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6하 원칙

날짜: 
2006/08/06
설교: 

신7:7 신앙의 6하 원칙
석 달 전 다운타운에 갔다가 경미한 교통사고가 났었습니다. 중국 타운에 있는 정육점 도매점에서 야유회에 쓸 갈비를 사려고 길거리에다 차를 파킹하고 꼬리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한 트럭 운전사가 자신의 차를 뒤로 파킹을 하다가 제 차의 꼬리 문을 살짝 들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견적을 내어보니 놀랍게도 천 불이 넘게 나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천 불이 넘게 견적이 나오는 사고는 경찰서에 보고를 해야 합니다. 경찰서에 가서 영어로 보고서를 쓰는데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6하 원칙’이란 것이 떠올랐습니다. 6하 원칙인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무엇을, 왜’라는 방식으로 보고서를 쓰니까 아주 간단하고 정확하게 보고서를 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어떤 계획을 세울 때나 사건을 정리할 때 6하 원칙에 입각하여 진행하면 보다 정확하게 계획을 세울 수 있고, 보다 정확하게 사건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6하 원칙에 입각하여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파악하면 그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과 진리를 보다 정확하고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묻습니다. “도대체 언제 입니까? 세상은 언제 생겨난 것이고, 세상의 종말은 과연 언제입니까? 그리고 나의 문제는 언제 해결이 됩니까?”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일 초의 오차도 없이 우주의 질서를 이루시고, 너무도 정확한 시간에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의 시기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게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이 하루 같이 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껏해야 백 년을 사는 인간에게는 이러한 관점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는 내일을 모릅니다. 그리고 한 시즌 밖에 살지 못하는 메뚜기는 내년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시기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 날은 하늘의 천사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교만하여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오판하여 이단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기에 그 일이 천 년이 걸릴 지, 하루가 걸릴 지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축복을 약속하실 때 그 약속은 25년이 지난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야 성취가 되었고, 영적인 자손인 예수님이 탄생하기 까지는 수천 년이 걸렸습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믿다가 낙심하고 실망하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의 시기가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보다 빨리 축복을 받는 줄 알았는데, 그 축복이 기대한 것처럼 빨리 오지 않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고로 하나님의 시기를 너무 좁게 보지 말고 좀더 넓게 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언제?’라는 질문에 스스로 급히 결론과 답을 내리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종종 묻습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캐나다 도시 중 어디로 가야하고, South West, South East, North West, North East 중 어디에 가서 살아야 합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거주의 한계를 정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우주의 별들 중에 지구라는 곳을 지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리가 캐나다, 앨버타, 캘거리에 와서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위해 에덴동산이라는 장소를 지정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살 수 있는 동네를 지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서도 베들레헴이란 탄생의 장소를 지정하셨고, 예루살렘이란 죽음의 장소, 재림의 장소도 지정하셨습니다. 고로 믿음의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당신이 가라는 곳에 가고, 당신이 서라는 곳이 서겠습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에 내가 있겠다는 것입니다.
찬송가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골골짝 빈들에도, 소돔 같은 거리에도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갈 곳을 미리 정해놓고 하나님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손짓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남의 뜻에 반대되는 장소에 일부러 찾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일 날 하나님은 교회라는 장소를 정하시고 이곳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는데 오히려 다른 장소에서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이렇게 예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여러분,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어린이가 좋아하는 장소가 있고, 학생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고, 여자가 좋아하는 장소가 있고, 남자가 좋아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어디서?’라는 질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6하 원칙 중 또 다른 하나는 ‘누가?’입니다. 한국어는 영어와 달라서 주어가 종종 생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어는 “알았습니다. 갈게요.”라고 말하지만 영어는 “I understand. I will go."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때 주어인 'I'를 빠트리면 문장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과 불신자의 대화를 들어 보면 주어의 차이가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모든 행동의 주체가 자기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행동의 주체가 주님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일을 할 때에 불신자들은 ‘내가 원하면’이란 전제가 붙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주님이 원하시면’이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성취했어도 불신자들은 ‘내가 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주님이 하셨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크리스천은 인생을 사는 것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사는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스개 소리로 ‘내가 복음이냐 누가 복음이냐?’라는 말을 합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에는 ‘누가복음’은 있지만 ‘내가복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할 때 주님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체가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바른 신앙은 인간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지, 주님이 나를 따르라고 우기면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주님을 따르겠다는 의미이지 예수님과 하나님이 나를 따라오라고 하면 거꾸로 내가 주님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고집이 되고 맙니다.
