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4:16-20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십계명의 제 일 계명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또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굉장히 싫어합니다. 세상 말로 표현하면 양다리를 걸치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선교하시는 한국 목사님이 한 일본 성도님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집에 들어가니 마당에는 일본 신이 있고, 응접실에는 십자가가 있고, 안방에는 또 다른 신이 있고, 건너 방에는 또 다른 신이 있고... 여러 신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깜짝 놀라서 일본 성도님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섬기면서 어찌 또 다른 신들을 그렇게 많이 섬기고 있습니까?" 그러자 그 분이 대답합니다. "아니, 뭐가 어때서요? 신들을 많이 섬기면 복도 많이 받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의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니, 왜요? 하나님이 질투라도 하시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나쁜 의미로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미로 질투하시는 겁니다." "좋은 의미로 질투하다니요?" "예를 들면 한 여성과 한 남성이 약혼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약혼남이 약혼녀 몰래 다른 이성을 만나서 성적으로 타락하면 그 약혼녀가 대단히 화가 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영적으로 결혼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기면 그것은 음행을 저지르는 것과 같습니다. 고로 하나님을 믿을 때에는 다른 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계명의 제 이 계명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우상에 절하지 말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 여러분,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자신에게 복을 주는 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을 자기 옆에 두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섬기는 신을 만들어 그 신에게 복을 달라고 구체적인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그래야 복이 임할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다가 아테네(아덴)에 이르렀습니다. 도시를 둘러보니 우상이 가득합니다. 심히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을 전도합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17:22-27)
여러분, 사도 바울은 "우리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묻고 싶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나와 어느 정도의 거리에 계실까요? 대략 일 마일 정도 떨어져 있겠습니까? 혹은 달나라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겠습니까? 아니면 저 멀리 펼쳐진 우주의 끝에 계시겠습니까? 이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고로 나와 하나님과의 거리는 1m도 1cm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사실을 확신하며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있을까요?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에 길에서 모르는 한 여성분을 전도했습니다. "예수님 믿으세요?" 그런데 그 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 믿어요. 천주님을 믿어요." 알고 보니 그 분은 천주교인이었습니다. 저는 그 대답을 듣고 한 동안 멍해졌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분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도 한 분입니다.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 한 하나님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학적인 말로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셨고, 신약에는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만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고로 예수님은 믿지 않는데 하나님만 믿는다는 것은 뭘 모르고 믿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님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영으로서 예수님과 동일한 일을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올 것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6-20)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또 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열심히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약속한 성령이 그들 안에 오셨습니다. 성령이 그들의 마음속에 오시자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고로 성령이 마음속에 임한 사람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임한 사람이요, 사도 바울이 말한바 '하나님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내 안에 계신다.'는 표현이 신학적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성령이 누구인지 도무지 모릅니다. 세상은 성령을 보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육체로 이 땅에 재림하시기 전에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고로 성령이 내 안에 임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고 한 말씀을 확실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합니다. '보혜사'란 말은 한자어로 ‘보호할 보, 은혜 혜, 스승 사’입니다. 즉 은혜를 주시고, 보호하시고,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이런 보혜사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과 똑같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보호하시고, 가르쳐주시는 사역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보혜사'라는 단어를 영어로는 'Counselor(상담자)'(NIV), 'Comforter(위로자)'(KJV), 'Helper(돕는자)'(NASB)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협조자'라고 표현하고 있고,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보호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원어로는 '파라크레토스'라고 합니다. 이는 '옆에 계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 옆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옆에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옆에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옆에서 우리에게 상담자가 되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내 옆에서, 내 안에서 나를 직접 위로하시고, 가르치시고, 보호하시며, 도와주시는 은혜를 받으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구만리 장천 하늘 보좌에만 앉아 있는 예수님을 마치 망원경으로 바라만 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외국 땅에서 살면서 여러 모양으로 힘이 듭니다. 어른만 힘든 것이 아니라 솔직히 말하자면 공부하는 우리 자녀들이 더욱 힘이 듭니다.
