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지금 우리가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주일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여기 대성전 피아노 옆에 보면 빨간색의 글자로 Exit(비상구)가 있습니다. 이거 왜 만들어 났을까요?
다름 아닌 예배를 드리다가도 화재와 같은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즉시 예배를 중단하고 이곳을 탈출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비상상황이 발생했는데도, 제가 여러분들을 탈출시키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으라고 하면서, 끝까지 예배를 드리겠다고 고집하면 제가 과연 신령한 목사님일까요? 아니면 이상한 목사님일까요? 예- 이건 이상하다 못해 아주 위험한 목사님입니다.
2014년 4월 18일 한국에서 아주 큰 해양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무슨 사고지요? 예- 세월호 침몰사건입니다. 이 사고로 인해 아까운 생명 304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숨진 것은 당시 세월호가 이미 많이 기울어져 침몰의 위험이 분명히 있는데도 선장이 배에 있는 학생들에게 탈출하지 말고 그대로 배에 남아 있으라고 방송을 한 겁니다.
그러고 난 후 선장은 혼자 그 배에서 탈출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 선장이 좋은 선장입니까? 나쁜 선장입니까? 이 선장에 대해 제가 찾아보았더니 그 후 살인 등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복역 중에 있습니다. 그 당시 그 선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유족들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배가 비싸고 중요하다고 해도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할 수 없습니다. 배는 버려도 사람의 생명은 살려야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명이 중요하면 남의 생명도 중요합니다. 이를 종교에 대입해봅시다. 어느 종교에 있어서나 그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항상 최우선 순위입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제사, 희생, 절기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들 단어를 1000번 이상 언급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들 단어를 예배라는 단어로 대체하여 표현합니다. 즉 구약 시대의 제사와 신약 시대의 예배는 종교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적과 사명 혹은 기능을 5개로 요약하여 분류합니다. 첫째 예배, 둘째 전도, 셋째 교육, 넷째 봉사, 다섯째 친교입니다.
이 다섯 개중에도 첫 번째가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 다섯 개 즉 예배, 전도, 교육, 봉사, 친교는 왜 하는 겁니까?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겁니까?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까? 당연히 살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들 행위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예배(전도, 교육, 봉사, 친교)는 도리어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도리어 믿음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의 정상적인 이성까지 마비시켜 단체적인 비극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오래 전 일인데 한 청년 자매님이 저에게 찾아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 오늘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아니 왜요?” 제가 그 자매님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면서 생각이 드는 것은 이겁니다. “아- 그렇게 대답하면 당연히 면접에서 떨어지지!” 여러분, 이 자매님의 경우 간호사 과정을 수료하고 간호사로 취직을 하려고 면접을 본 겁니다.
그날 면접관이 물었습니다. “당신 여기 간호사가 되면 일요일 근무가 있어서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없을 텐데... 가능하시겠어요?” 이 질문에 믿음이 좋은 그 자매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주일 예배를 절대 빠질 수 없습니다. 항상 예배가 우선입니다.” 여러분, 이 자매님의 대답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참으로 기특하고 믿음이 좋은 대답입니까? 아니면 뭔가 좀 이상한 대답입니까? 다시 한 번 이 자매님의 대답을 잘 들어보십시오. “저는 주일 예배를 절대 빠질 수 없습니다. 항상 예배가 우선입니다.” 아- 이 대답을 따로 떨어트려 놓고 들으면 그 자체적으로 너무나도 훌륭한 믿음의 대답입니다. 목사님들도 이 대답만 따로 떼어 놓고 들으면 “아- 이 분은 참으로 믿음이 좋은 신자구나!”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이분의 경우는 직업이 간호사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언제 생명이 위급한 환자가 발생할지 모릅니다. 고로 그런 상황에 대비하며 근무를 해야 합니다. 물론 종교인에게 있어서 예배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종교인이라고 해도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 생명을 다루는 시간에, 위급 환자를 팽개치고, 예배를 드리러 가면 어떡합니까?
물론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거니까 하나님께 그 환자를 맡기고 자기는 예배드리러 가면 하나님이 기특하게 보시고 그 환자를 내 대신 더 잘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잘못된 판단입니다. 직무유기입니다. 이런 경우 즉 생명과 예배가 충돌이 되면 생명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매님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대답을 하면 면접에서 떨어져요.” 다행히 이 자매님은 금방 언더스탠드를 해서 다음 면접에서는 붙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주일날 예배 오다가 그만 차량 사고가 났습니다.
이때 가벼운 사고 같으면 일단 증거로 현장 사진 여러 장 찍고, 면허증 사진 찍고, 전화번호 교환하고, 상대방에게 “아- 나 지금 굉장히 중요한 일이 있다. 주일 예배를 드리러 가는 중이다. 그러니 나중에 예배 끝나고 내가 다시 연락할게요. 오케이?” 하고 상대방 동의를 구하고 쿨하게 그 자리를 빠져나오면 됩니다.
