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8:11-18 다 너를 낮추시며
애굽에서 430년 간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서 잘먹고 잘입고 잘살게만 만드는 것일까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 하나님의 명령, 법도, 규례를 지키며 하나님 안에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 캐나다로 이끌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회 보장이 잘되어 있는 이곳에서 애들 교육 잘시키고, 잘 먹고 잘살게만 만들려고 우리를 이곳으로 이민 오게 하셨을까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하나님을 보다 더 잘 믿고 살라고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우리가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에 거하고, 우양이 번성하며, 은금이 증식되고,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면 우리는 대개 이렇게 대답합니다. "에이, 하나님, 나는 안 그래요. 나에게 한번 축복을 줘 보시라니까요?"
그러나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틀리다고, 또한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축복을 받기 전의 마음과 축복을 받은 후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나서 우리가 교만해질 수 있다고 본문은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잘못된 길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교만해지지도 않고 축복을 주는 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 일단 우리를 낮추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낮추시는 과정을 위해 하나님은 광야를 사용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단숨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일단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곳 캐나다에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전에 일단 광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들의 심정에는 "물 설고 낯 설고 언어와 법률과 문화가 설은 이곳 캐나다까지 왔는데 이곳에서까지 와서 고생하면 되겠는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더구나 캐나다는 그래도 괜찮은 나라라고 생각을 하기에 이곳을 광야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마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곳 캐나다라는 땅을 하나님은 광야로도 사용하시기도 하고, 또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도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만을 막기 위해 하나님은 이 땅을 먼저 광야로 사용하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었던 광야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
본문에 보니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라는 것입니다. 즉 가도가도 한도 없고 끝도 없이 펼쳐지는 험악한 고생길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위험이 굉장히 많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물이 없다면 씻지도 못합니다. 결국 얼굴은 꾀쬐쬐해지고, 머리에서는 냄새가 나고, 입에서도 냄새가 나며, 온몸에서도 냄새가 납니다.
그것은 둘째치고 마실 물도 제대로 없어 목이 타 들어가니 죽을 지경 아닙니까? 그리고 물도 없는데 먹을 음식은 제대로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독사와 전갈이 우글거리지요, 밤에는 추위와 낮에는 더위가 사람을 미치게 하지요, 인간의 문명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것이 아닙니까? 고생도 이런 고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이, 여기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하고 불평을 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어쩌면 우리들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에이, 여기 캐나다보다는 한국이 훨씬 더 나은데! 괜히 당신이 이민오자고 하더니만! 그렇다고 한국으로 다시 역이민을 가자니 그것도 만만치 않고, 이래도 짜증나고, 저래도 짜증나고, 집에서도 짜증나고, 학교에서도 짜증나고, 교회까지 와서도 짜증나고 에이, 짜증나!"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결코 기분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짜증나는 곳이었고,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고, 미래에 대해 불안하게 하고, 무서움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광야에서 어떻게 살란 말인가? 에이, 한국으로 돌아가자!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또 다시 이삿짐 싸야 되고, 배 값, 비행기 값 들어야 되고, 그리고 또 다시 거할 처소를 구해야 되고, 직업이나 사업도 다시 잡아야 되고, 그건 그렇더라도 애들 교육은 또 어떻게 되는 거야? 아-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치겠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정이 바로 그렇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광야에서는 살 엄두가 안나고,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즉시 인도하시지 않고 광야로 이끌어내어 이렇게 골탕을 먹이시는 것입니까?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실 때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의 바로 왕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홍해도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그런 것을 종합해보면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복을 주시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쉽게 축복을 주시지 아니했습니다. 오히려 고생의 광야 길을 터벅터벅 걷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배고픔에 주리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적들과 전쟁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인간의 수명이 그리 길지도 않은데 왜 빨리 축복은 주지 않고 이 낮선 광야에서 고생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힘만 의지해서는 살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훈련을 하기에는 광야가 가장 적합한 장소입니다. 광야에는 마실 물도 없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했습니다. 먹을 양식도 없으니 역시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고, 전쟁에서이길 힘도 없으니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니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이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은 반석에서 생수가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의 갈한 목을 축여주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갈 길을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을 띄우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을 띄우셔서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던 40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르트지 아니 하였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돌보시고 책임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운 아주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수가 없구나!" 하는 것입니다.
