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생길 때

날짜: 
2010/03/15
설교: 

 
마26:36-46 문제가 생길 때에
인천에서 목회하고 계시는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교인들 사이에 인간관계가 너무나 복잡한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십니다.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너무나 심하여 가끔 목사님이 조정하느라고 골머리를 앓는 적이 많습니다. 따라서 가끔 스트레스가 쌓이곤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목사님이 꼭 찾는 곳은 야구장이라는 것입니다. 야구장에 가서 야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리를 터득합니다.
캐처는 투수가 공을 어떻게 던지든지 다 받아서 골고루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좋은 캐처가 아닙니다. 좋은 공이든지, 나쁜 공이든지 상관없습니다. 다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목사님은 다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다 받자. 그리고 남에게 편안하게 나누어 주자." 목사님은 그곳에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 받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는 것입니다. 33살의 청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십자가 지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9명 제자는 멀리 두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만 가까이 데리고 가셔서 깨어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조금 떨어져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그 곳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능력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그곳에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거하시면서 문제만 생기면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것을 습관을 좇아 가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늘 그곳에 가셔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문제 해결책을 찾으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마지막 문제인 십자가의 문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인류 구원의 문제를 이곳에서 해결하셨고, 이 땅에 오신 최고의 목적을 이루실 능력을 이곳에서 받으셨습니다. 겟세마네는 예수님이 그 곳에 가시기만 하면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만 가면 문제가 해결되는 습관적인 곳이 하나씩은 있어야 합니다.
이삭에게는 이런 전설이 흘러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살에 난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명령이라면 어떤 명령도 들은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삭을 바위위에 묶어서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칼을 들었습니다. 죽이려 할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이삭은 죽기 직전에 살아났습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5분만 늦었어도 이삭은 죽었을 것입니다. 그 후 이삭은 어려운 문제만 있으면 자기가 죽을 뻔한 바위를 찾아서 기도하며 매달렸다고 합니다. 물론 전설입니다.
삭개오에게도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습니다.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마치는 매국노였습니다. 돈은 많았으나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고 사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였습니다. 너무나 외로웠기에 예수님을 만나 하소연하고 인생 문제를 해결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예수님을 보려고 해도 예수님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는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뽕나무 밑으로 오셔서 삭개오를 만나 주셨습니다. 남들은 죄인의 집이라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꺼리는데 예수님은 그 집에 가셔서 하룻밤을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지나가시다가 그 집에 머무르신 기록은 삭개오 집 한 곳뿐입니다. 비록 하룻밤이었지만 삭개오의 인생이 바꾸어진 구원의 밤이었습니다. 그 후 일주일 만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습니다. 그 후 삭개오는 인생의 문제만 생기면 뽕나무로 가서 뽕나무를 붙들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의 해답이 떠올라 그곳을 인생의 중심지로 삼았다는 전설입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당신에게는 당신만의 겟세마네가 있습니까? 문제만 생기면 가고 싶어지는 곳이 있습니까? 아프면 찾는 곳이 있습니까? 마음이 외롭고 괴로울 때에 생각나는 곳이 있습니까? 당신의 겟세마네는 바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가 바로 여러분이 엎드리는 자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그 분을 만나면 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를 습관적으로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장소가 좋아서 자주 찾은 것일까요? 겟세마네는 감람산에 있는 곳입니다. 감람산이란 감람나무가 많아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습니다. 감람나무가 많기에 그곳에는 감람유를 짜는 틀이 많았습니다. 겟세마네란 '쥐어짠다.'라는 뜻입니다. 감람열매를 넣고 쥐어짜서 감람유를 만드는 곳이 겟세마네입니다.
예수님은 감람나무를 보러 자주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람유가 몸에 좋다고 감람유 즉 올리브 기름을 드시러 가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만나러 겟세마네에 습관적으로 가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만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사무엘상 9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나귀를 잃어 버렸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승용차를 잃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 곳은 열대지방입니다. 나귀가 승용차입니다. 예수님도 나귀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아들 사울에게 나귀를 찾아보라고 말했습니다. 사울은 나귀를 찾으러 사환 한 명을 데리고 여기 저기 며칠을 다녔습니다. 그러나 나귀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이 사환에게 말했습니다.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삼상9:5)
그랬더니 사환이 말했습니다.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삼상9:6) 그래서 사울과 사환은 그 사람 바로 사무엘에게 갔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보자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나귀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므로 당면한 문제, 그리고 내일의 진로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죄수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로 사형수 아들을 둔 어머니가 제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대통령입니다. 아무리 사형선고를 받았어도 대통령이 특별 사면권을 이용하여 살릴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자식을 둔 어머니는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 할까요?
