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한 그리스도인은 0000 않는다.

날짜: 
2024/05/05
말씀: 
요일3:6-9
말씀구절: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설교: 

얼마 전 ‘새롭게 하소서’ 간증 프로그램에서 박경임 필리핀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이 분이 쓴 책 중에 ‘슬픔은 발효 중’이란 독특한 제목과 독특한 내용의 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과 함께 이날의 간증도 엄마와 오빠의 자살로 말미암아 그 뒤에 남겨진 가족들이 겪어야만 하는 쓰라린 고통과 함께 이를 극복하려는 처절한 인생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간증자가 5살의 어린 나이에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가 자기 앞에서 같이 밥을 먹다가 스스로 독약을 먹고 자살을 했습니다. 심한 우울증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빠도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제가 이 간증에 대한 댓글들을 쭉- 살펴보는 중에 제 마음에 ‘어이쿠!’ 하는 댓글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댓글일까요? 바로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0000(자살하지) 않는다.” 즉 너의 엄마가 자살한 것은 믿음이 신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댓글입니다. 제가 이 댓글을 보면서 “아- 그래,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는 영감이 왔습니다.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진짜 그렇습니까? 이에 대한 대답은 조금 있다가 살펴보고, 일단 이 문장의 0000에 ‘자살하지’란 단어 대신 다른 단어를 집어넣어 보십시오. 이건 어떻습니까?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똥을 싸지 않는다.” 이거 맞습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도 다 똥을 쌉니다. 주일하교 초등부 여자 어린이가 자기 교회 목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도 우리처럼 똥을 싸세요?” 제가 여러분에게도 물어봅시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똥을 안 싸고 사시는 분 있으면 자신 있게 손을 들어보십시오.

다들 열심히 똥을 싸고 있군요. 축하합니다. Congratulation! 여러분, 정상적으로 똥을 잘 싼다는 것은 신체의 대사 작용이 원활히 잘 되고 있다는 뜻이요,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똥 싸고 사는 것이 절대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신령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다 똥을 쌉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물어봅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셨을 때 똥을 싸셨을까요? 안 싸셨을까요? 물론 성경에 예수님이 똥을 싸셨다는 성경 구절도 없고, 똥을 안 싸셨다는 성경구절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만약 똥을 안 싸셨다면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의 육체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가 없습니다.

고로 성경엔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식사도 하시고, 화장실에서 똥을 싸셨습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이 신성모독죄에 해당될까요? No.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너무나도 중요한 기독교 진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만약 예수님이 똥을 안 싸셨다고 하면 도리어 심각한 이단이 되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입었을 때는 음식을 먹어도 모두 100% 신체 내에서 완벽하게 소화가 되기 때문에 그때에는 똥을 싸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도 다 똥을 싼다는 겁니다. 그리고 똥을 싼다는 것이 이상한 이야기도 아니고, 명예가 훼손되는 것도 아니고, 더 나아가 죄짓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게 사실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설교 제목에 다른 단어를 대입해 봅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 이거 맞습니까? 틀립니까? 아-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감기에 걸리고 몸살도 걸립니다. 암을 비롯해 여러 가지 병에 걸려서 결국 죽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남들보다 조금 더 건강하게 살 수 있고, 또 죽기는 죽어도 남들보다 조금 더 늦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병이 걸리고 다 죽습니다. 혹 어떤 분은 조용기 목사님이 병들어서 죽은 것에 대해 이런저런 모습으로 시험에 드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중에 “아- 그렇게 신실하신 목사님이 어떻게 병이 들어 죽을 수 있느냐? 남들 병은 잘 고치면서 자기 병은 못 고치네.” 하면서 시험에 드시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아무리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라도 결국 병들어 죽습니다. 그리고 이게 이상한 것이 아니고, 그냥 당연한 사실이고, 당연한 진리입니다.

자- 오늘의 설교 제목에 또 다른 단어를 대입해 봅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는다.” 이거 맞습니까? 틀립니까? 오늘의 본문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리고 본문 9절에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 두 구절을 놓고 보면 신실한 그리스도인,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도 않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진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을까요? 아-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단 중에 오늘의 본문을 토대로 하여 이렇게 주장합니다. “일단 예수님을 믿고 신실한 신자가 되면 더 이상 죄를 짓지도 않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 고로 일단 예수님을 신실히 믿은 후에는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

이거 아닙니다. 여러분, 신실한 신자, 거듭난 신자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다만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이전보다 죄를 덜 지을 뿐이지, 여전히 죄를 짓고 삽니다. 이에 대해 요한일서 1:8,10에 말씀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성경을 보다 보면 이렇게 정 반대로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 제법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신실한 신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신실한 신자도 모두 죄를 짓는다고 합니다. 고로 성경에서 이렇게 서로 충돌되는 구절들이 있을 때에는 이를 종합하여 바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의 비유 중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나옵니다.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블라블라...”(눅18:11-12)

그러나 사람들에게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자기 가슴을 치고 애통해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여러분, 이 두 사람의 기도 중 어느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까?

