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2:4-11 서로가 달라도 화목해야 한다.
요즘 한국의 뉴스 가운데 가장 댓글이 많이 달리고 네티즌들 사이에 격한 감정을 섞어가며 뜨겁게 논쟁을 벌이는 주제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조성민 씨의 친권에 관한 주제입니다. 참고로 ‘친권’이란 부모가 미성년인 자녀에 대하여 가지는 신분상·재산상의 여러 권리와 의무를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네티즌들 중에는 조성민씨의 그간의 행실을 보아서 그에게 친권을 주면 안된다고 하는 반대파가 있습니다.
그 분들의 의견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발로 차고, 돈을 받고 친권을 포기한 주제에..., 그리고 몇 년간 한 번도 아이들을 보러 오지도 않은 매정한 놈, 그것도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서 최진실을 우울증을 걸리게 하고 자살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천인공노할 놈에게 어찌 자녀를 돌볼 친권을 주느냐?”
그러나 한편으로 조성민 씨에게 친권을 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은데 그 의견들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물론 조성민 씨의 그간의 행동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 아무리 조성민 씨가 나빠도 천륜은 천륜이다. 누가 뭐래도 조성민은 자녀들을 낳은 아버지임을 부인할 수 없고, 지금에 와서 엄마가 세상을 떴기 때문에 조성민 씨에게 친권을 주어야 한다. 만약 아버지로서의 조건과 자격을 따지고 친권을 주느냐 마느냐 하면 이 세상의 많은 아버지들은 친권을 잃어버리고, 그 자녀들은 애비 없는 자식으로 고아가 될 것이며, 그 후에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이런 식의 수많은 댓글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들이 있습니다. 대체로 조성민 씨의 친권을 반대하시는 분들은 여성들과 젊은층입니다. 특히 여성운동가들은 조성민 씨의 친권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면서까지 극구 반대를 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한국의 친권법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조성민 씨의 친권을 찬성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남성들과 노인 분들입니다. 그리고 외갓집과 가까운 분들은 조성민 씨의 친권을 반대하고, 친가집과 가까운 분들은 조성민 씨의 친권을 찬성합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한국 국민들 간의 심한 의견 차이와 함께 격한 감정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서 “이러다가 자칫 나라가 두 쪽이 나겠다!“라는 염려마저 들게 됩니다.
물론 친권에 대한 주제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댓글에 보면 이런 글도 올라옵니다. “여기의 올라오는 댓글들은 왜 이렇게 난이도가 높은지? 별 다섯 개입니다.” “이것은 무지하게 어렵습니다! 전 이 문제에 대해선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옳은지 잘 판단이 안됩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니 서로 간에 심한 논쟁을 피합시다.”
물론 이 문제가 법정으로 가게 되면 어떻게든지 판결은 날 것이고, 그에 대한 사회적 파장과 논란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단지 우리들은 제 삼자로서 이러한 일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시는 분들이 서로 간에 상처를 입지 않고 원만한 합의를 통하여 잘 해결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주제에 대한 댓글들을 보면서 마치 옛날의 기독교 종교토론을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17세기 초엽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격렬한 기독교 종교토론은 오늘날까지도 그 토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칼빈파와 알미니안파 간의 논쟁입니다. 칼빈은 프랑스 사람으로서 현재의 장로교회 교리를 체계화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알미니우스는 네덜란드 사람으로서 현재의 감리교회가 이 사람의 교리를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간의 교리적 차이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할 때에 그 사람의 인격과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작정하신 예정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각각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즉 무조건적인 선택이요, 신학적으로 말하면 절대 예정론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이 누가 예수님을 믿을지 안 믿을지 미리 아시는 그 예지함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을 조건으로 한 조건적인 선택이요, 신학적인 말로 하면 예지예정론입니다.
그리고 칼빈주의는 주장하기를 일단 하나님의 예정을 입어 선택을 받은 사람은 때때로 믿음이 떨어지고 타락할 때가 있어도 결국 하나님이 끝까지 천국에 데리고 간다고 하는 사상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무조건적인 성도의 견인입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죄와 유혹에서 능히 지키시고 보존해주시지만, 인간의 의지로 그 도를 배반함이 있을 때에는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조건적인 성도의 견인입니다.
