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21:1-6 보호하시는 하나님
한 어린이가 자기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사는 친구의 생일잔치에 초청을 받아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심한 눈보라가 몰아쳐 모든 길이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이런 날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을 내린 아버지는 아이가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빠에게 졸라댔습니다. “아빠, 다른 아이들은 다 올 거예요. 다른 아빠들은 자기 아이들을 다 보내잖아요.” “그럼 좋다. 너도 가거라.” 아버지가 조용히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너무 좋아서 옷을 잔뜩 끼어 입고 눈보라 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몰아치는 눈 때문에 한 발자국 앞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드디어 친구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 초인종을 누르며 자기가 왔던 눈보라 속을 쳐다보니 멀리 사라지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바로 자기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이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아버지는 눈보라를 헤치며 자기 아들의 뒤를 따라왔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비슷한 경우를 겪은 것이 기억납니다. 황량한 광야의 열차 길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누어서 울고 있었습니다. “아니, 이러다가 열차가 오면 이 아이는 꼼짝없이 죽을 텐데... 어쩌면 좋아!” 그런데 아뿔싸 가까이서 열차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아이고, 이 아기가 죽겠구나!”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열차가 지나갔는데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누가 이 아이를 열차 길 밖으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라서 어느덧 청년이 되었는데 혼자 눈보라 내리는 광야 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추워보였습니다. 그리고 쓸쓸하게 보였습니다. 천지가 온통 눈으로 뒤덮여 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청년의 옆에 인기척이 있어 쳐다보니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 말없이 그 청년을 따르는 분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주님이었습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하, 조금 전에 아이가 열차 길에서 죽기 직전에 그 아이를 옆으로 옮겨 놓으신 분이 바로 주님이었구나! 그리고 주님이 이 어린아이가 장성하여 죽을 때까지 동행하면서 보호하고 계시는구나!“
이 사실을 깨닫고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꿈 속에 나온 어린 아이, 그리고 청년이 바로 저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꿈을 기억하면서 눈보라 내리는 추운 캘거리의 겨울 날씨 속을 걸으면서 종종 옆을 바라보곤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주님, 지금 저의 옆에 계시지요. 저와 동행하고 있지요. 저를 보호하시고 있지요.”
여러분, 기나긴 캘거리의 겨울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외국 땅이어서 그런지 어찌 보면 참으로 황량하고 쓸쓸한 곳입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자기 자녀들이 눈보라치는 험한 인생길을 걸어갈 때 지켜보고 계십니다. 동행하고 있습니다. 눈동자처럼 보호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한 천재적인 조각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 예술가는 초라한 다락방에서 살며 자기의 작품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 일을 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에 걸쳐서 하나의 작품을 제작해 오던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도 만지고 있던 조각에서 손을 떼고 피곤한 몸으로 침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은 매우 추운 밤이었습니다. 이 가난한 예술가가 침대에 들어갔을 때, 자기 옆에 서 있는 거의 완성된 조각품을 보자 한 가지 염려가 떠올랐습니다. 이 추운 날씨에 점토에 섞여있는 물이 얼어서 작품을 버리지 않을까 하는 근심이었습니다.
가난한 그의 방에는 제대로 따뜻하게 하는 난로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덮고 있던 이불과 모포로 그 조각 작품을 잘 덮고 자기는 추위에 떨며 그냥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튿날 그 가난한 예술가는 불행히도 추위에 얼어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조각 작품은 무사히 잘 유지되어 지금도 파리의 한 유명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내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은 나에 대해 애착을 갖고 계십니다. 작품에 대해 가장 애착을 갖는 이는 다름 아닌 작가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작가, 어느 조각가 이상으로 자신의 작품인 우리 인간, 바로 저와 여러분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왜 그렇게 애착을 가지냐고 철부지처럼 묻지 마십시오.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애착이 있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에게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가장 값비싼 예수님을 대가로 저와 여러분을 구속하셨으니 어찌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눈을 떼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수평선이 보이는 모래밭 위를 걷는 꿈이었습니다. 긴 모래 길은 자신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보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것, 또 하나는 늘 동행하신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일생을 통해 극심한 고통을 당했을 때마다 모래 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주님, 저와 늘 함께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러자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애야, 그것은 내 발자국이다. 네가 고통 가운데 있었을 때에는 내가 너를 업고 지나왔단다." 할렐루야! 여러분, 성경 공동번역 이사야서 46:3-4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 가문아, 내 말을 들어라. 이스라엘 가문에서 살아남은 자들아, 들어라. 너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는 너희를 업고 다녔다. 모태에서 떨어질 때부터 안고 다녔다. 너희는 늙어가도 나는 한결같다. 너희가 비록 백발이 성성해도 나는 여전히 너희를 업고 다니리라. 너희를 업어 살려내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의 종살이에서 탈출시킬 때 그들 앞에는 광야가 나타났습니다. 독사와 전갈을 비롯해 사나운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추위와 더위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물과 양식도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를 내려주고 반석에서 물을 터트려 그들을 살리셨습니다.