그러나 그 사고로 인해 사람이 피를 흘리고 크게 다쳤으면 빨리 병원으로 달려가든지, 911을 부르고 응급상황, 비상상황에 신속히 대처해야 합니다. 그럼 예배는요? 아-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이 뭐에요?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상황에 따라 판단을 잘 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배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이런 경우 즉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예배에 빠지는 것을 하나님이 뭐라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해가 잘 안되시는 분이 있을까봐 또 다른 예를 들어보지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안식일에 대해 여러 번 충돌이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왜 주일날 예배 시간에 예배는 안 드리고 딴 짓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내지 않겠느냐?”(마12:11)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눅14:5) 그러면서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눅6:9) 하시며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막2:27-28)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신 목적은 생명을 살리려는 목적이라는 겁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날 예배드리는 목적도 생명을 살리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고로 안식일(주일)보다 사람의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 이게 안식일(주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정확한 해석입니다.
제가 주일 설교를 가능한 짧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좀 재미있게 하려고 합니다. 왜요? 아- 설교 오래하면 솔직히 말해서 많이들 피곤해 하잖아요. 졸리잖아요. 빨리 이곳을 탈출하여 집에 가고 싶고, 놀러 가고 싶잖아요. 아- 때로는 목사님도 그런데 하물며 새신자 여러분들은 오죽 하시겠습니까?
특히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설교를 오래 듣고, 예배를 오래 드리는 것에 대해 인내심이 별로 없습니다. 아- 스마트 폰은 배터리가 다 나가도록 10시간 이상 쉬지 않고 보는데, 예배는 한 시간 이상 드리면 자꾸 시계를 쳐다보고 딴 짓을 합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오래 하든지 예배를 오래 드리면 도리어 부작용이 나는 겁니다. 도리어 은혜를 까먹습니다.
더욱이 초신자나 새신자가 전도되어 교회에 처음 왔는데 그렇게 은혜스럽지도 않은 재미없는 긴 설교로 그 사람을 예배에 오랫동안 붙잡아 두면 그건 큰 범죄행위입니다. 물론 거의 모든 목사님들은 자신의 설교가 굉장히 은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거요. 아닙니다. 거의 다 목사님들의 착각입니다.
저를 비롯해 목사님들은 이 점에서는 빨리 꿈을 깨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깨지 못하고 계속해서 긴 설교로 그것도 예배를 연달아 두 번 세 번 계속 드리면 그건 초신자 새신자를 고문하는 겁니다. “너 나가. 다음부터는 교회 오지 마.”라는 소리입니다. 물론 의도는 좋습니다만 그게 상대적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저의 경우 집사람과 같이 가정 예배를 드리면 보통 기도만 한 시간 정도 합니다. 그리고 새벽 예배 때에도 한 시간 정도 늘 기도합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에 제가 여러분들을 붙잡고 그렇게 한 시간씩 오래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요? 아- 부작용이 뻔한데 내가 바보입니까?
몇 년 전에 우리는 COVID-19이라는 아주 희한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때 목사로서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정부에서 모임 즉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겁니다. 아니-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교회의 존립 자체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면 목사님들도 필요가 없습니다. 아- 참 난감합니다. 뭐야 이거? 어떻게 해야 돼?
그렇다고 당시 COVID-19 초기에 치사율이 높아서 사람들이 막 죽어나가는데 예배에 나오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니- 성도님들이 알아서 싹- 안 나옵니다. 왜요? 아- 죽기 싫으니까요. 만약 그때 제가 여러분들에게 “성도 여러분, 예배는 죽음을 각오하고 순교의 정신으로 나와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여러분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마 몇몇 분들은 큰 소리로 아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멘 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분들은 속으로 뭐라고 할까요? “아- 목사님만 죽으셔요. 저희와 저희 가족식구들은 살고 싶어요.” 혹은 목사님을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했을 겁니다.
아- 참 다행인 것은 그 후 COVID-19 치사율이 떨어지고, 이제는 감기 정도로 변해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니까 천만다행입니다. 이 사태를 겪으면서 저는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만약 COVID- 19보다 더 치사율이 높고 전염력도 더 높은 새로운 전염병이 발생하면 그때는 어떡하지?
아- 뭘 어떡합니까? 그때도 또 정부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지시가 내려 올 테고... 우리는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고... 역사는 그렇게 또 반복될 겁니다. 자- 그럼 예배에 관한 과거의 역사로 한번 돌아가 봅시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왕 때의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 쯤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 왕에게 이렇게 중요한 지시를 합니다.
“왕이여, 왕은 아멜렉을 진멸하소서. 그들이 4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약자들을 많이 죽이고 심히 못되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악행을 기억하사 때가 되면 그들을 멸절시키겠다고 성경에 기록까지 해놨습니다.(출17:14) 그리고 이제 그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왕은 그들을 멸절시키시고, 거기에 있는 짐승들까지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진멸하소서.”
