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짜리인가?

날짜: 
2007/05/26
설교: 

고전6:19-20 나는 얼마짜리인가?
한 때 사오정시리즈라는 유머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오정시리즈 중에서 ‘백팔마왕의 이야기‘를 들어보신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백팔마왕이 나타나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오정이 무장을 하고 백팔마왕을 쳐부수기 위하여 백팔마왕이 살고 있는 108 계단 밑으로 갔습니다. 백팔마왕이 108 계단 아래 있는 사오정을 겁주기 위하여 사오정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하하, 난 백팔마왕이다."
그런데 백팔마왕의 고함소리를 못 알아들었는지 사오정이 도망을 가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것이었습니다. 백팔마왕은 사오정이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한 계단을 내려와서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하하, 난 백팔마왕이다." 그래도 사오정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 계단 내려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하하하, 난 백팔마왕이다.” 그러나 역시 사오정이 못 알아들으니까 또 한 계단 내려와서 소리를 지릅니다. “하하하, 난 백팔마왕이다.” 이런 식으로 108 계단을 하나씩 내려오며 “하하하, 난 108 마왕이다.” 하며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급기야 백팔마왕은 108 계단을 모두 다 내려온 뒤 사오정 앞에 섰습니다. 그러자 사오정은 자기 앞에 서있는 백팔마왕의 눈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넌, 누구냐?" “씨- 난 백팔마왕이라니까!”
여러분, 사오정이 “넌 누구냐?”고 질문했는데 이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이십니까? 여러분 속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개하기 위하여 때때로 명함도 주고받고, 또 필요하다면 이력서와 경력증명서를 제출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명함과 출신지와 나이와 학력과 경력과 집안배경, 등을 기록한 이력서나 경력증명서가 우리를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지금 우리는 ‘계량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과 달리 요즘에는 나이가 몇 살이고, 연봉은 얼마이며,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자녀는 몇 명이고, 은행에 예금한 돈이 얼마인가를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만 있으면, 누구든지 어느 정도까지는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느 유명 결혼정보업체에서는 60억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배우자 지수’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신랑감과 신부감의 점수를 매긴 후, 중매할 때 그 기준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 채점표에 따르면 남자는 직업에 따라 최대로 30점, 학벌과 재산과 집안에 따라 각각 최대로 20점, 외모는 최대로 10점인데, 매우 잘 생긴 얼굴에 키 175~180cm, 몸무게 78kg 이하가 될 때, 10점 만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와 기준이 많이 다릅니다. 남자는 직업과 집안과 재산의 점수 비율이 높은 반면, 여자는 외모의 점수 비율이 높아 최대로 30점이나 됩니다. 그런데 예쁜 용모에 키 163~168cm, 몸무게 55kg 이하가 될 때, 30점 만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벌, 집안, 직업에 따라 각각 최대로 20점인데 반해, 재산 상태에 따른 점수는 10점으로, 신부들은 재산보다는 외모와 학벌, 등이 비중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혼정보업체에서는 총점 100점 중, 각 항목에 따른 점수를 다 합해서, 총점이 65점 미만인 경우에는 아예 중매 접수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량화 작업은 비단 결혼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취직을 하려고해도 ‘신입사원 채용점수’를 따지고, 승진을 하려면 ‘인사고과 점수’를 따지고,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면 ‘신용 점수’를 따집니다. 그래서 점수에 따라 직장의 취직이 결정되고, 점수에 따라 연봉과 보너스가 결정되고, 점수에 따라 은행 융자와 그에 따른 이자가 달라집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소유나 업적이나 직책이나 외모나 인맥들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 많이 벌기 위해서, 더 많은 업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더 많은 인맥을 구축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인생의 핵심 가치는 아닙니다. 인생의 핵심가치를 환경에 따라 흔들리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외부적인 조건에서 찾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인생의 핵심가치는 외부적인 조건에 있지 않고 우리의 존재 자체에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의 가치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요?
