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원망하니? 나는 그래도 찬송한다!

날짜: 
2007/03/11
설교: 

행16:19-32 너는 원망하니? 나는 그래도 찬송한다!

말씀을 나누기 전에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세계 역사를 잘 아시는 분들은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제까지 누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을까요? 첫째 히틀러, 둘째 나폴레옹, 셋째 알렉산더 대왕, 넷째 칭기즈칸?”
이에 대한 답은 칭기즈칸입니다. 칭기즈 칸이 정복한 땅은 남한의 35배 이상이 되는 777만 평방킬로미터에 이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한 땅은 348만 평방킬로미터요, 나폴레옹이 정복한 땅은 115만 평방킬로미터요, 히틀러가 정복한 219만 평방킬로미터입니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정복한 땅은 이 세 사람이 정복한 땅을 모두 다 합친 것보다 더 넓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칭기즈칸 제국이 12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반까지 무려 150년이나 지속되었다는 점입니다. 조그만 몽골이라는 나라가 100-200배나 큰 나라들을 오랜 시간 동안 지배했던 것입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지난 1,000년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 칸을 뽑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호전적이고 잔혹한 인간으로 묘사했지만, <워싱턴 포스트>지는 광대한 지구를 좁게 만들어 사람들이 대륙을 넘어 서로 왕래할 수 있도록 만든 최초의 Global 시대를 만든 장본인으로 칭기즈칸을 뽑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가 이처럼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되었을까요?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이다>라는 글에 수록된 그의 고백을 보면, 그가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고백은 이렇습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내 나라의 백성은 어린애와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다. 나는 내개 거추장스러운 것은 모두 없애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여러분, 자고로 위인들의 공통점은 역경 속에서도 처해진 환경을 탓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고난을 물려준 조상이나, 가난한 부모님이나, 이웃이나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원망하지 않았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람들은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란 사람은 14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도 삼촌 라반에게 사기 당하여 빈털터리가 되었으면서도 삼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기를 미워하고 왕따 시키고 나중에는 자기를 인신매매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어린소년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자기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사람 다니엘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비관하거나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선교 동역자인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엄청난 죄악을 지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1차 선교여행 때 복음을 전한 소아시아 지역을 다시 둘러보기 위해 2차 선교여행에 나섰다가,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지방의 첫 도시인 빌립보 지역에서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려 점을 치는 여종 하나가 여러 날을 쫓아다니면서 그들을 귀찮게 했습니다. 참다못한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16:18)고 명하자, 귀신이 즉시로 떠나면서 여종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여종의 건강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비즈니스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자기의 여종이 귀신이 들려 점을 잘 쳤기 때문에 돈벌이가 잘 되었는데, 그 여종이 깨끗하게 낫게 되어 더 이상 점집 비즈니스를 할 수 없게 되자 바울 일행을 로마 관가에 고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빌립보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법을 어기고 감옥에 들어갔다면 억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감옥에 들어갔다면 정말 억울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종의 주인이 사도바울 일행을 무슨 죄목을 가지고 로마 관가에 고소했습니까? 20절과 21절에 보면,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고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역을 다니면서 성을 요란케 했습니까? 잘못된 풍속을 전했습니까? 아닙니다. 성을 요란케 하기는커녕 오히려 귀신들린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새 생명을 갖도록 해주었습니다. 로마 관가에서는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을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 일행은 감옥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누가 그들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오게 했습니까?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여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너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일행이 마케도니아로 건너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행을 목적으로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까? 아니면 친척 방문을 목적으로 건너왔습니까? 그들은 복음 증거를 목적으로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을 포기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열심히 복음을 증거 했는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입니까? 칭찬이 아니라 고발이었습니다. 푸짐한 상품이 아니라 어두컴컴한 감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도 분하고 억울한데, 재판을 받기도 전에 옷을 찢기고 매를 맞았습니다. 죄를 지으면 재판을 받아야 하고 재판 결과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일행은 달랐습니다.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많은 매를 맞아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당시에는 40대 이상의 매를 맞으면 죽는다고 생각해서, 40대를 치지 못하도록 법률로 정했기 때문에, 추측컨대 사도바울은 39대의 매를 맞았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4절에 보면, 바울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했는데, 빌립보 감옥에서도 39대를 맞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옷이 찢겨지고 매를 맞은 후,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갇힌 감옥은 햇볕을 쬐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일반죄수들을 가두는 보통 감옥이 아니라, 햇빛도 들어오지 않고 신선한 공기도 들이마실 수 없는 깊은 감옥이었습니다.
