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전2:19-20 누가 아름다운가?
옛날 어느 마을에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얼굴이 못 생겼더랍니다. 소년은 아름다운 여인을 찾아보려고 집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소년이 집을 떠나려 하자 어머니는 아들을 말렸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못 떠나게 하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소년은 길을 떠났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헤매어도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여인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눈이 예쁘다 싶으면 코가 이상했고 코가 예쁘다 싶으면 입이 미웠습니다. 소년은 몸이 쇠약해졌습니다. 얼마간 가지고 떠난 노자가 떨어지자 먹지도 못하고 잠을 잘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친 몸을 쉬려고 길가 풀숲에 몸을 누이자 깜빡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할아버지가 나타났습니다. 소년은 그가 도사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얘야, 그래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인을 찾았는고?˝ 그 목소리는 너무도 낭랑하고 엄숙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아직 못 찾았습니다. 도사님!˝
˝그렇게도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싶으냐?˝ ˝예, 도사님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천하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가르쳐 줄 테니 그 여자를 만나 보겠느냐?˝ ˝예. 도사님. 소원입니다.˝ ˝신발을 거꾸로 신은 여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니라.˝
이 말을 남기고 도사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소년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도사가 가르쳐 준대로 신발을 거꾸로 신은 여인을 찾으러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신발을 거꾸로 신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소년은 쇠약한 몸을 이끌고 온 세상을 헤매며 다녔기 때문에 옷은 다 헤져 살이 나오고 신발은 다 헐어서 발바닥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너무 오래 못 먹어서 뼈만 앙상하게 남았습니다. 거기다 병까지
들어 너무나도 참혹한 몰골이 되었습니다. 이제 곧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소년은 도사에게 속은 것을 한탄하며 죽기 전에 어머니나 한번 만나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집 앞에 다다르자 소년은 슬픔이 사무쳤습니다. 어머니 말을 안 듣고 집을 나가 지난 긴 세월을 허비한 것이 원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년은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어머니! 제가 왔어요.˝
아들의 목소리를 듣자 어머니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방에서 황급히 뛰어나와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 자기가 싫다고 집을 나간 아들이지만 얼마나 걱정을 했고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들인데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 내 아들아 돌아와 주어서 고맙다.˝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소년은 어머니 발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신발을 거꾸로 신은 사람을 찾느라고 사람을 볼 때마다 발을 내려다보는 습관이 붙어서였습니다. 순간 소년은 너무도 놀랐습니다. 자기 어머니가 신발을 거꾸로 신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들의 목소리가 너무 반가워 마루 밑에 벗어 놓은 신발을 거꾸로 신었던 것입니다. 소년은 그제야 도사의 말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라는 것을 알고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적인 변화로 인해 달라진 모습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은 세상의 부패하고 썩은 아름다움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것은 사람을 감화시키고 감동을 주는 아름다움입니다. 즉 속 사람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영적 아름다움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속사람을 아름답게 꾸며서 영적으로 아름답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성경은 이런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선을 행하고 고난을 참으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착한 일, 선한 일, 바른 일을 하지만 그 결과는 칭찬이 아니라 원망과 비난을 듣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바로 이럴 때 마음이 더욱 아픕니다. 고통이 따릅니다. 섭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 원한을 품지 않고 잘 참고 인내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19-20)
성경에 보면 애매히 고난을 당하면서도 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아들보다 요셉을 매우 사랑하였습니다. 그러자 배 다른 형들이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형들은 요셉을 은 20냥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 팔려가 노예로 충성을 다했으나 주인 마나님이 요셉이 자기와 동침하지 않는다고 요셉을 강간범으로 몰았습니다. 그 결과 요셉은 이국땅에서 징역살이를 수년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고생되고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자기를 팔은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운 보디발 장군의 아내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자 자기를 억울하게 누명을 씌어 감옥살이를 시킨 보디발 장군의 아내나, 자기를 인신매매한 형들에게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애매히 고난을 당할 때 참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말씀합니다.
금붕어와 열대어인 엔젤피시가 한 어항 속에서 살았습니다. 엔젤피시는 빳빳한 지느러미를 뽐내며 어항 속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아름답지 못한 금붕어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난 이래봬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마존 강에서 태어났어. 거기가 우리 고향이란 말이야. 난 이런 초라한 어항 속에서 너와 함께 살 처지가 아니야."
