신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고, 기독교의 큰 수치가 되는 겁니다. 즉 불평하면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자녀가 어디 가서 자기 부모에 대해 불평하면 그건 자기 집안 전체를 욕 먹이는 것이요, 부모가 자기 자녀에 대해 불평하면 그것 역시 스스로 자기 집안을 콩가루 집안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곳에 속해 있으면 그곳을 비난하거나 그곳의 사람들을 불평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아니- 자기가 지금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거기서 월급을 받고 있는데 자기 회사에 대해 혹은 회사의 사장이나 아무개에 대해 불평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바른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러한 불평을 하나님도 듣고 있고, 마귀도 듣고 있고, 낮에는 새가 듣고, 밤에는 쥐가 듣습니다. 아- 요즘은 뭐- 몰래 카메라, 몰래 녹음을 해서 나도 모르는 그 말들을 다 녹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임이 중요한 사람일수록 말에 더욱 조심해야 하는데 특히 원망 불평의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은 나의 죄, 너의 죄,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큰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죽기까지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순종하심으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러한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길을 가려고 계속 다짐에 다짐을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네가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 야고보 사도도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5:9)
여러분, 불평과 원망은 전혀 무익한 말입니다. 자기의 뼈와 살을 깎아먹는 매우 해로운 말입니다. 고로 타락한 본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그러한 원망과 불평의 말을 제어해야 합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 죄악을 행하는 자와 함께 악을 행치 말게 하시며, 저희의 진수를 먹지 말게 하소서.“(시141:3-4)
여러분, 불평은 전염성이 매우 강한 무서운 일급 전염병입니다. 고로 불평하는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이런저런 불평의 기침을 콜록콜록 할 때, 슬며시 그 자리를 피하십시오. 어떻게 그 자리를 피하냐고요? “아 참! 제가 오늘 뭘 해야 하는데 깜빡 잊고 있었네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아- 목이 마르네요.” 하고 그 자리를 가능한 빨리 피하십시오.
그리고 애초에 그런 불평의 사람들이 내 앞에서 이런저런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지 못하도록 그런 일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마십시오. 그래서 그 사람이 “아- 저 양반 앞에서 원망과 불평을 하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아. 저 사람 앞에서는 불평하면 안 되겠네.” 하고 모두에게 인정을 받도록 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중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그 귀한 믿음을 저버리고, 쓸데없이 남의 불평 소리에 감염되어, 믿음이 파괴당하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남이 하는 그 불평과 원망의 전염병에 걸려 자기도 똑같이 불평과 원망으로 투덜투덜 대며 사는 사람입니다. 같이 한번 따라해 봅시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절대로 원망 불평하지 않는다. 마귀야, 물러가라.”
성도 여러분, 혹시 누가 나에게 다가와 이런저런 불평을 합니까? 원망 거리로 내 마음을 헤집어 놓으려고 합니까? 그럴 때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십시오. 그게 과연 믿음의 말인지, 혹시 서로를 이간시켜 너와 나의 화목을 깨트리고, 더 나아가 하늘나라를 파괴하려고 하는 말이 아닌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명심하십시오. 불평하는 사람은 항상 뒤에서 문제를 생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불평의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언제가 그 불평의 말에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희 가운데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0-11)
결론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그간 우리들의 삶속에서 저지른 불평과 원망의 죄를 각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합시다. 그리고 이제부터 매사에 범사에 감사의 말을 많이 하는 바른 성도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또한 우리들의 그 감사의 말로 인해 하나님이 크게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더욱 아름답게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불평과 원망의 말을 우리들의 입에서 제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말들이 나오지 않도록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주시옵소서. 자꾸 그런 불평의 말을 하게 하는 사단의 세력을 물리쳐주시옵소서. 이 땅에 계실 때 그 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한 마디 불평과 원망의 말을 하지 않으시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주님과 더불어 나도 그 길을 감사하며 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