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문에 너가 수치를 당하면 안 된다.

날짜: 
2025/08/02
말씀: 
시69:6
말씀구절: 

6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설교: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위선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질문에 예수님이 원론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재차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증서를 주어서 아내를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제가 이 대화를 들으면서 “과연 모세가 진짜 아내를 내어버리라는 말을 했는가?” 한번 확인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신명기 24:1에 모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아- 진짜 모세가 아내를 내어버리라는 말을 했긴 했습니다. 여기서 ‘수치 되는 일’이 무엇일까요? 문자적으로 보면 ‘수치 되는 일’은 ‘벌거벗은 일’ 또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 ‘수치 되는 일’에 대해 당시 바리새인들 중에 강경파인 ‘샤마이 학파’는 성적인 부정행위 정도의 아주 심각한 사유에만 한정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온건파인 ‘힐렐 학파’는 남편이 아내에 대해 싫증이 나거나, 아내가 음식을 태웠거나, 아내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거나, 아내보다 다른 여자가 더 마음에 들더라도 ‘수치 되는 일’로 간주하고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누구의 편을 들어줬을까요? “음행 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는 강경파 샤마이 학파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여성분들이 이렇게 아내를 버리느니 마느니 하는 대화를 들으면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지고, 화가 많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제가 이 대화를 반대 버전으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예수님,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남편을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모세는 남편에게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되거든 이혼증서를 주어서 남편을 내어버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때요? 여성 여러분, 이렇게 반대 버전으로 해석하니까 한결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까? 더 나아가 마음이 시원해지고 통쾌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성 입장에서 반대 버전으로 해석해주는 목사님의 설교가 오늘 유난히 은혜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하여튼 구약이나 신약이나, 남자든 여자든 간에 음행을 저지르는 것은 심히 수치 되는 일이요, 예수님도 인정하는 이혼의 사유에 해당됩니다. 더 나아가 구약에서 간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할 정도의 심각한 죄에 해당됩니다.(신22:22) 이 구약의 율법을 오늘날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돌에 맞아 죽을 사람 참 많을 겁니다. 어찌 보면 살아남을 사람이 극히 소수일지 모릅니다. (주여- 아시지요.)

다행히 예수님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돌에 맞아 죽을 여인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2) 여러분, 말세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하는 시대입니다. 이때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런 수치스런 일에 빠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짓자 갑자기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스스로를 가리려고 했습니다. 어디를 가리려고 했을까요? 1번, 창피해서 얼굴을 가리려고 했다. 2번, 성기를 가리려고 했다. 3번, 남성인 아담은 성기를 가리려고 했고, 하와는 여성이니까 가슴과 성기를 모두 가리려고 했다. 4번, 잘 모르겠다.

정답은 뭐지요? 성경을 자세히 보니까 그들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다고 하였으니(창3:7) 성기 쪽을 가린 것 같습니다. 왜 성기 쪽을 가렸을까요? 그게 어때서요? 한국의 공중목욕탕에 가면 다들 벗고 목욕하잖아요? 요즘은 한국도 여기 캐나다처럼 수영복 입고 목욕합니까? (한국에 안 간지 너무 오래 돼서 잘 모르겠는데, 최근에 한국에 공중목욕탕에 갔다 오신 분 있나요? 어때요? 거기 요즘? 요즘도 벗고 목욕하나요?)

암튼 아담과 하와가 성기 쪽을 가린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니, 하나님이 동물뿐 아니라 인간인 남녀에게도 각각 성기를 주셨는데 그게 뭐가 수치스런 일인가? 그게 수치스럽다면 그거 다 자르고 없애야 되는 건가?”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러면 왜 그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껴야만 했을까요?

하나님은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남여에게도 성기를 주셨습니다. 그 목적 중 하나는 그것을 사용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남자 아담과 한 여자 하와를 결혼시키시고, 즉 일부일처를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태초에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어떻게 되었나요? 그 성기를 결혼한 자신의 배우자에게만 사용해야 되는데, 그걸 다른 데도 사용하는 겁니다. 즉 간음을 저지르는 겁니다. 이게 구약에서는 돌에 맞아 죽을 일이고, 신약에서도 예수님도 인정하는 이혼의 사유가 되는 심히 수치스런 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그걸(거시기를)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데에 사용하면 범죄 뉴스에도 나오고, 수치스런 일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발각되어 세상에 알려지고, 지인들이나 가족들에게 알려지면 심히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되고, 이 세상에서 도저히 살 수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하는 겁니다. 즉 세상의 모든 죄가 다 수치스럽지만 성적인 죄는 더욱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본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고로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특히 성적인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8-20)

여러분, 성적인 죄를 짓는 것은 성령의 전 곧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요, 아주 심각한 죄입니다. 성적인 죄를 짓고 나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기도도 제대로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자꾸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사단은 이것을 잘 알고 있기에 크리스천들에게 어떡하든지 성적인 죄를 짓도록 유도합니다.

