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심리

날짜: 
2007/07/25
설교: 

눅17:7-10 보상심리
며칠 전에 ‘야심만만’이라는 한국 TV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내용을 보니까 어떤 질문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대답하는 것을 알아맞히는 것입니다. 그날 사회자가 말합니다. “한국사람 만 명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이성을 사귈 때 그 이성이 가장 불량스럽게(좋지 못하게) 생각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이 질문에 가장 많은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데이트를 하면서 일일이 따지면서 이해타산적일 때” 예를 들면 데이트 하면서 “밥은 내가 샀으니 그 대가로 디저트는 네가 사야지, 내가 무엇을 선물했으니 너도 나에게 그 대가로 무엇을 주어야지.“라고 계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애인이 가장 불량스럽다는 일순위입니다.
이런 사람을 애인으로 삼으면 상대방은 상당히 피곤할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내가 밥 한 끼 얻어먹으면 다음에는 꼭 이에 대한 보답을 해야지 그 사람의 마음을 달랠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피곤합니까? 이런 사람이라면 차라리 애인이 없는 것이 낫고 데이트고 뭐고 때려치우는 것이 속 편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이해 타산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불량스런 신자가 될 소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내가 당신을 위하여 이런저런 헌신과 봉사를 할 테니 당신도 나에게 이에 대한 대가로 이렇게 저렇게 해주세요.” 이런 정도는 그래도 괜찮은데 그 뒤의 자세가 이렇게 나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하나님, 만약 내 헌신에 제대로 보답해주지 않으면 나 교회 안 다닙니다. 알았지요. 깊이 생각해 보세요.”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협박 공갈하는 심히 불량스런 태도입니다. 옛날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랬습니다. 그들이 애급에서 종살이를 하면서 너무 고통스럽고 힘이 드니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살려주세요. 도저히 못살겠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듣고 모세라는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 사람들을 출애급 시킵니다.
그런데 애급을 탈출하여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가면서 종종 문제가 발생합니다.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물이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뭐라고 합니까? “아니 모세여, 당신 따라서 이렇게 애급을 떠났는데 이게 뭐요? 왜 우리를 이 따위로 대접하는 거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애급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났겠소.”
아니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애급에서 못살겠다고 기도를 했고, 이에 대한 응답을 하나님이 해주었는데, 이제 와서 양식이 떨어져 배가 고프다고, 물이 떨어져 목이 마르다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원망하니 너무 이해 타산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하나님이 먹을 양식을 주고, 물도 주고, 고기도 주니까 또 다시 말합니다. “헤헤헤, 믿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 이런 신앙은 아무래도 본받기에 좀 안좋은 신앙이요, 깊이가 없는 신앙이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보상을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보상이 없으면 헌신도 안하고, 보상이 없으면 예배도 빠지고, 혹 헌신을 했는데 그에 따른 보상이 당장 주어지지 않으면 금방 시험이 들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량스런 경우는 아닙니까?
여러분, 물론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과 충성에 충분히 보상을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꼭 보답을 바라보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생각해 보세요. 옛날 우리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에 놓였습니다. 이때 많은 한국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피를 흘리며 희생을 했습니다. 그들의 그런 희생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희생을 하면 이에 대한 보답으로 나에게 명예가 주어지고 부귀가 다가온다.” 이런 마음으로 희생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생명까지 던지며 그런 희생을 한 것은 단지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인간으로서 마땅히 이루어야 할 의를 이루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즉 우리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착하고 선한 일을 하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지 어떤 보상이 주어지기에 때문에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 캐나다 캘거리에 와서 보니 발란티어(Volunteer)가 참으로 많습니다. 공항에도 많이 있고요, 병원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일을 하면서 어떤 대가와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발란티어는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보다 더욱 친절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이런 정신을 본받을 만 합니다. 이렇게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할 바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정신입니다.