자신이 죄를 안 지었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함을 구하는 세리의 기도가 바른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요한일서 본문에 나오는 신실한 신자는 죄를 짓지도 않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는 구절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의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19-24)

즉 거듭난 신자, 신실한 신자인 사도 바울도 여전히 죄를 짓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죄를 짓는 것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 속에 거하는 죄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인 나는 더 이상 죄짓기 싫습니다. 나는 죄를 미워하고, 죄를 멀리하려 하고, 죄를 끊으려고 하고, 죄와 싸워 이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됩니다. 왜요? 내 안에 사단이 심어놓은 죄의 뿌리가 너무 깊이 박혀 있어서 자꾸 죄의 싹이 돋아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즉 거듭난 속사람은 죄를 안 짓는데, 죄라는 놈이 자꾸 죄를 짓고 나서 그럴 나에게 뒤집어씌우고 정죄함을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피곤하고 곤고하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2에 이렇게 외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즉 너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죄가 죄를 지은 것이니 너는 죄의 정죄와 심판에서 자유함을 얻으라는 겁니다. 고로 오늘의 본문에 우리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어때요? 좀 이해가 되십니까? 아직도 복잡하고 어렵습니까? 하기야 제가 신학교 다닐 때에도 교수님이 로마서를 강의하면서 이에 대해 설명을 하시면 우리들도 “거- 참, 되게 복잡하네!”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 다시 오늘의 설교 제목으로 돌아가 봅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자살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이 문장에 다른 단어를 대입해봅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 자- 이 말도 사실이 아닙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종종 치매에 걸립니다.

그리고 치매는 결국 뇌가 병이 들었기 때문에 생기는 질환입니다. 고로 일단 치매에 걸리면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도 자기 의지대로 스스로를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하는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자살하려는 충동이 생겨납니다. 뇌의 신경전달물질인 호르몬 작용이 고장 나서 자꾸 이런 신호가 강박증으로 계속 오는 겁니다. 이런 경우 스스로를 컨트롤하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예를 들면 편두통이나 생리통이나 치통이 심하게 올 때 이걸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하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리고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이런 극한 통증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기가 힘듭니다. 이런 경우 그 고통을 줄이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뭐지요? 아- 진통제 몇 알 먹으면 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의사 찾아가서 한번 검진 받아보십시오.

한국의 경우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입니다. 그 중에 그리스도인들도 꽤 있습니다.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자들 중에 자살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을 쓰시고 ‘예수 전도단’ 설립자인신 미국의 유명한 ‘릭 워렌’ 목사님의 막내아들이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대형교회의 ‘인랜드 힐스 교회’의 '앤드류 스토클린(Andrew Stoecklein)' 목사님도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하셨고, 조지아 주의 ‘빕 마운트 자이언 침례교회’의 '테디 파커(Teddy Paker)' 목사님도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하셨습니다.

즉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우울증에 심하게 걸리면 자살할 위험이 매우 높습니다.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요, 의지력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냥 일종의 질환입니다. 이걸 가지고 믿음이 신실하지 못해서, 혹은 의지가 약해서 자살을 했다고 하면 그건 이 병에 대해 잘 모르고 정죄하는 말입니다. 제가 서론에 이야기했듯이 그렇게 댓글을 다신 분도 우울증이란 병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런 댓글을 다셨을 겁니다.

오늘의 결론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병이 들기도 합니다. 이때 그를 정죄하지 마십시오. 스스로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도리어 그럴 경우 서로를 이해하며, 모든 병을 고쳐주시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고 도움을 받도록 하십시오. 아무쪼록 우리의 그 모든 연약함과 질병을 치료해주시고, 그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으시고, 이 외국 땅에서 보다 행복하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주님, 때로는 이 외국 땅에서 우리가 아주 힘들 때가 있습니다. 병에 걸리고, 문제가 생기고, 사고도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당황하지 말게 하시고, 내 곁에서, 내 안에서 항상 나를 돕기 위해 와 계시는 예수님께 그 모든 사정과 형편을 낱낱이 아뢰게 하시옵소서. 주님, 우리를 보시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그리고 그 문제, 이 문제가 보다 완벽히 해결이 되게 하시옵소서. 기적도 일어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