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63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아시다시피 청산가리라고 하는 희고 딱딱한 물질이 있습니다. 이 물질은 아주 독성이 강하여 0.3g정도로도 결정적인 효과를 냅니다. 이를 먹게 되면 대개 몇 초 이내에 감각이 없어지고, 곧 신경계통과 심장에까지 마비가 와서 죽게 됩니다. 또한 테트로도톡신이라고 하는 독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복어의 독으로 치사량이 0.2mg~0.5mg 이 되는 맹독으로 호흡부전과 마비증세를 일으키며 죽음에 이르게 만듭니다.
또한 아코니친이라는 독이 있습니다. 이는 바곳이라는 꽃의 잎과 뿌리에서 얻는 독약으로 치사량 2mg으로 이걸 먹으면 몇 분도 안되서 죽고 맙니다. 그리고 농약을 마시면 거의 바로 즉사하게 됩니다. 또한 니코틴독도 즉사케 만드는 독입니다. 그리고 즉시에 죽이지는 못해도 서서히 죽일 수 있는 독들은 우리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중 약들 중에 '먹지 마시오'라고 쓰여있는 것을 장기복용하면 죽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맹독성 물질들도 잘만 사용하게 되면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약재로 쓰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면으로 인간에게 아주 유익하게 쓰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4:38-44에 보면 사람을 죽이게 하는 독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엘리사 선지자가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길갈이란 곳에 갔습니다. 당시에 워낙 흉년이 심하게 든지라 큰솥에다 국을 끓여 다같이 먹으려고 하는데 한 사람이 모르고 야등 덩굴의 열매를 따서 국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그 국을 먹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엘리사여, 이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그러자 모두들 기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가루를 가져 오라"고 말을 하며 그 가루를 국에 집어넣으니 해독이 되어 다 같이 국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한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국에다 독을 집어넣어 많은 선지자 제자들을 죽일 뻔하였고, 한 사람은 그 독을 제거하는 가루를 가져오므로 해독을 하며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거친 행동이나 잘못된 생각, 또는 잘못된 가르침이나 말이 많은 사람들을 망치고 죽이는 모습을 더러 볼 수 있습니다. 반면 한 사람의 따듯한 말과 올바른 행동과 가르침이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소생케하는 모습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외모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사춘기 소녀에게 "너 참 되게 뚱뚱하다. 어휴, 저 허리 둘레 좀 봐 ! 밥 좀 그만 먹어라 !"라고 말을 한다면 그 소녀는 아마 쇼크를 받아 우리 교회에 나올 마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한 마디 말로 어린 소녀를 실족케 한다거나, 혹은 그 소녀가 자신의 외모를 비관하여 자살을 한다면 그 영혼은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 ? 즉 아무리 사실적인 말이라도 그 말이 상대방을 낙심케 하고 죽이는 말은 쓰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주일 설교를 준비하고 난 후 토요일 저녁때쯤에는 꼭 제 집사람한데 먼저 주일 설교를 해봅니다. 사전에 숙제 검사를 맡는 것이라기 보다는 제 집사람이 주일 학교 교사를 하다보니 주일 설교 말씀을 못 듣기에 미리 은혜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저의 집사람이 은혜를 받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 저는 기분이 굉장히 좋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저의 집사람이 마치 숙제 검사를 하는 것처럼 인상을 쓰면서 "이것이 틀렸어요. 저것이 틀렸어요." 하면 기분이 굉장히 나쁩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책상에 않아 끙끙대며 열심히 준비했더니 자기는 가만히 앉아서 얌체처럼 듣다가 "요것이 틀렸어요. 저것이 틀렸어요."하면 제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당신이 목사하지. 내가 주일 학교 교사할게 !"