이러한 두 사상의 차이점은 서로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칼빈주의냐 알미니안주의냐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네덜란드 상황은 칼빈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정치적인 힘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을 이단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알미니안주의자들 중 여러 사람이 죽고, 감옥에도 가고, 파면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곧 이어 알미니안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이 총독이 되자 이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세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정치적 힘으로 진리를 결정지으려고 하고, 상대방을 매도하는 시도는 매우 좋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 사상의 차이점은 모두 성경에 나오는 사상입니다. 성경에는 칼빈이라는 사람이 보았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절대 예정의 사상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알미니우스가 주장한 인간의 의지와 행동도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서 이러한 차이점을 볼 때 우리들이 어떤 태도를 갖느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즉 신앙의 본질과 근본이 위배되지 않는다면 서로를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면 서로가 죽일 놈이 되고, 그 결과 미움이 틈타고 원망이 생겨 화목과 사랑이
깨지는 불행한 결과가 초래되고 맙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일란성 쌍둥이라도 분명 그 둘 사이에는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또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해서 한 몸이 되어 살아도 분명 부부간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주제에 대하여 각각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상대방에게 감정이 섞인 좋지 못한 비난을 하거나, 자기의 의견을 옳게 만들려고 파당을 조성하고 힘을 모아서 상대방을 쓰러트리려고 하는 행위는 성숙하지 못한 시민이요, 성숙하지 못한 인격이요,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하여 “네가 잘되는 지 두고 보자!“ 하는 식으로 서로 간에 인사도 안하고 원한을 맺고 살아가는 것 또한 성숙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요즘은 칼빈주의의 장로교와 알미니안주의의 감리교가 교리상의 일로 서로 싸우거나 다투지 않습니다.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점이 있는 신학을 서로 토의하면서도 상대방을 깔보거나 핀잔을 주지 않습니다. 물론 상대방이 나와 의견을 같이하면 서로 동지애도 생기고 좋겠지요. 그러나 나와 상대방이 의견이 달라도 “아하, 나는 이런 생각을 가졌는데 당신은 그런 생각을 가졌구나! 그럴 수 있지!” 이렇게 인정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어느 날 목공소의 연장들이 회의를 열었습니다. 사회는 평소와 같이 망치가 맡아보았습니다. 그런데 회의 도중 회원 중 몇몇이 반기를 들고 사회자 망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망치는 항상 깨고 부수는 자요, 늘 소란을 피우는 자니 여기서 떠나야 합니다."
그러자 망치가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 스스로도 나의 결점을 인정하므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나와 함께 떠나야 할 자가 있으니 바로 대패입니다. 왜냐하면 대패가 하는 일에는 전혀 깊이가 없고 늘 남의 껍질을 감싸기보다는 벗기기 때문입니다." 이에 화가 난 대패가 말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자(ruller)도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는 자기만 옳은 듯이 항상 남을 측량하므로 모두에게 덕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조용히 듣고 있던 자(ruler)가 벌떡 일어나더니 톱을 지적하면서 말합니다. "톱은 연합 운동보다 늘 분리 운동만 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가장 불필요한 존재입니다." 이 말을 들고 있던 톱은 사포(sandpaper)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사포(sandpaper)! 너도 너무 거칠어."
이렇게 서로가 한창 다투고 있을 때에 목수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목수는 이 모든 연장들을 총동원하여 순식간에 아름다운 설교단을 만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연장들은 서로 약점만을 들추며 다투던 자신들의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모든 연장들이 이처럼 좋은 일에 쓰임 받은 사실에 감탄하면서 “아하- 우리가 모두 나사렛 목수님이 되시는 예수님의 동역자들이구나!”하며 좋아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에 보면 우리는 한 몸에 붙은 지체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루는 손가락 다섯이 모여 자기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엄지(최고, 제일 : 나를 쳐든다), 검지(이것저것, 여기저기), 중지(내가 키가 최고 크다), 약지(반지), 새끼(나 없으면 너희들 다 병신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것 하나도 없다.“ 즉 부모에게는 모든 자녀가 다 중요하고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에 자녀들은 가끔 이런 철없는 생각을 합니다. ”에이, 조것이 괜히 태어나서 아빠 엄마의 사랑을 다 뺏어 가는 구나! 아휴 미워!“ ”에이, 언니하고 형만 없으면 이 맛있는 것이 다 내 것인데! 아휴 미워!“
철없는 자녀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들의 관점이 오직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를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가족 전체 즉 ‘우리‘를 중요시 볼 줄 아는 힘이 있습니다. 만약 자녀들에게 이런 ’우리‘를 볼 줄 아는 마음이 있다면, 그래서 형이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가 형을 귀중히 여긴다면 화목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나라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종종 뉴스에서 어떤 민감한 사안이 나올 때 그에 달린 댓글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댓글을 쓰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무지막지한 상말과 욕을 하면서 스스로 인격 파탄자임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려움에 처한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주고, 같이 염려하고 기도해주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와 의견이 달라도 존경하며 화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서로가 달라도 화목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무쪼록 서로가 달라도 화목을 통하여 주시는 평안과 여유와 행복을 넉넉히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