또한 그 감옥에서조차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양발에는 꼼짝하지 못하도록 착고가 채워져 벽에 고정시켜 놓았기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발목을 파고드는 착고 때문에 고통이 심했습니다. 사도바울과 실라는 복음 전파는커녕, 감옥에 갇혀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서도 사도 바울이 ‘로마 관리들에게 불평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하나님을 원망했다‘라는 내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분히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불행했던 한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술독에 빠져서 살았고, 그의 가정은 굉장히 가난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이 어린 11살 때부터 극장 오케스트라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가 17살이 되었을 때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 동생을 부양해야만 했고, 30살이 되었을 때는 작곡가의 생명인 귀에 이상이 오면서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굴하지 않고 작곡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결국 그 유명한 교향곡 제9번을 작곡하여 발표를 마쳤을 때, 장내는 떠나갈 듯한 박수갈채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귀가 먹어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옆에 있는 사람이 그를 돌려서 장내를 향하여 고마움을 표시할 것을 알려준 후에야 비로소 그는 그가 만든 곡이 훌륭한 곡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천재 작곡가이면서, 인생의 불운한 조건들을 가진 음악가 베토벤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앞에 장애물이 있습니까? 처한 환경만을 탓하고 있습니까? 주위 사람이 원망스럽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앞길을 막는 장애물은 환경이나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자고로 성경의 위인들은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옷이 찢겨지고 매를 맞고 착고에 매인 채로 깊은 감옥에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때린 사람도, 그를 고발한 사람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남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람들은 원망대신에 찬양을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이국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실컷 매를 맞아 몸은 쑤시고 발에는 착고가 채워져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23절부터 25절을 보겠습니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여기 보면 ‘밤중쯤’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과 실라가 맞이한 밤은 호텔 방에서 누워있는 편안한 밤이 아니라, 괴로운 밤이었습니다. 맞은 상처로 인해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의 밤이었습니다. 깊은 감옥에서 아무런 소망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했습니까?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을 했습니다. 신음소리가 먼저 흘려 나올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입에서는 신음대신에 찬송의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어찌 보면 바울과 실라는 마케도니아로 건너온 것을 후회할 수도 있었고, 전도여행을 떠난 것을 후회할 수도 있었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것을 후회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입에서 먼저 튀어나온 소리는 후회의 소리가 아닌 찬송소리였습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바울과 실라처럼 지금 고통의 밤을 통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이 때가 찬송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잊지 마십시오.
3. 찬양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있던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께 찬양을 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지진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 결과 옥문이 열리고, 자신들의 착고까지 풀리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깊은 감옥에 갇혀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던 바울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찬양에는 문제의 착고를 푸는 능력이
있습니다. 찬양에는 절망의 옥문을 여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찬양에는 자유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자, 그에게 악신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악신, 곧 귀신은 사울에게 들어가자마자 사울 왕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그로 하여금 수금이라고 불리 우는 Harp를 을 타게 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바로 이것이 찬양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 악신을 쫓아내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찬양을 할 때 여호와의 신,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찬양을 통해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찬양에는 승리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 시대에 모압과 암몬과 마온 연합군이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여호사밧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은 온 백성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양하도록 하였는데, 그 찬양을 통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역대하 20장 22절과 2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올라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들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육하였더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기뻐하시며 찬양 가운데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찬양은 마귀를 무찌르고 승리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스스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환경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시편 기자처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11)하면서 오히려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여러분, 당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살지라도 “너는 원망하니? 나는 그래도 찬송한다!”라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