즉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광야의 교훈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낮추시는 훈련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라고 하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훈련의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이러한 과정이 없이 그냥 복을 주면 그 사람은 버릇이 없어지고
맙니다. 안하무인격의 교만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 부모가 자녀를 훈련시키지 않고 그냥 해달라고 하는 것 다해주면 나중에 그 자녀를 망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고로 하나님은 마침내 복을 주시기 전에 우리에게 먼저 낮추시는 과정을 밟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이 이곳 캐나다 땅에서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철저히 낮아지게 하고, 철저히 겸손해지게 하고,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광야의 훈련 과정 말입니다. 물론 그 과정이 때로는 힘들고 괴롭기도 합니다. 갑갑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광야의 훈련, 낮추시는 훈련에는 큰 유익이 있습니다. 보다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고, 보다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양으로 다듬어지게 하고, 보다 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고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것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도록 들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의 교만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돈이 떨어지고 사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사게 하신 것도 감사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허무를 느끼게 하고, 때로는 몸이 늙고, 아프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부정이 득세하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제게 잘못하고 저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잠 못 이루고 뒤척이게 하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병들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곳 캐나다에서도 심히 곤고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컬컬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문득
광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하심이었느니라."
예레미야 애가 3:33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즉 우리가 이곳 외국 땅에서 고생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주시기가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왜 하나님이 의미 없이 광야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겠습니까? 다시 말해 오늘의 광야는 마침내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아름답게 가꾸고 있는 축복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도 쓰시기 위해 먼저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이스라엘 12지파를 탄생시킨 야곱도, 인물이 잘난 요셉도,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는 욥도, 위대한 사도 바울도 광야의 과정을 거치게 만드셨습니다. 그 광야는 다름 아닌 다 너를 낮추시는 훈련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겸손을 통하여 마침내 온전한 지식, 온전한 능력, 온전한 사랑, 온전한 축복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모세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애굽의 왕자로 자라났습니다. 인물이 그 누구보다도 출중했습니다. 더구나 40년 간 애굽의 모든 학문을 다 배웠고 무술을 닦은 사람입니다. 그 당시 애굽에는 모세보다 더 잘난 사람이 없었고, 모세보다 더 배운 사람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모세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40년 간 애굽에서 귀족 교육, 왕족 교육을 받았지만, 광야의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교육은 다름 아닌 낮추시는 훈련입니다. 겸손케하는 훈련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는 훈련입니다. 모세는 40년 간 처가살이를 하며 기약 없이 40년이란 세월을 양치기로 보냈습니다. 그
결과 애굽에서 배웠던 최신 학문도 모두 쓸모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잘난 인물도 80세 노인이 되었으니 누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닦았던 무예 솜씨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찌 보면 광야는 모세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린 저주의 장소였습니다.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그 광야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주 귀중한 교훈을 배우게 했습니다. 이 교훈은 모세가 40년 간 애굽에서 배운 것보다 더욱 귀한 교훈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철저히 낮아짐을 통한 겸손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40년 간 광야에서 겸손을 배우게 되자 드디어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능력을 입히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만약 모세에게 낮추시는 훈련 즉 광야의 훈련이 없었다면 모세는 결코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광야는 모세를 지도자로 만들어 낸 일등 공신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귀족교육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낮아지고 겸손해지니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광야가 우리 앞에도 놓여져 있습니다. 이곳 캐나다 땅은 우리를 겸손케 할 수 있는 광야입니다. 우리는 이곳 캐나다 땅에서 얼마든지 낮아질 수 있습니다. 높아지기보다는 비천해질 수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받기보다는 얼마든지 대접할 수 있습니다. 고로 이 광야 외국 땅에서 이러한 과정을 밟고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비록 인간적인 성공이나 명예나 재물이 내 손에 없을지라도 낮추시는 훈련을 통하여 겸손을 배울 수만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오늘도 다듬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크나 큰 성공이요, 그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교훈을 배울 수 없었는데 이곳 캐나다에 와서 이런 귀중한 겸손을 배울 수 있다니 그것은 귀중한 특권입니다.
비록 한국에서처럼 세상적인 성공과 명예와 재물을 얻지 못해도 이러한 겸손을 이곳 캐나다 땅에서 조금이라도 더 배우며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영원한 명예, 영원한 성공, 영원한 축복에 동참하도록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세상적인 것을 많이 가졌다 할지라도 이것들로 인해 마음이 교만해졌다면,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천국에 올라간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실까요?
우리는 교만하고 배부른 돼지보다는 차라리 배고프지만 겸손한 인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으스대고 잘난척하는 부자보다는 차라리 못나고 덜 가졌지만 겸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의 헛된 자랑에 취하여 우쭐대며 교만하게 오래 사는 것보다 차라리 겸손을 배우며 주님처럼 짧게 사는 것을 소원합니다. 그러한 겸손을 광야에서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호화로운 궁궐보다는 차라리 광야를 택하기를 소원합니다. 남보다 높아지면서 교만에 빠지는 것보다 우리는 차라리 낮아지며 겸손을 배우기를 소원합니다.
이 지구라는 광야 속에서, 캐나다라는 광야 속에서 우리를 살게 하시고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우리가 비록 이곳에서 죽어 한줌의 흙이 되어 썩더라도 우리의 영혼이 겸손한 모습으로 하늘나라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천국의 복을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곳의 삶에 만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는 소원은 영원한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다 너를 낮추시며
날짜:
200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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