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날짜: 
2007/09/01
설교: 

욘4:1-11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얼마 전 칸 영화제에서 한국의 ‘전도연’씨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 하는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주인공인 여인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와서 조그만 피아노 학원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 아들은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주인공 여인이 동네 아줌마들과 밤중까지 노래방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들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데리고 있으니 거액의 돈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범인의 요구를 충족할 많은 돈은 없었지만 주인공 여인은 자신의 가진 돈 전부를 범인이 원하는 장소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녀의 아들은 웅변학원에 다니는 선생님에 의해 살해되어 한적한 곳에 시신이 유기되었습니다. 주인공 여인은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어 슬픔과 고통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때 한 여자 집사님으로부터 전도를 받습니다. 주인공 여인은 개척교회에서 열리는 부흥회에 참석하여 통곡을 하며 성령의 은혜를 받고 크리스천으로 변화된 삶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찬양팀과 함께 노방전도도 다니며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제 슬픔을 잊고 범인을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범인이 있는 교도소에 꽃을 들고 면회를 갔습니다. “당신을 이제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그를 전도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인의 얼굴의 모습이 너무도 좋아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범인이 말을 합니다. “저도 이곳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제 저에게도 평안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 말을 들은 주인공 여인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용서한다고 채 말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벌써 그 범인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그 범인에게 이미 구원도 주시고, 평안도 주시고, 교도소에서도 얼마나 잘 먹고 지내는지 얼굴 빛깔도 아주 좋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녀는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면회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리고 땅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부터 그녀는 하나님을 향하여 반항심이 생기게 됩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와서 기도를 하는 중에도 소리를 지르며 기도 받기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야외 부흥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중에 방송실에 들어가 훔친 노래 시디를 몰래 집어넣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그리고 자신을 전도한 여집사님의 남편인 장로님을 성적으로 유혹합니다. 그리고 여러 성도님들과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장로님의 집에다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을 깨트립니다. 또한 노골적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을 향해 반말을 하며 계속하여 하나님을 후욕합니다. 주인공 여인의 이러한 비신앙적인 모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조금씩 수그러집니다. 그러나 때로는 또 다시 분노가 폭발하기도 합니다. 이런 고통을 겪는 한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내가 바로 저 여주인공과 같은 심정이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처럼 많은 상처를 당하게 됩니다.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나서 나름대로 아들과 더불어 밀양이라는 동네에 내려와 굳세게 살아보려고 했지만, 또 다시 아들이 유괴를 당하여 죽는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겪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신앙으로 그 슬픔을 극복하며 올바른 크리스천이 되려고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용서해주려고 하는 유괴범의 얼굴을 대하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하나님을 향하여 발산이 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그 원수를 이다지도 빨리 용서하는 것입니까? 나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 유괴범에게 평안을 주시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녀의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불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는 있지만, 그런 하나님은 안믿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 영화 속의 주인공과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리저리 상처 입은 우리의 인생도 이곳 캐나다 땅에 와서 하나님을 믿고 바르게 살아보려고 해보지만 또 다시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큰 상처를 당합니다. 그러나 그 큰 상처도 이제는 믿음으로 극복하고, 나에게 큰 상처를 안겨준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원수를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용서하시고, 나보다 더 많이 그 원수를 축복해주시고 있는 것을 볼 때 갑자기 열이 받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 이래도 되는 거예요? 저 원수의 목전에서 나에게 상급을 베풀어 주어야 되는데, 저 사람이랑 나랑 똑같이 취급하면 어떡하라는 거예요? 아니, 그건 그래도 괜찮은데, 저 원수를 나보다 더 많이 축복하시면 나는 분통 터져서 어떻게 살라는 거예요?” 정말 이러기예요? 나 확 죽어버릴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요나라는 선지자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따지듯이 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본문을 같이 보시지요. 1절입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그 다음 구절은 제가 여러분들이 알기 쉽게 감정을 넣어 각색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정말 잘났어요. 참 은혜로우시고, 참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어찌나 더디 하시는지 거북이나 굼벵이 같습니다. 그리고 참 인애가 크시더군요. 또한 극악무도한 자 앗수르 사람들에게도 재앙을 하나도 내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구원을 베푸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잘 났어요. 정말! 훌륭해요. 정말!”
