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8:1-10 부활로 재해석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 다니던 제자들과 몇몇 여인들은 극심한 실망 속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일 새벽이 되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궁금하여 예수님이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인들이 천사의 나탐남을 보고 무서워 벌벌 떨며 죽은 사람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마28:5-7)
여인들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기뻤습니다.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알리려고 달려가는 도중에 방금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평안하뇨?” 이 말씀을 들은 여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들고 경배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 우리는 세 가지를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1. 부활로 마귀를 재해석하여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함께 잘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은 먹어도 좋고, 즐겨도 좋은데 오직 선악과 하나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따먹지 말아야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과정을 이스라엘 민속 교훈집인 ‘미드라쉬’는 이렇게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다가와서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하였습니다. 하와는 머뭇거렸습니다. 그랬더니 뱀이 먼저 선악과를 씹어 먹으면서 하와에게 말했습니다. ‘봐라! 내가 먼저 먹었지 않니? 그런데도 안죽었다. 너도 마찬가지다. 죽지 않는다. 먹어보아라.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
하와는 마귀가 선악과를 먹었는데도 죽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서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거짓말이었구나!” 그러면서 하와는 마귀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였으니 먼저 껍질만 먹어보자!” 하와는 선악과의 껍질을 벗겨서 먹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드디어 선악과를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선악과 한 개를 미쳐 다 먹지 못하여서 큰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하와 앞에 죽음의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와는 자기가 큰 사고를 저질렀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자기에게 했던 말이 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우유요, 쏘아버린 화살이었습니다. 하와는 서둘러 선악과를 다 먹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남편 아담에게도 먹게 하여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자기만 죽고 아담이 죽지 않으면 자기가 죽은 후에 아담이 다른 여자와 같이 살 것을 생각하니 싫었습니다. 하와는 남편인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하므로 자기와 같이 죽게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속으로는 큰 슬픔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하와는 드디어 남편에게도 선악과를 먹였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주변의 동물들에게도 닥치는 대로 선악과를 먹게 하였습니다. 모든 동물들도 아담과 하와와 같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선악과를 먹지 않은 동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말함(Malham)’이라고 하는 불사조였습니다. 말함은 하와에게 대들었습니다. “하와야! 너는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는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였다. 그리고 남편도 파멸로 이끌고, 모든 동물들에게도 죽음을 가지고 오게 하였다. 이제 네가 나에게도 그런 파멸을 선물로 주려고 하느냐?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나는 절대로 선악과를 안 먹겠다.”
불사조의 마음은 확고하였습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비롯해 모든 동물들이 다 선악과를 먹었어도 불사조 말함만은 선악과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말함은 자기의 새끼들에게도 선악과를 먹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말함과 그의 새끼들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히 천국에서 지금도 살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성경과는 조금 다른 이스라엘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범죄한 순서대로 피조물들을 저주하셨습니다. 마귀를 상징하는 뱀이 제일 먼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뱀을 저주했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4-15)
그 다음에 범죄한 하와에게는 이런 저주가 내려졌습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
그 다음으로 아담에게는 이런 저주를 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7)
그 후에 마귀는 사망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들을 괴롭힙니다.(히2:14).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마귀는 이제 더 이상
사망권세를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를 향하여 이렇게 외치는 사건입니다. “사망 권세 무효!”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도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6:55)
예수님의 부활로 이제 마귀는 힘을 잃었습니다. 마귀는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무서운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 마귀는 이빨 빠진 곰이요, 발톱을 깎인 호랑이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귀를 패잔병이 되어 쫓겨나는 신세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16:18)
여러분,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마귀를 쫓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마귀를 향하여 담대히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이 원수 마귀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갈지어다.” 이 외국 땅에서도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가려고 하는 마귀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내시기를 축원합니다.
2. 부활로 죽음을 재해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기 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씀은 그 후에도 계속하여 두 번째 세 번째 부활의 열매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고구마 한 개가 땅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그 고구마 줄기를 따라 가면 또 다른 고구마가 줄줄이 달려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미 죽은 사람들이 먼저 육체의 부활을 하고, 우리 살아남아 있는 크리스천들도 이어서 부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일단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천국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육체의 부활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부활은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강림하실 때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자 영의 죽음과 함께 육체의 죽음도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러한 죽음이 정복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영이 다시 살아나서 성령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재림하실 때에 육체의 죽음도 정복하고 부활하게 됩니다. 즉 그때에는 우리의 몸이 썩지 않는 몸, 쇠하지 않는 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몸, 추위와 더위를 이기는 몸, 죄의 영향력에 빠지는 않는 영화로운 몸으로 변하게 됩니다.
주일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은 죽은 예수님을 만나러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우리들도 마침내 부활할 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부활로 삶을 재해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왜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제가 예수님이라면 제일 먼저 나사렛에 갈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슬피 울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위로의 말을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니! 울지 마십시오. 아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혹은 빌라도 궁전으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자리에서 빌라도 궁전까지는 걸어서 5분도 채 안되는 거리입니다. 부활하자 말자 자고 있는 빌라도 침실로 살짝 들어가서 빌라도를 깨우며 이렇게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빌라도야! 너는 내가 죄가 없는 것을 분명히 알고도 나를 군중에 내어 주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 그러나 나는 방금 5분 전에 부활하였단다. 놀랬지?"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갈릴리로 가셔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보면 왜 예수님이 갈릴리로 먼저 가셨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12명은 가룟 유다만 빼고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낙심하여 모두 갈릴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낙심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재사명을 주셨습니다. 다름 아닌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삼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 사명을 따라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야고보가 제일 먼저 감옥에서 헤롯에 의하여 칼로 목을 베임 당하며 순교하였습니다.(행12;1-3)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 당하였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거기에서 죽었습니다. 안드레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빌립은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역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서 그곳에 묻혔습니다. 그래서 로마에는 지금 빌립을 기념하는 빌립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바돌로매는 말년에 브릿지아, 히에라폴리스, 아르메니야 그리고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곤봉으로 심하게 맞았습니다. 그리고 칼로 살갗을 벗기는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의 시체는 자루에 넣어 감옥에 던져 졌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마태복음 한 권을 남기고 에티오피아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잡혀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죽을 때에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주님을 경배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시리아에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는 돌아 맞았는데 죽지 않자 톱으로 몸을 켜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지금 그의 시체는 로마로 옮겨져서 그 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대오는 시리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아르메니아로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시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칼에 찔려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시몬도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전원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사명을 주었습니다. 예수님 부활 전에는 모두들 낙심하고 도망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사명을 받은 그들은 모두 용기와 기쁨을 얻고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쪼록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이 외국 땅에서 사명을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재해석합니다. 첫째, 마귀 존재가 재해석되었습니다. 둘째, 죽음의 의미가 재해석되었습니다. 셋째, 삶이 사명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부활을 외치며 마귀를 이기며, 죽음을 이기며, 사명 속에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로 재해석한다.
날짜:
2008/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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