그러나 사울 왕이 욕심이 생겼습니다. 아- 요요 욕심 요거! 요게 항사 문제입니다. 사울왕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아말렉을 진멸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살찌고 좋은 짐승들을 이스라엘 진영으로 끌고 왔습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 선지자가 책망을 하니까 사울 왕이 대답합니다. “아- 왜 그렇게 야단을 칩니까? 저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께 좋은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이때 사무엘 선자자가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게 뭐에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복창)
여러분, ‘순종하다’라는 말은 원어로 ‘후파쿠오’로서 ‘00의(누구의) 아래에서 듣다’라는 뜻입니다. 즉 누구의 아래에서 자신을 굴복시키며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원어의 뜻은 ‘후포타쏘’로서 ‘00(누구) 아래에 자신을 맞추다’의 뜻입니다. 즉 낮은 자가 높은 자의 말을 듣고 높은 자에게 자신을 맞춘다는 뜻입니다.
반면 ‘순종하다’의 반대말인 ‘불순종하다’는 ‘00의(누구의) 곁에서 듣다. 나란히 듣다’라는 뜻입니다. 즉 아래에서 들어야 할 사람이 높은 사람과 같이 동등하게 되려고 옆에서 혹은 나란히 듣고 말하며 대든다는 뜻입니다. COVID-19 치사율이 높을 당시에 정부에서 교회는 당분간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했을 때, 우리가 그 명령을 무시하고 예배를 드리려고 모이면 그건 정부에게 불순종하고 대드는 겁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에게 인간으로서 사고할 수 있는 이성을 주신 하나님마저 저버리는 겁니다. 정부에게 그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자칫 대적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제재를 당하게 됩니다. 즉 자기는 예배를 잘 드렸는데 도리어 벌금을 물고, 감옥에고 가고, 하나님께도 좋은 소리를 못 듣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야- 이 못 말리는 미련퉁이야!”
혹 어떤 분은 이때 이렇게 대꾸합니다. “아니- 왜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렸는데 못 말리는 미련퉁이입니까? 오히려 생명 바쳐 예배를 드린 나에게 상을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래서 제가 바로 조금 전에 말했지 않습니까?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라고요. 여러분, 그 말씀 기억합니까?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즉 자신은 믿음으로 예배를 잘 드렸지만 그로 인해 전염병이 퍼져서 이웃이 죽거나, 그로 인해 불순종의 영이 전염병처럼 번지면 그건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로인해 이웃이 죽었으니 그건 사랑과 반대되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도, 더 나아가 하나님에게도 큰 피해를 끼치는 겁니다.
아- COVID-19 당시에 그랬잖아요. 정부가 지금은 위험하니까 당분간 교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요. 그러나 몇몇 교회가 그것을 무시하고 예배를 드리다가 전염병이 크게 번졌습니다. 그러자 그때 얼마나 교회가 욕을 얻어먹었습니까? 더 나아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까지 크게 욕을 당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좋은 선물을 가지고 온 사울 왕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야- 이 미련퉁이야!” 이 정도가 아니라 이런 심한 말을 들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삼하15:23) 사술의 죄는 잡신의 힘을 빌어서 점을 치는 행위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런 자를 죽이라고까지 합니다. 아주 심각한 범죄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 역시 그렇게 지혜롭다는 솔로몬 왕까지 망하게 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송두리째 망하게 하는 중대한 범죄행위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배를 핑계대고 자꾸 자기 고집을 부리고 불순종하면 그건 큰 죄를 짓고 결국 사울 왕처럼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왕위에서도 쫓겨나고 맙니다.
그런데 본문에 사울 왕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아- 이거 자신의 죄를 잘 깨닫고 잘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뒤이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그런 범죄를 저지른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말을 듣고 그랬습니다.”(삼상15:24) 즉 하나님께 살찐 짐승으로 예배를 드리자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고, 백성들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는 큰 잘못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압도적인 다수결로 그러자고 해서 나는 그 결정에 따른 것이니 오히려 자기는 백성들을 참으로 귀하게 생각하는 아주 좋은 왕이라는 겁니다.(아- 뭐야? 이 새끼 이거?) 아니- 아무리 백성들이 그래도 그렇지, 사울 왕은 자신이 직접 사무엘 선지자에게 미리 들었지 않았습니까? 그러지 말라고요.
그러나 사울 왕이 그렇게 한 것은 솔직히 백성들처럼 자기도 살찐 짐승들이 탐이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자기 사욕을 채우려고 짐승들을 끌고 온 겁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 좋은 짐승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가져왔다고 합니다. 아- 이 말이 맞기는 맞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 짐승들 싫다고 하는데, 왜 자꾸 싫은 음식을 억지로 입에다가 먹이려고 합니까?
즉 제사의 동기, 예배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겁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의도가 많이 섞여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받기 싫어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왜 드리는 겁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싫어하는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예물로, 하나님이 싫어하는 자기 방식대로 예배를 드리면 어떡합니까? 그건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고문하는 것이요, 신성모독입니다.
자- 이제 결론을 냅시다.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대로 예배들 드려야합니다. 그런 의미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겁니다. 어때요? 이 말이 이제 좀 이해가 되십니까? 아무쪼록 예배보다 더 나은 순종을 택하시어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하나님과 같이 인생을 보다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 하나님, 오늘 예배보다 순종이 더 낫다는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아무쪼록 이 유명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귀한 사랑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식대로 사명을 잘 감당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