이렇게 말하고는 돌멩이를 집어서 획 집어던지면 영락없이 영화 ‘밀양’에 나오는 여주인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원수의 목전에서 내가 상급을 받기도 전에, 하나님이 나에게 그토록 고통을 준 그 원수를 내가 보는 앞에서 크게 축복해주시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을 나에게 적응시켜 보면 충분히 영화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의 동맥을 스스로 칼로 그어 자살을 시도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보면 요나 선지자도 그런 마음입니다. 3절에 요나 선지자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이 말을 좀더 리얼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러기요. 차라리 나 죽여! 죽여! 죽이란 말이야?”
이렇게 요나 선지자가 열을 받고 하나님을 향하여 따지며 덤비자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요나야,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요즘 말로 하면 “너 왜 그렇게 열을 받고 있냐?”라는 뜻입니다. 그 뒤로 성경이 요나의 대꾸를 즉시 기록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9절에 보면 요나가 이와 똑같은 대꾸를 했을 것입니다. 다 함께 9절에 보시지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덩굴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그 후에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을 합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덩굴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10-11)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나에게 그토록 고통을 안겨준 사람, 그 사람이 나에게는 원수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원수가 아니라 오히려 죄악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불쌍한 한 인간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은 나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지만, 내가 원수로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나에게 더 많은 자비를 먼저 베푸시고, 원수에게는 나보다 덜 자비를 베푸시고, 그것도 나에게 모든 자비를 베푸시고 난 후에 찌꺼기를 가지고 자비를 베푸셔야 나의 마음이 좋은데, 오히려 그 원수를 나보다 더 먼저 사랑하시고, 더 먼저 축복하시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도심에서 큰 교통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크게 다쳤습니다. 가까운 병원 응급실에 응급 환자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담당 의사가 황급히 환자들을 살펴보고 있는데 낮이 익은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의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자기 아들은 교통사고로 인하여 얼굴에 피는 흘리고 있었지만 가벼운 찰과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같은 교통사고로 인하여 또 다른 남성 환자가 들어왔습니다. 그 환자는 인상이 험상궂게 생겼습니다. 언뜻 보아도 깡패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급히 손을 쓰지 않으면 곧 죽을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의사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치료해주는 것을 뒤로 하고, 돌이켜 깡패를 먼저 치료해 줍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어린 아이는 의사인 아버지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아픈데 왜 나를 먼저 치료해주지 않고 저 깡패를 먼저 치료해주는 거야?”
이때 어린 아이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면 아버지를 향하여 삐지기 쉽고, 화나기 쉽습니다. “저 의사 진짜 내 아버지 맞아?” 하고 아버지를 의심하기 쉽습니다. 여러분, 혹시 나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사람을 하나님이 먼저 치료해 주었다고, 먼저 사랑해 주었다고, 먼저 축복해 주었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삐지지는 않았습니까? ‘밀양’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본문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처럼 열을 받지는 않았습니까?
그렇게 열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이 그 원수 같은 사람을 더 빨리 치료해 주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거나, 나를 그 원수보다 덜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은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나 선지자도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속 좁은 인간은 남의 자식보다 내 자식을 먼저 사랑하고, 남의 자식보다 내 자식을 먼저 아끼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님을 원수 같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놓으셨습니다. 보통 사람으로는 잘 이해가 안되는 너무나도 기가 막힌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 예수님도 아버지를 향하여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처절한 고통을 맛보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마음에는 이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는 것일까?” 이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래,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는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내가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그래, 내가 아버지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서 죽어야지!” 할렐루야!

“십자가에 달리신 고난의 주 봅니다.
어둔 그늘 덮여도 우리 위해 참으신
그 당하신 고통을 어느 누가 알리요.

아버지여 어찌해 날 버리시나이까?
하늘 향해 외치고 돌아가신 구주는
하나님의 외아들 대속하신 주로다.“(찬143장 1, 3절)

여러분,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겪은 아들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우리 하나님도 똑같이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인 우리가 잘 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십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한량없이 넓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원수가 잘 되면 화가 납니다. 분통이 터집니다.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오늘 하나님이 본문에 묻습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여러분, 세상에 살면서 나를 괴롭힌 원수가 나보다 더 잘 살 때가 있습니다. 그 원수 같은 사람이 나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뒤집힙니다. 그 원수가 예수님 믿고 천국가면, 나는 차라리 예수님 믿지 않고 지옥이나 간다고 할 정도로 열이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열을 받고 분이 끓어오르고 있다면 당신도 역시 ‘밀양’의 주인공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나와 같습니다. 이렇게 화가 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넓으신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화병으로 죽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이 질문을 들으면서 분노를 식히시고, 하나님의 넓은 마음을 헤아리는 시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