때로는 죽고 싶어요. 그러나 이때 성령이 그 마음 안에 계신 사람은 속에서 주님이 말씀합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니?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이런 주님의 음성이 순간순간마다 들려오면 낙심하다가도 용기를 얻습니다. 풀이 죽었지만 또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고로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전도할 때 잘 사용하는 18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담배 끊고 싶으세요? 술 끊고 싶으세요? 너무도 쉬운 방법을 가르쳐줄게요. 돈 하나도 안 들어가요. 저도 10년간 담배 피웠는데 하루 만에 담배를 끊었어요." "그게 뭔데요?" "성령을 받는 거예요." "성령이 뭔데요?" "예-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시기 전에 성령을 보내준다고 했어요. 그 약속한 성령을 받으니까 하루 만에 술과 담배가 끊어져요."
여러분, 제가 26살에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금식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니까 담배가 있는 겁니다. 아버님이나 제 누님이 피우셨던 담배 같습니다. 기도원에 있는 동안에는 남의 시선도 있고 해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피우지 않았던 담배가 보입니다. 제가 담배를 뚫어지라고 보았습니다. 갈등입니다.
그때 이상한 소리가 제 안에서 들렸습니다. "뭘 그리 열심히 쳐다보느냐? 그 담배, 치워버려라." 여러분, 제가 성령을 받기 전에는 이런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담배를 보면 그저 "아- 담배 피면 안되는데..." 하는 자조 섞인 말만 되풀이 하면서 계속 담배를 피우는 겁니다. 혹 며칠 동안 담배를 끊어도 다시 환경이 어려워지고, 유혹이 오면 그것을 이기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제 안에 임하니까 누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면 속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야- 너 담배 피면 죽는다." "그래요? 죽으면 안되지! 도망가자." 그렇게 한 동안 주님의 음성이 내 안에서 들려오니까 그렇게 끊기 힘들었던 담배가 저절로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죄를 지으려고 하면 속에서 주님의 책망의 음성이 들립니다. "야- 너 뭐하냐? 돌아서라."
여러분, 이런 음성을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이런 음성이 들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좀 더 예를 들어봅시다. 너무 피곤합니다. 철야 예배에 갈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속에서 말씀합니다. "애야, 일어나라. 같이 가자." 이런 음성을 들으면 대답합니다. "주님, 알았어요. 일어날게요."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의 아무개가 미워죽겠습니다. "에이, 고것 미워서 같이 신앙생활 못하겠다. 내가 교회를 옮기던지 해야지!" 그때 주님이 속에서 말씀합니다. "나는 원수 같은 너를 한 번도 미워한 적이 없었다. 너도 원수를 사랑해야 되지 않겠니?" "주님, 알았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즉 성령이 내 안에 오시면 죄를 책망해줍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회개합니다. 바른 길로 갑니다. 그러나 이런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구절을 펼쳐놓고도 친구를 미워합니다.
여러분, 이론과 실제, 즉 말과 행함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론을 실천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면 안 믿는 사람들에게 말만 잘하는 예수쟁이라고 핀잔을 듣습니다. 옆에서 성령의 도움이 없으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만날 시험을 달고 다닙니다. 불평을 달고 다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감격도 감사도 없어집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지긋지긋해집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설교를 10년을 듣는 것보다 성령을 받고 성령의 깨닫는 마음이 있을 때에 더욱 신앙생활을 잘하게 됩니다. 그 어떤 교회의 세미나나 훈련과정을 수료하는 것보다 성령께서 직접 훈련시키시는 것이 더욱 인격이나 신앙이 자라나게 됩니다. 고로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성령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받도록 노력하십시오.
여러분, 성령은 글자 그대로 거룩한 영입니다. 혹 성령을 받고도 세상의 죄와 더러움에 빠지면 성령이 소멸됩니다. 더 이상 성령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고, 더 이상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로 답답해집니다. 불통입니다. 예수님 믿는 열정이 사라집니다. 예수님께 향한 충성도 사라집니다. 저는 요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 각자에게 부어주시옵소서."
성경의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아는 구절입니다. 마태복음 7:7-11의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이 구절에 나오는 '좋은 것'을 누가복음 11:13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 이 세상에 가장 좋은 선물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신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귀한 선물을 우리들에게 주었다고 다시 빼앗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시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성령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좋은 선물을 받기 위해, 그리고 그 선물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불평과 교만을 물리쳐야 합니다. 음행에서 떠나야 합니다. 크리스천으로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아무쪼록 성령이 마음속에 오셔서 이 외국 땅에서도 하나님 잘 믿고, 그 사명 잘 감당하며 더욱 행복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날짜:
2012/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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