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3:1-7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도 사랑이시요, 예수님도 사랑이시요, 성령님도 사랑이십니다. 성경에 도대체 ‘사랑’이란 말이 얼마나 나오는가 살펴보았더니 구약에는 234구절, 신약에는 283구절, 도합 517절이 나옵니다.
성경에 이렇게 사랑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사랑이란 기독교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본문에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천사처럼 말을 잘해도 깨갱대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유식하고 똑똑해도 nothing, 즉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아무리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헛수고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 뭐길래 그렇게 사랑을 강조합니까? 오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에 대하여 같이 알아보려고 합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에로스‘입니다. 이것은 남녀간의 성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에로스 사랑은 어느 한쪽이 성적인 장점이나 힘을 잃어버리면 변하기 쉽습니다.
둘째, ‘필레오’입니다. 이것은 친구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도 조건이 따라붙습니다. 친구가 마음에 들면 사랑하지만, 친구가 배신하거나 사기치고 도망가면 원수가 되고 맙니다. 셋째, ‘스톨케’입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녀에 대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사랑도 조건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그 자녀가 반드시 내 자녀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자녀에게는 이 사랑이 성립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넷째, ‘아가페’입니다. 이것은 조건이 따라붙지 않는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이 내 뺨을 치고, 욕을 하고, 사기를 쳐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을 뜻합니다. 고로 앞서 말한 에로스나 필레오, 그리고 스톨케하고는 차원이 틀린 사랑입니다. 앞서 말한 세 가지가 인간적인 사랑이라면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아가페 사랑에 대하여 설명을 하면서 이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4절) 오래 참고, (7절)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즉 ‘사랑=인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가페 사랑에는 대단한 인내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에로스나 필레오나 스톨케 사랑에도 인내가 필요하지요.
성경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라헬이라는 여인을 연애하여 그녀와 결혼하기 위하여 칠년 동안 양을 칩니다. 그러나 그 칠년을 성경에 보니 수일같이 여겼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창29:20) 만약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일이년하고 “에이, 힘들어 못하겠다. 때려치우자!”하고 그만 두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주의 일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당해도, 누가 힘들게 해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인내를 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을 보면 예수님 믿는다고 사자 밥이나, 화형을 당하거나, 여러 가지 악형을 당하는 순간에도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인내를 합니다. 무엇이 그들로 그렇게까지 인내하게 만듭니까? 다름 아닌 주님께 향한 사랑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랑은 말로서가 아니라 인내로서 중명이 됩니다. 인내가 없는 사랑은 가짜입니다. 인내 없는 사랑이란 쾌락에 불과합니다. 인내 없는 사랑이란 자기 합리화요, 또 다른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불순한 시도입니다. 인내가 없이 사랑만 외치는 신자는 사랑의 참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순복음 기도원에 있으면서 한 여인을 상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중년 여인은 상담실에 들어와서도 얼마 동안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눈에는 증오의 눈빛이 역력했습니다. 특히 남자라면 이를 갈 정도로 미워했습니다. 나중에 간신히 입을 열어 자신의 사연을 토해내었습니다. 이 여인은 상당한 미모로 인하여 일찍부터 남자들이 많이 따랐습니다. 그러다 한 믿음 있는 남자와 일찍 결혼을 했습니다. 양가가 다 교회를 다니고 믿음이 있는 집안이기에 이 둘의 결혼을 ‘천생 연분이다’하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꿈같은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끔찍이 사랑해 주었습니다. 아들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다름이 아닌 자신이 폐병에 걸린 것입니다. 워낙 전염성이 있는 병이라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하고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정집 옆에다 방 한 칸을 마련해놓고 병간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병의 차도는 없고 도리어 병색이 더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도저히 회복 불능이라는 판정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가끔씩 방문하던 남편의 발길도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보고 싶은 아들의 얼굴도 못 본지 상당한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죽을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름 아닌 그 병에서 완전히 치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보려고 옛날 자신이 살던 집으로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분명 자신이 살던 집이 맞는데 가구가 조금씩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벽에 걸어 놓았던 결혼사진을 보고 그녀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분명 남편은 자기의 남편이 맞는데 옆에 있어야 할 신부의 모습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집을 황급히 뛰어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폐병에 걸려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하자, 그리고 세월이 상당히 지나게 되자 남편이 그 기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다른 여인과 그만 결혼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낳은 아들도 그 여인을 엄마처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도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사연을 토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어떡할까요?“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그 사연을 듣고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부부들이 인내하지 못하고 이혼을 합니다. 분명 그들도 결혼할 때에는 ”I love you. You love me?" 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키스를 했었을 텐데 그 끝은 왜 안 좋게 끝나고 마는 것입니까? 다름 아닌 온전한 사랑 즉 인내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가정의 행복은 사랑 즉 인내가 필요합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오래 참고(4절),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뎌야만 합니다.(7절) 남편은 아내를 향하여 오래 참아야 하고, 아내도 남편을 향하여 오래 참아야 합니다. 이를 갈고 ‘두고 보자‘ 하고 참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약점과 단점을 그대로 받아주고 인정하면서 참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외치고, 다이아몬드로 그 사랑을 치장해보아도 인내가 없이는 사랑이 결코 성립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내 없는 사랑에는 참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때로는 내 생각대로 축복이 안 오고, 내 만족이 채워지지 않아도, 혹은 힘들고 어려워도 인내할 수 있는 성도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데마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같이 주의 일을 하면서 심한 고생이 되자 그만 인내하지 못하고 쾌락의 도시인 데살로니가로 도망을 갔습니다. 즉 인내하지 못하므로 실패한 제자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성공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사람, 즉 인내를 이루는 자만이 신앙생활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죄인들이 모여 같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온전한 사랑, 즉 인내를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신앙생활의 승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외국에까지 와서 인내하고 산다는 것이 취미에 안 맞을는지 모릅니다. 캐나다에 행복하게 잘 살려고 왔지 인내하려고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외국 생활에서 스트레스 받고 사는 것도 힘든데 인내까지 하고 살면 무슨 희망으로 외국 생활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외국 땅에서도 당신의 행복과 희망과 성공은 인내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 다른 사람들이 조롱한다고 “뭐가 어쩌구 어째?” 하면서 십자가에서 인내하지 않고 그냥 내려오셨다면 어찌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완성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혹은 “아이고, 목말라 죽겠다! 애들아, 냉수 좀 다오!” 하고 인내하지 못하고 그냥 십자가에서 내려 오셨다면 어찌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의 구세주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셨기에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증명이 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사랑을 무엇으로 상대방에게 증명합니까? 달콤한 말로 증명합니까? 혹은 합리적인 판단으로 증명합니까? 아니면 돈으로 증명합니까? 오늘의 성경은 인내로 그 사랑이 증명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 사랑을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짧은 시간에 귀한 사랑을 다 증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괜히 우스운 사람만 되고 맙니다. 그러나 묵묵히 인내하고 오래 참는다면 당신의 사랑은 언젠가 하나님이 인정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여러분, 사랑은 끊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이 중간에 끊어지고 포기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아가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가장 귀한 속성인 아가페 사랑을 깨닫기 원합니다. 아가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는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끝까지 견뎌야만 하는 인내가 있기에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오래 참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곳 외국 땅에서도 오래 참으려고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날짜:
2005/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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