그런데 어느덧 여름이 지나가고 날씨가 매우 쌀쌀해졌습니다. 엔젤피시는 추워서 몸을 웅크렸습니다. 그렇지만 금붕어는 아무렇지 않게 어항 속을 헤엄쳐 다녔습니다. 아주 건강하게 보였습니다. 그러자 엔젤피시가 금붕어에게 힘없이 말했습니다. "금붕어야, 사실 나는 겉모양만 아름답지 나는 너보다 약해! 나는 네가 추위와 어려움을 잘 참고 견디는 것이 부러워!“
여러분, 요즈음 ‘건강미인’이란 말을 자주합니다. 아무리 겉모습이 아름다워 보여도 건강하지 않으면 진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역경과 고난을 잘 참고 견디는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을 하나님은 아름답게 보십니다. 반면 조그만 고난에도 견디지 못하고, 자주 시험에 들고, 참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아름답지 않습니다.
눈부시게 찬란한 왕궁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있습니다. 둥근 천장과 벽과 기둥이 마치 다이아몬드를 박아놓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잘게 부서진 유리조각들로 뒤덮여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왕궁이 처음 설계되었을 때 건축가들은 문에 입힐 거울을 외국에서 수입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거울이 도착하여 포장을 푼 사람들은 낙담하고 모두가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그 거울을 운반하는 도중에 그만 산산조각이 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워하며 깨진 유리조각들을 쓸어버리려 할 때 한 관계자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어쩌면 깨져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그의 의견에 따라 깨진 유리조각으로 추상적인 무늬를 만들어 벽에 붙였습니다. 빛이 여러 방향으로 반사돼 뜻밖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아름다운 왕궁이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 살아가노라면 산산 조각난 유리처럼 우리의 마음이 깨지고 상처 입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부정적으로 내 마음에 자리 잡기 전에 “깨짐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감사하는 모습이 당신에게 있다면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2. 형제를 화목케 하면 아름답습니다.
주일날 어느 교회에 안수집사님 한 분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집사님으로부터 그 안수집사님이 낚시를 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화가 난 표정으로 “다리나 똑 부러져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하고 난 후 목사님은 금방 후회했습니다. 옆에 있던 집사님은 안수집사님의 친구였고, 안수집사님의 성격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월요일 저녁 낚시를 갔던 그 안수집사님이 목사님 사택으로 찾아오겠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잔뜩 긴장을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안수집사님의 손에는 과일이 한 아름 들려져 있었고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제가 어제 주일 교회를 나오지 않았는데도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옷이나 두툼하게 입고 낚시 갔느냐고 걱정해 주셨다면서요? 다음부터는 꼭 주일을 지키겠습니다. 목사님,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은 그 안수집사님의 친구인 집사님이 자기의 말을 그대로 옮기거나 더 나쁘게 옮기지 않고 오히려 지혜롭게 말해준 것이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그 집사님을 너무도 귀하게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합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15:23)
만약 그 집사님이 목사님의 감정 섞인 말을 그대로 친구 안수집사님에게 옮기면 결국 목사님과 안수집사님을 싸움붙이고 이간시키는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 됩니다. 다시 말해 화목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14:21)
3. 여호와를 경외하면 아름답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애굽왕 바로가 그들을 굉장히 두려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군사력을 상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남자의 수가 굉장히 불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산파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살게 두라”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왕 바로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를 살려주었습니다. 아무리 왕의 명령이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도 산파들은 인간의 생명을 죽이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천벌을 내릴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하게 하신지라.”(출1:21) 그리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31:30)
이스라엘 아합왕 때에 오바댜라는 궁내대신은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 당시 악한 왕 아합의 신하로서 여호와를 잘 섬기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이권과 실익을 찾아 우상숭배자 왕비 이세벨을 따라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겼지만 오바댜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한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오바댜는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도왔습니다. 그는 아합왕과 욍비 이세벨이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때에도 여호와의 선지자 100명을 몰래 숨겨주고 먹을 것까지 제공했습니다. 오바댜의 이런 행동은 모든 권력을 포기할 각오는 물론 죽음까지도 각오한 행동이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행동한 것은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 말씀은 온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람이나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면 불의 앞에 약해지고 맙니다. 추해지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올바른 용기가 생깁니다. 정의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고로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도는 신랑 되신 예수님께 사랑을 받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를 아름답게 단장하는 영적 미장원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들은 외모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름답게 꾸며야 합니다. 선을 행하고 나서 고난을 받더라도 참으므로 그 아름다움을 지켜야 합니다. 형제를 화목케 하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발해야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잘 단장하므로 신랑 되신 예수님께 사랑 받는 복된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아름다운가?
날짜:
200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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