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3:1-5
성경에 나오는 한 인물인 바사왕 고레스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그는 인품이 훌륭한 왕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적들을 가혹하게 다루지 않고 유화정책을 펼쳐서 늘 적들을 포용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칙령을 반포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국으로 귀향시키도록 조치를 취했습니다.
한 번은 그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이웃나라를 정복했습니다. 그 나라의 왕과 왕비와 그들의 자녀들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그들을 심문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들을 죽이기가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적국의 왕을 향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만일 그대를 살려준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적국의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를 살려주시면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절반을 왕에게 바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또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가 그대의 자녀들을 다 풀어준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자 적국의 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제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왕에게 바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만일 내가 그대의 왕비를 살려준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자 적국의 왕은 스스럼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제 목숨을 기꺼이 왕에게 바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고레스 왕은 매우 감동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목숨까지라도 바치겠다는 적국의 왕의 말이 그를 감동케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레스 왕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명을 내렸습니다. "여봐라! 이 사람들을 다 풀어주어라. 죽이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사람들이다."그렇게 해서 적국의 왕과 왕비 자녀들은 모두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풀려난 왕은 왕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연 듣던 대로 바사왕 고레스는 훌륭한 왕임에 틀림이 없소. 그는 분명히 전 세계를 제패할 것이오. 내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까 인물도 그렇게 출중할 수가 없소.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그러자 뜻밖에도 왕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전혀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까지라도 아끼지 않고 바치겠다고 하는 한 믿음직한 남자의 얼굴을 황홀하게 쳐다보느라고 그 외에 다른 곳에는 전연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뭇 아름다운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왕이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남편, 그리고 자기를 그토록 사랑하는 남편만 바라보고 남편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아내, 이 예화를 들으면서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내 마음의 초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 혹시 내 마음의 초점이 세상에 가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저런 세상 생각 때문에 정신이 팔려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던 예수님을 멀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외국이란 땅에 거하고 사느라고 우리 마음의 초점이 예수님이 아닌 엉뚱한 데에 맞추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을 보면 “아니- 이것도 성경인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아주 이상한 성경책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아닌 ‘아가’라고 하는 성경책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쉬르 하쉬림’으로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s)'라고 해석합니다.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 있으면 한번 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것 혹시 연애소설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야한 표현들이 많이 나온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 아가서의 내용은 솔로몬 왕과 한 시골처녀인 술람미 여인과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것입니다. 어찌 보면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연인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당대를 주름잡는 왕이요, 술람미 여인은 목동으로 강렬한 햇볕에 얼굴이 탄 시골 처녀였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아주 순수하게 사랑을 나눕니다. 둘 다 사랑으로 인해 상사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향하여 항상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내 사랑아!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말을 하고 있고, 여러 가지로 사랑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만약 이 책이 단지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에 관한 것이라면 연애소설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이 성경에 포함된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신랑 되신 예수님과 그의 신부되는 우리들과의 사랑을 그린 책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님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시골처녀 술람미 여인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너무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상사병에 걸리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잘난 것이 없고 비천하나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도저히 떠나실 수 없었습니다. 고로 예수님은 그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4:16-20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6-17, 20)
여러분, 사랑하는 연인끼리는 늘 같이 하고 싶습니다. 같이 더 많은 시간을 지내고 싶고, 같이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고, 같이 더 많이 식사하고 싶고, 같이 더 많이 바라보고 싶어 합니다. 즉 사랑하면 초점이 온통 상대방에게 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내가 저 안에 저가 내 안에 있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 몸이 되는 부부의 사랑이요, 신랑 되는 예수님과 신부되는 우리와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의 초점이 신랑 되는 예수님에게 맞추어 있지 못하고 세상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에게 확실하게 맞추어져야 할 초점이 확실하게 맞추어지지 않아 흐릿해지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한눈파는 배우자, 한눈파는 학생, 한눈파는 성도, 한눈파는 애인, 듣기에 별로 좋은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야할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한눈파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말세에는 이렇게 한눈파는 크리스천들이 많이 생긴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돈을 더 사랑하고, 쾌락을 더 사랑하는 크리스천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 같지만 그 마음의 초점, 생활의 초점, 육체의 초점이 엉뚱한 데에 가있는 사람들과는 사귀지 말라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같이 타락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요즘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지내십니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논다.”고 밤이 맞도록 노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도 가장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 유학생의 신분에서 노는 데에 너무 용감하고, 노는 데에 너무 끈질긴 것은 아닙니까? “아니 목사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십니까? 저는 온통 공부하는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공부하는데 초점을 맞추면 공부를 잘 할 것이고, 노는데 초점을 맞추면 놈팽이가 될 것이고, 밤이 맞도록 비디오 보고 채팅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면 결국 눈이 충혈이 되고 몸이 피곤해서 예배에 나오기가 힘이 들 것이고, 기도에 초점을 맞추면 능력을 받고 하나님을 만날 것이고, 복음전파에 초점을 맞추면 당연히 하늘에 상급이 많아질 것입니다. 즉 당신이 무엇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당신의 장래가 결정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일을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6:33) 즉 우리의 초점을 하늘나라에 맞추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이 땅의 모든 것과 하늘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더하여 주시겠다는 놀라운 축복의 약속입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종종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보여주면 나도 믿겠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렘29:13)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네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신4:29) 즉 우리의 마음의 초점, 귀의 초점, 눈의 초점, 생활의 모든 초점이 하나님께 향하면 하나님을 만난다고 성경은 확실히 말씀합니다.
또한 성경은 말세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3:15)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을 믿어도 확실히 믿으라는 것입니다. 한 쪽 발은 세상에, 한 쪽 발은 주님께 걸치고 왔다 갔다 하는 양다리 신앙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모든 초점이 하나님께 향하라는 것입니다. 먹어도 하나님을 위하여 먹고, 굶어도 하나님을 위하여 굶고, 살아도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하나님을 위하여 죽으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의 초점은 온통 예수님과 함께 복음을 전파에 맞추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복음을 전파하다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행26:25, 29)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 세상과 사단은 “네가 미쳤구나!”라고 조롱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의 관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술 마시는 데에 빠지고, 세상 쾌락을 사모하고, 음란과 도박에 물들고, 헛된 것을 좇아가면 “쯧쯧쯧, 미쳤구나!”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초점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예수님에게 맞추어지지 않으면 방황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눈에 초점이 없이 허공을 바라본다든지, 땅을 쳐다보는 사람을 향해 우리는 ‘넋이 나갔다. 정신이 빠졌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 믿으면서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면 정신 빠진 크리스천, 넋이 나간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 나간 크리스천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자고로 훌륭한 학생은 자신의 본문인 공부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어져야 하고,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됩니다. 그러나 세상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찌하든지 믿는 사람들의 초점을 흐리게 하기 위하여 미혹을 합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초점이 멀어지게 하여 타락의 길을 가도록 유도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당신의 초점을 흐리게 합니까? 돈입니까? 세상 쾌락입니까? 세상 근심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초점이 세상이 아닌 주님께 맞추어져야합니다. 즉 우리의 목표가 하늘나라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초점이 하늘나라 확장에 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초점을 바르게 맞추는 성도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무쪼록 이 외국 땅에서 짧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의 사랑하는 예수님과 그의 나라인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살면서 그 분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은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날짜:
200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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