물론 요즈음에는 이런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 아마 제 설교가 상당히 늘었던지, 아니면 제 집사람이 포기를 했던지, 아니면 저희 집사람이 저를 낙심시키지 않으려고 거짓으로 은혜 받는 표정을 짓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것은 부부가 살아가는 요령과 지혜인 것 같습니다. 즉 부부간에도 서로를 낙심시키고 죽이는 말보다는, 소망을 주고 살리는 말을 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잠언18:21에 보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즉 한 치밖에 안되지만 우리가 혀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가나안 땅 정탐 사건을 아시지 않습니까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12명의 정탐꾼을 택하여 그 땅을 탐지하러 보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예상한대로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고, 무기를 비축하며, 군사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러한 모습들을 40일 동안 두루 탐지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이 이러한 보고를 합니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우리가 탐지한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리라"(민13:28,32-33)
물론 이 말은 사실적인 보고였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솔직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만 낙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절망감이 그들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사라졌고, 지도자 모세에 대한 신뢰감도 다 떨어지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제까지 자신을 인도해준 모세를 향하여 원망이 쏟아졌고, 드디어는 모세를 죽이겠다고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12정탐꾼은 사실적인 보고, 정확한 보고를 했지만 그 결과는 마귀가 좋아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저주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40년 간 광야에서 지내며 이스라엘의 한 세대가 죽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고를 한 10명의 똑똑한 정탐꾼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민14:37)
여러분, 도대체 이 정탐꾼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 그들이 사실을 말했는데 왜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시는 것입니까 ? 그 이유에 대하여 여러분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12명의 정탐꾼들은 사실적인 말만을 했지, 자신들의 말이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은 그래도 이스라엘의 족장들이었고 대표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말이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생각을 해보아야만 했어야 합니다.
더구나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마당에서 백성들을 낙심케하면,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모세에 대하여 불신을 초래케 하면 그것은 결국 전쟁을 하기도 전에 지게 만드는 것이요, 마귀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심히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도 망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12명의 정탐꾼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이란 두 명의 정탐꾼은 이렇게 보고를 했습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3:30, 14:9)
어찌 보면 이 두 명의 정탐꾼은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 무리하고 무식한 말을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느니, 견고한 산성에서 거인 장정들이 버티고 있는 그곳을 치러가자느니, 참으로 비이성적이고 감정에 치우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알았습니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겪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성상 그들은 조금만 부정적인 말을 듣거나, 절망적인 환경에 부딪히면 곧바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나올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약속의 가나안 땅은 물 건너가는 것이 아닙니까 ? 그래서 그들은 어찌하든지 백성들을 안돈시키려고 했고 그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10대 2로 부정적인 말이 우세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을 잃게 되었고 그들은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사실을 곡해한 어용 정탐군 취급을 당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로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말은 10명의 정탐꾼들처럼 사람들을 죽이는 말입니까 ? 아니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사람들을 살리는 말입니까 ? 당신의 말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는 영의 말입니까 ? 아니면 불신을 조장하는 육의 말입니까 ?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요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즉 예수님은 죽이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살리는 말씀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면서 그를 살리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자 그의 집에 찾아가 "달리다굼 ! 소녀야 일어나라 !" 하시면서 그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청년 아들의 죽자 예수님은 그의 관을 붙잡고 "청년아, 일어나라." 하시면서 그도 살려주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속성은 철저히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살리러 오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고"(사42:3) 즉 예수님은 죽이는 분이 아니라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죽인
강도도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며 말씀하시며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저와 여러분을 죄의 심판에서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를 살리려는 것이지 결코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려는 것이지 저주를 주고 고통에 빠트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지 불행의 주인공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는 생명을 얻었지 사망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는 희망을 얻었지 낙심과 절망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우리에게 이런 귀한 은혜가 주어지기까지에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죽여야만 하는 크나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남을 살리기 위해서는 때로는 내가 희생해야 합니다. 남에게 좋은 것을 주기 위해서는 때로는 내가 나쁜 것을 먼저 택해야 합니다. 남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서 때로는 내 자존심을 먼저 꺾어야 합니다.
나이가 어렸을 때에는 나만 생각합니다. 나만 배불리 먹으면 되고, 나만 사랑만 받으면 되고, 나만 살면 되고, 나만 잘나면 되고, 나만 똑똑하면 되고, 나만 출세하면 됩니다. 그러나 조금 자라면 주위의 사람들도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도자가 되면 남을 살리기 위하여 내가 희생을 합니다. 남을 살리기 위하여 내 기분과 감정을 절제합니다. 남을 살리기 위하여 때로는 나의 지식, 나의 이성, 나의 능력, 나의 실력을 뒤로 감추는 겸손을 배우며 실천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되도록 각자가 노력하십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몸이신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우리의 가정을 살리고, 우리가 속한 사회와 국가가 살고, 그 안에서 우리도 사는 복된 자리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
날짜:
2004/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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