그러나 요즘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키울 때 보면 보상을 안받으면 어떤 일을 안하려고 하는 자녀들을 봅니다. 예를 들면 공부도 보상을 받아야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기 자녀를 공부시키려면 “애야, 너 이번 학기에 점수가 얼마 이상 되면 아빠가 무엇을 사줄게.”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이 동기부여가 되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계기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아이가 공부를 하면서 늘 부모에게 “아빠, 엄마, 나 이번에 점수 얼마 올라가면 무엇 해줄 거야?” 하고 말하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야, 너 위해서 공부하지, 나 위해서 공부 하냐?“
여러분, 자녀들을 공부시킬 때 이렇게 보상을 대가로 하여 교육을 하면 공부는 좀 시키고, 성적은 좀 올라갈 수 있겠지만 이 자녀는 항상 자기의 일에 대한 보상과 대가를 바라는 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보상과 대가가 없으면 착한 일과 의무조차도 안하려고 하는 이해타산적인 아이가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한술 더 떠 이런 부모도 꽤 있습니다. “아이가 밥을 잘 안 먹습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말합니다. ”애야, 너 밥 한 그릇 다 먹으면 엄마가 뭐 해 줄께.“ 이렇게 크는 아이는 자기가 밥 먹는 것이 엄마를 위해 큰 인심을 쓰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엄마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으면 ”나 밥 안먹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밥 먹는 것을 갖고 부모를 협박공갈을 합니다. 이런 자녀가 사회에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가룟 유다가 왜 스승인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예수님이 자기의 헌신에 대한 보상을 이 땅에서 해주지 않고 그냥 십자가에서 죽어 하늘나라로 간다고 하니까 그때부터 “아이고, 내 청춘 누가 보상해주나? 내 청춘을 보상해주지도 못하는 스승이라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에이 모르겠다.” 하면서 스승을 팔아넘긴 것이 아닙니까? 즉 예수님을 따라 다녔는데 그에 따른 보상을 못 받았기에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이미 큰 특권을 얻은 것이요, 천국을 소유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가장 큰 보상과 가장 큰 축복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감사와 만족은 하지 않고 세상적인 명예나 재물이나 칭찬과 같은 것으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히니까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믿을 때 세상적인 것으로 당장 배상을 받으려고 하면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참으로 불량스런 신자가 되기 쉽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교회는 매달 대청소를 합니다. 남선교회는 대성전과 화단 가꾸기, 여선교회는 식당, 청년유학생회는 사무실과 체육관, 중고등부는 도서실과 각 룸, 그리고 유초등부는 잡초제거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린이들이 열심히 잡초 제거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기특하여 그 일이 끝 난 후에 모두 ‘세븐일레븐’에 데리고 가서 슬러피를 사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성도님이 “목사님이 그러면 애들 버릇 나빠지는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는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어서 한 번은 잡초를 제거한 후에 일부러 슬러피를 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한 어린이가 대표로 나와서 저에게 따지듯이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희들 잡초 제거 했는데 슬러피 사주셔야지요.” “어 요것들 봐라.” 그래서 저는 가르쳐 주었습니다. “애들아, 너희들이 잡초제거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 고맙고 감사하여 당연히 하는 것이지, 꼭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란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이것저것을 시키고 부려먹었습니다. 그리고 종에게 사례와 보상을 해주지도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그는 종이고 그 분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주인으로서 종을 부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요, 반면 종으로서 주인의 명령을 따라 주인에게 봉사하는 것은 종의 당연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종으로서 주인에게 봉사한 사람은 비록 자기의 봉사에 대한 배상을 받지 않아도 시험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주인에게 말하기를 “주인님, 당연히 저의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무익한 종을 써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날의 이야기로 쉽게 각색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다른 성도님들이 여러분의 공로를 잘 알아주지 않습니다. 제대로 높여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었습니다. 교회에 다닐 맛이 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 성도의 바른 자세는 이렇다는 것입니다. “주여, 이 무익한 사람을 이렇게 사용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보상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이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큼 우리에게 잘 보상을 해주시는 분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 오산리에 있는 순복음기도원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뚜렷이 들려왔습니다. “다 주었느니라. 알파와 오메가를 주었느니라. 선물도 주었느니라.”
즉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며 시작과 나중이 되시는 독생자 예수님을 주시므로 모든 것을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보상해줄 귀한 선물이 이제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너에게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었으니 그렇게 쩨쩨하고 소소한 것을 왜 주지 않겠느냐?”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우리는 가끔 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엇을 주지 않는다고 시험에 듭니다. 너무도 쩨쩨하고 속 좁은 모습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보상에 대하여 쩨쩨하게 따지면서 시험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통이 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쩨쩨하게 따지면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시키시고, 쩨쩨하게 따지면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 당신은 이미 엄청나게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너무나도 큰 배상을 이미 받은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하늘나라에 가면 당신은 예수님과 더불어 왕노릇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보다 더 큰 배상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생각하기를 이 세상의 부귀영화로도 배상을 받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점에 대하여도 그렇게 신경 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보상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단지 그 방법과 시기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욱 사모해야 할 것은 이 세상에서 잠깐 누리는
부귀영화보다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리는 보상을 더욱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점심이나 저녁을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눅14:12-14)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보상을 바라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주님이 주시는 보상을 바라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보상을 너무 받아 버리면 하늘나라에서 받을 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부탁합니다. 보상에 대하여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보상 때문에 시험 들거나 마음이 언짢아지지도 마십시오. 이미 우리는 넉넉히 보상을 받은 사람들이요, 영원한 천국의 보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의 할 바를 꾸준히 열심히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과 더불어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복된 자리에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