시편 23:1에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러분, 이스라엘에는 깊은 골짜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골짜기에는 여기저기 동굴이 있어 맹수들이 숨어 있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양들과 힘없는 가축들을 공격합니다.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은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면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여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고로 우리는 이 외국 땅에서도 평안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두려워 떨었습니다. 자고 일어나서 보니 아람 나라의 수많은 군사들이 성을 포위하고 엘리사를 잡으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를 알고 엘리사가 묶고 있는 도단성에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를 산에 가득히 배치시켜 엘리사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를 사로잡으려던 군사들이 도리어 엘리사에게 모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고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풀무불에 던져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호하시고 건져내었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보호하시고 구출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곳에 사는 저와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있습니다.
야곱이란 사람을 봅니다. 그에게는 쌍둥이 형 에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형이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보호해 주어야 할 형이 자신을 죽일 날짜를 잡고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형이 원한에 사무쳤든지 부모님도 야곱을 보호해주지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야곱은 도망 길에 오릅니다. 생전 처음 어머니 아버지 품을 떠나게 됩니다. 야곱은 광야 길을 걷고 또 걷다가 피곤하여 지쳐 쓰러졌습니다. 밤이 되었지만 주위에는 인가도 없고 여기저기서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립니다. 그는 주위의 돌을 주워서 베게하며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추위 속에 잠을 청하였습니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돕니다. 그는 두려웠습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는 외국 땅에 가서 어떻게 살 것인가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늘에서 찬란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가 그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야곱을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야곱아,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5)
생전 처음 부모의 품을 떠나 외국으로 향하는 불안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지 않고 보호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지켜졌습니다. 야곱이 외국 땅 하란에서 20년간 생활을 하면서 외삼촌 라반이 야곱을 해치려 하자 하나님은 라반의 꿈속에 나타나셔서 “너는 야곱을 해치지 말라.”고 말씀하시므로 야곱을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러나 20년 타향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형 에서가 20년이 지나도 야곱에 대한 원한을 풀지 않고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곱을 죽이려고 달려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야곱은 너무 다급해졌습니다. 그는 얍복강가에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여, 살려 주옵소서. 저를 죽음에서 지켜주세요.” 야곱이 기도하는 동안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하지 않게 천사가 야곱의 환도뼈를 후려쳤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저를 보호해주지는 못할지언정 이렇게 환도뼈를 치면 어떻게 도망을 갑니까?”
야곱은 천사에게 한 대 맞아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형 에서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400명의 군사와 함께 야곱을 죽이겠다고 달려온 형 에서는 야곱이 절뚝거리는 다리병신이 되어서 자기에게 허리를 굽히고 다가오자 그만 동정심이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옛날의 원한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그 두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울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 야곱의 환도뼈를 치시므로 야곱이 다리병신이 될 때에는 형편이 더 나빠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단지 야곱을 보호해주신 것만이 아니라 형과 화해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 얼마나 하나님의 솜씨가 멋이 있습니까?
이 뿐만이 아닙니다. 야곱이 나이 들어 130살의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때 온 팔레스타인 땅에 7년 동안 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서 굶어죽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야곱의 아들 중 요셉이라는 11번째 아들을 미리 애급에 보내어 그를 국무총리가 되게 하므로 아버지인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기근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호하여 주었습니다. 여러분, 야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여러분, 시골에 가면 암탉이 병아리를 데리고 다니다가 위험이 닥쳐오면 그 날개 아래로 병아리들을 품어서 위험에서 보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그 날개 아래로 우리를 품어서 보호해 주십니다. 주님의 날개 아래 거하는 사람은 고난, 역경, 시련, 환난, 위험, 시험, 원수, 가난, 질병, 악한 자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행복을 소유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행복을 이 외국 땅에서도 넉넉히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보호하시는 하나님
날짜:
200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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