그러나 사형수를 살릴 권한이 대통령에게 있는지 모르지만 불치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대통령에게 없습니다. 유능한 의사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는 문제는 오직 하나님 그 분을 만나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분 곧 하나님을 만나러 습관적으로 겟세마네를 찾으셨습니다.
3. 그것을 하면 됩니다.
겟세마네, 바로 그 곳에서, 그 분 하나님을 만나, 그것 즉 기도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면 되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속상하는 일, 누구에게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종종 찾아오게 됩니다. 그때 참고만 있으면 병이 되고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렇다고 감정대로 처리하면 경박한 사람이 되고 도리어 문제가 커지고 맙니다. 실수하기 쉽습니다.
미국 대통령 저격범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털어놓고 말할 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살자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친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털어놓을 사람이 없으면 엉뚱하게 사고를 저지르게 됩니다. 남을 죽이거나 자기를 죽이게 됩니다. 그렇기에 문제가 생기면 품고 있지도 말고, 세상적으로 발산하지도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 시원하게 털어 놓는 것입니다.
즉 기도가 해결책입니다. 기도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예수님처럼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하여서는 안됩니다. 내 꿈이 성취되기 위하여 간구하여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은 신성뿐만 아니라 인성을 입으신 고로 십자가에서 죽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 결론은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미국 뉴욕 재활병원 실로암 안과 병원의 벽에 붙어 있는 어느 환자의 글입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하려고 건강을 구하였더니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 지고 싶어서 부요를 구하였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듣고자 성공을 구하였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모든 것을 달라고 구하였더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자체를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는줄 알았는데 내 소원 모두를 들어 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결사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결사적이라는 흔적이 본문에서 발견됩니다. 우선 시간으로 결사적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시간은 모두가 잠자리에 든 시간입니다. 제자들도 얼마나 피곤하던지 다 잠들었었습니다. 그런 시간에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기도 장소도 결사적 장소를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러 경치 좋은 갈멜산으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겟세마네란 '쥐어짠다.'는 뜻입니다. 그 곳에는 감람나무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감람유를 짜는 틀들이 여기저기에 많았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란 이름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 밤에 겟세마네에서 쥐어짜는 결사적인 기도를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는 태도적으로도 결사적이었습니다. 누가복음22:44절에는 예수님의 기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간절히 기도한다는 말은 간이 저릴 정도로 기도하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으면 땀과 피가 나왔을까요?
예수님은 이런 결사적인 기도를 세 번 반복적으로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결사적으로 기도할 시간에 세 번 반복하여 잠을 잤습니다. 기도는 반복입니다. 이루어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하여야 합니다. 승리의 자신이 올 때까지 부르짖어야 합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올 때까지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 결사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새는 날개가 무거워도 그 것으로 인하여 날 수 있습니다. 배는 돛이 무거워도 그것으로 항해합니다. 기차는 화통이 무거워도 그것으로 질주합니다. 비행기는 날개가 무거워도 그것으로 날아갑니다. 어떤 사람이 시계에 달린 추가 너무 무거울 것 같아서 떼어 버렸습니다. 순간 시계바늘이 서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피곤하여도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도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기도 때문에 일어나서 당당하게 갈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능력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는 고민하셨습니다. 심히 슬프셨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나서는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기도하고 나니 이제는 고민이 사라졌습니다. 슬픔도 없어졌습니다. 번민과 망설임도 안녕이었습니다. 이제는 일어나 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도망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이길 수도 있었습니다. 12 영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시키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정면으로 받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행동으로 옮길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 후에 일어난 역사입니다.
결론입니다. 그곳에 가서 그분을 만나고 기도를 하면 해결이 됩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를 하므로 과거의 문제, 오늘의 문제, 미래의 문제, 다급한 문제,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 받고 일어나 힘을 내서 전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