6하 원칙 중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라는 것입니다. 방법론의 문제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특히 문제를 푸는 데에 방법이 틀리면 문제가 제대로 풀어지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구원을 받고,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느냐?’ 하는 질문에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입니다. 이 방법이 아닌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구원받지 못하고 천국에 이르지 못합니다.
어찌 보면 크리스천은 방법론에 있어서 상당히 고지식한 면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크리스천은 아주 꼭 막히고 융통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국까지 가는 길이 하나라고 했으니 어찌합니까? 하나님이 천국까지 가는 길이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하면 우리도 융통성을 부릴 텐데 이런 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을 따라야만 합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방법이 때로는 이해가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아무리 똑똑한 인간의 방법보다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이 훨씬 더 좋습니다.
또한 6하 원칙 중 하나는 ‘무엇을?’ 입니다. 즉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크리스천들이 많이 읽고 있는 책 중의 하나가 릭 워렌 목사님이 쓰신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제목의 책입니다. 아시다시피 모든 만물과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적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이나 명예나 쾌락은 우리들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목적이 바르지 못한 크리스천은 거듭나지 못한 크리스천이요 타락한 크리스천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여기 캐나다에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물론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영어 공부하기 위해서, 보다 행복하게 살려고, 자녀 교육을 위해서...” 그러나 이런 목적에 이끌려 이곳 캐나다에 왔다면 크리스천으로서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목적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6하 원칙 중 하나는 ‘왜?’입니다. 연인들 간에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나 사랑해?” “응 사랑해!” “얼마만큼?” “응 하늘만큼 바다만큼!” “정말? 그런데 자기 나 왜 사랑하는데?” 이 질문에 가끔 연인들은 주춤하기고 하고 좀더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만약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응 너가 이쁘잖아?” “그래서 나 사랑하는 거야? 그러면 내가 늙어서 이쁘지 않으면 나 사랑하지 않는 거야?”
상대방이 이렇게 나오면 남성은 그 다음 말이 아주 궁색해 집니다. 즉 ‘왜?’라는 질문에 ‘너가 이쁘기 때문에!’라는 대답은 솔직하지만 그리 좋은 대답은 아닙니다. 이제는 반대로 남성이 여성에게 묻습니다. “자기는 나 왜 사랑하는데?” 이때 여성도 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약 여성이 아주 솔직하게 대답한다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응 자기 돈이 많이 있잖아!” 그러면 남성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이 여자, 내가 돈 떨어지면 도망갈 여자구나!” 물론 여성들은 약아서 이렇게 대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지혜로운 여성은 이렇게 대답을 잘 합니다. “그냥 자기가 좋잖아!” “아니 어디가 어떻게 좋은데?” “아이, 몰라 그냥 좋아!”
여러분, 복음성가 가사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이때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응 너가 돈이 많아서 사랑했단다.” 너가 잘 생겨서 사랑했단다.“ 물론 이 대답은 완전히 틀린 대답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에게는 사랑할 만한 조건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우리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너무도 멍청이입니다. 너무도 더럽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어떤 좋은 조건이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늘 떳떳합니다. 자랑할 만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좋은 조건도 없고 오직 나쁜 조건만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고 사랑을 하신 것도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약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로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께 늘 감사합니다. 우리가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그 분을 늘 신뢰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우리의 생명을 바쳐서 충성하고 헌신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6하 원칙이 있습니다. 그 6하 원칙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시고, 그 분의 사랑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의 6하 원칙을 본받아 더욱 하나님께 헌신하는 가운데 당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이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