때로는 간음을 고귀한 사랑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합니다. 때로는 간음을 “그게 뭐가 어때서?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아- 내가 내 몸을 자유롭게 사용하는데, 그걸 속박하면 안 되지!” 하면서 간음을 수치로 보지 않고, 남들도 다 하는 오락이나 스포츠나 자유나 권리로 생각하게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 때에 그랬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말세지말인 지금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은 다윗의 일생일대의 실수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충실한 신하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른 겁니다. 다윗은 이로 인해 하나님께 큰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 자녀들까지 큰 고통을 함께 당해야만 했습니다. 다윗의 간음의 유전자가 자녀들에게도 연결이 되어 그들도 간음을 저지르고, 다윗의 살인의 유전자가 자녀들에게도 유전되어 그들도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시69:6)

다윗의 주위에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윗은 그들 중에 지도자요 우두머리입니다. 그런 다윗은 말과 행동에 있어 그들에게 책잡히지 말고 모범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지도력도 생겨나고, 그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신하의 아내를 취해서 간음을 저지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신하들 앞에서도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들 앞에서 왕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다윗에게 있어서 그건 너무나도 수치스런 일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과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 수치 함에 빠지게 하는 겁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지도자는 항상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나 하나의 행동이 그들 전체를 욕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만군의 주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로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로 나를 인하여 욕을 당케 마옵소서.”(시69:6)

어찌 보면 나의 죄로 인해 내가 수치를 당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정해놓은 죄의 삯이요, 죄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나의 죄로 인해 내 배우자나, 내 사랑하는 가족까지, 혹은 부모님에게조차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은 참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고로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속한 가족이나 교회나 회사나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에 속한 다른 분들을 위해서라도 수치스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책임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올바르게 살고 모범적으로 살려고 해도 인간성의 전적인 타락으로 인해 누구나 알게 모르게 수치스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가족들에게도, 공동체의 사람들에게도 수치함을 당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어떡합니까? 이미 수치스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엎질러진 물입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나름대로 변명도 해보고, 남의 탓을 하고 원망도 합니다. 때로는 도피적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좋은 행동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 솔직히 아뢰는 겁니다.

그리고 회개할 것은 철저히 회개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수치를 가려주시고 없애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수치를 가려보았지만,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날아가고, 햇볕을 오래 쬐면 그 나뭇잎이 말라서 떨어졌습니다.

결국 또 다시 그들의 수치가 드러났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긴 후 그들에게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고, 햇볕에도 시들지 않는 가죽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즉 어린양 예수님을 죽임으로 우리들의 수치를 가려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벌거벗기고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므로 그 대속의 은혜로 우리들의 수치가 가려지는 겁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의 수치를 가려주듯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들의 수치를 가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보면 ‘길갈’이란 지명이 있습니다.

이 지명의 뜻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급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길갈이라 하였더라.”(수5:9) ‘길갈’은 히브리어로 ‘굴리다. 제거하다’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들의 수치를 굴려서 제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의 여인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과거에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옳도다.”

어찌 보면 예수님이 이 여인의 과거 즉 다섯 번이나 이혼하고 지금은 혼외 관계를 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감추고 싶은 여인의 수치를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이 대화를 보고 듣는 사람들도 “아니 왜 예수님이 저런 말을 하시지?” 하고 심히 긴장이 되고 당혹스런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여인을 정죄하려고, 여인에게 고통을 주려고, 그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인을 회복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즉 수치를 무조건 덮기보다는 그 수치를 일으키는 자신의 죄와 허물을 정면으로 맞서서 용서를 받게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수치의 원인을 제거해주는 겁니다. 그 결과 여인은 변했습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 말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요4:29) 즉 자신의 수치를 더 이상 수치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간증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들도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우리들에게도 이 여인처럼 수치 되는 일들이 제법 있을 겁니다.

그 수치들을 생각하면 갑자기 마음이 안 좋아집니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나기도 하고, 때로는 이런 수치스러운 것들이 트라우마로 작용해 날카로운 비명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때로는 욕이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아직까지 치료되지 않은 수치에 대한 상처 때문입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는 종종 그 옛날의 수치스런 일들을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어 용서를 받고, 그 수치를 제거해야 합니다. ‘길갈’해야 합니다. 즉 산 위에서 돌멩이를 굴리듯이 그 수치를 없애버려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그 옛날 믿음의 사람들도 모두 크고 작은 수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치를 하나님께 솔직히 아뢸 때, 하나님은 그들의 수치를 일으키는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수치로 인해 괴로워하는 사람을 떳떳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각자 수치스런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 수치를 제거해주시고 가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보다 떳떳하고 담대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당신이 사람들에게 떳떳이 나아가 예수님도 담대히 전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이 당신의 수치를 제거해 주시고, 당신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수치를 당하는 일들이 없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수치들을 가려주시옵소서. 도리어 그 수치가 간증의 제목이 되게 하시옵소서. 아내로 인해 남편이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시고, 남편으로 인해 아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더 나아가 나로 인해 그들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