오늘 본문 19절부터 20절은 우리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구절에서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 값을 대신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서 저와 여러분들을 구하신 것입니다.
한 노인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심장에 불순물과 노폐물이 많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의사의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건강한 사람의 심장을 이식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연세가 많이 드신 그 분은 “누가 자신을 희생해 가며 나 같은 늙은이에게 심장을 이식해줄까?”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입원실 문이 열리더니 한 젊은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그 청년은 의사에게 자신의 심장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아니, 젊은이, 어찌 젊은이가 나대신 죽으려 하는 건가? 나는 살만큼 산 사람이야. 죄도 많고 추한 노인이라네. 자네는 젊고 미래가 있는 사람인데 왜 이러는 건가? 이러지 말게.”라고 말하는 순간, 그 노인은 의사의 마취 주사를 맞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노인은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런데 옆을 보니 그 젊은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노인은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노인대신 죽은 건강한 젊은이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100년도 살지 못하고 우리의 심장은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한 심장을 떼어내고 영원히 사는 심장을 달아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혹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루셨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당신은, 나는 얼마짜리입니까?” 이 대답에 우리는 ‘예, 저는 예수님짜리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가치는 사람이 인정해준 가치가 아닙니다. 사람이 인정하는 가치는 수시로 변합니다. 서로 간에 친할 때는 없어서 못사는 관계가 되어 후하게 가치를 매겨줍니다. 그러나 서로 간에 등을 돌린다던지, 관계가 멀어져 가면 박하게 가치를 매기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의 가치를 어떻게 매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가치를 어떻게 매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란다. 내가 너희를 값으로 샀단다. 너는 그 값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 우리의 가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짜리’인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치는 세상의 물건과 달리, 절대로 변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세상의 물건들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됩니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값이 변합니다. 처음 나왔을 때는 비쌌다 할지라도, 시간이 흘러 중고품이 되면 가격이 떨어집니다.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지금까지 아무리 좋은 모델이라 할지라도, 그 모델은 구 모델이 됩니다. 그리고 가치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작품은 다릅니다. 작품은 상품들과 달리 세월이 갈수록 값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올라갑니다. 색깔이 바래고, 스크래치가 나도, 값이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고 영원히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지구상에 ‘나’라는 존재는 유일무이합니다.
일란성 쌍둥이라 할지라도, DNA(유전자 염기) 검사를 해보면 다르게 나옵니다. 우리는 대량생산 라인에서 찍어내는 자동차나 TV나 컴퓨터와 다릅니다. 그러한 것들은 상품이지만, 우리들은 작품입니다. 남이 나를 뭐라고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먹느냐, 무엇을 가지느냐, 무엇을 입느냐,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인정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의 가치를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의 학벌을 보고, 집안 배경을 보고, 직업을 보고, 살고 있는 집을 보면서 기가 죽어 사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예수님짜리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참으로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희생시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가치는 이 세상의 학벌이나 외모나 직업이나 소유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세상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의해서 결정된 것입니다. 즉 세상적으로 아무리 가치가 없다고 한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가치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나는 참으로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짜리답게 사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20절을 볼까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말씀을 KJV 영어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For ye are bought with a price: therefore glorify God in your body and in your spirit, which are God's.”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in your body" 와 "in your spirit"입니다. "in your body"는 ‘몸으로’라는 뜻이고, “in your spirit"는 ‘영혼으로’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우리의 영혼까지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몸을 방탕하며 쓰면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아무렇게나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시간을 써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러분,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학생은 출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진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직장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사업가는 돈 많이 벌어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에게 맡겨진 사업장을 충실하게 돌보아야 합니다. 가정주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녀를 돌보고 가사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외국 땅에서 사는 우리에게도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목적은 우리의 인생의 끝날 까지 변함없이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수님짜리의 귀한 인생이 더욱 가치를 발하고 찬란하게 빛이 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