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날짜: 
2004/02/23
설교: 

제 목 ;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본 문 ; 창세기 20:1-7

오늘의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사람가운데 유독 아브라함을 택하여 큰복을 주셨습니다. 고로 아브라함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은 "그가 하나님께 선택과 축복을 받을 만큼 다른 사람보다 깨끗하고 완전한 의인이겠지 !" 하고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 완전하고 깨끗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도 역시 실수를 많이 했고 죄도 지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거듭되는 실수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이라는 땅에 우거하게 됩니다. 그는 푸른 초원을 찾아 짐승을 먹이는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여러 곳을 이주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우거한 그랄 땅은 블레셋 사람들이 머무는 지방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조상은 원래 거친 바닷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가나안 땅에서 가장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강한 민족인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땅에 들어오자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본문 11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즉 아브라함은 이러한 두려움으로 인해 애굽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똑같이 블레셋 땅에서도 저지르게 됩니다. 그 실수가 무엇입니까 ? 바로 자기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고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고 했던 그 얄팍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블레셋의 아비멜렉 왕 앞에서 똑같은 실수, 똑같은 죄를 범하고 맙니다. 참으로 한심하지요. 나이가 들고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 인격도 변해야 되는데 아브라함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나이가 들었다고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숙해 지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외적으로는 더 점잖아지고 교양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욕망이 더 커지고 돈에 대한 집착이 많아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추해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람이란 어지간한 시련을 겪고 나서도 바꿔지거나 고쳐지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이 있기 바로 직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죄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 받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로 인해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또다시 거짓말을 하는 죄를 짓고 맙니다. 도대체 사람은 언제, 어떻게 변합니까 ? 사람이 2백년을 산다면 성숙해질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거듭 죄를 범하는 것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오점 투성이 인지를 알게 됩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아브라함이 사래를 자기 누이라고 속이고 다닌 것은 이 말씀을 살펴 볼때 다분히 습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다가 한두 번 실수한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엄습해 오면 습관적으로, 과거에 지은 죄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이후로 우리가 가는 곳마다..."라는 말이 이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성경에는 두 번만 기록되었지만 아마 아브라함은 더 많은 곳에서 똑같은 죄를 반복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인간 속에 깊이 뿌리내린 '죄성'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실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선택된 사람이고, 요즘 우리들의 말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 중의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사람중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죄악의 끈질긴 습관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인간의 죄성의 뿌리, 즉 좀처럼 변화되지 못하는 인간의 악한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즉 흑인이 그 피부를 희게 할 수 없듯이 인간은 그 끈질긴 죄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즉 이 세상의 모든 만물보다 더 부패하고 거짓된 것은 바로 너와 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이 말씀은 얼마나 진실되고 솔직합니까 ?

위대한 전도자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똑같은 고민을 토로합니다. 그는 로마를 복음화 하는데 쓰여진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내면 속에 감추어진 죄성에 대해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18-19)
그리고 그는 7장 24절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떤 청교도의 글에 보면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번의 놀라는 때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놀람은 자신의 모든 죄를 값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놀라움입니다.
어떤 죄도 하나님은 다 용서하시고, 어떤 사람도 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 그저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번 놀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고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죄성을 볼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죄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으로 더 심각한 사실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죄의 깊이, 즉 자신의 내면 속에 깊이 뿌리내린 그 죄성으로 인해 탄식하며 아파 본 적이 있습니까 ?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하고 몸부림을 쳐본 적이 있습니까 ?

여러분, 인간적으로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은 거짓말의 죄를 습관적으로 저지른 비열한 사람이요. 그로 인해 당연히 버림받아야 할 사람이요, 실패해야 마땅할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거듭 죄를 범하는 아브라함을 세밀하게 지키시고 보호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아비멜렉 왕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나 남편인 아브라함은 아무런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3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냥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하고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위협합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하고 너무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16-18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라의 일로 인해 아비멜렉의 집에 저주를 내렸는데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닫히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사실상 이 문제에 관하여서는 죄가 없습니다. 윤리적으로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보다 더 깨끗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비멜렉의 집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였습니다.
이때 아비멜렉이 뭐라고 하나님께 말을 합니까 ? "하나님, 나는 이 일에 죄가 없습니다. 아브라함 그 사람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하지 아니했습니까 ?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습니다." 하고 말을 합니다.
이러한 아비멜렉의 항변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무 잘못도 없는 아비멜렉이 사라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아브라함을 편애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편애하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편애하셨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 성경이 아브라함의 죄를 미화하거나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죄를 그냥 넘기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죄는 쉽게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에서 성경이 보여주는 중요한 진리를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징계는 있을 수 있지만 정죄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죄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이상 죄 때문에 정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아브라함은 죄를 짓고도 정죄를 당하거나 저주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든 저주와 정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죄를 범해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땐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듯이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꾸중도 하시고, 마음속에 아픔도 주시고, 심지어 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단지 징계일 뿐입니다. 즉 우리를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일 뿐입니다. 고로 모든 정죄에서 해방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우리가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7절을 한번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으리라"
여러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죄를 짓고 창피를 당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선지자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는지 모릅니다.
자! 한번 이 상황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비멜렉과 아브라함 중에 누가 죄를 지었습니까 ? 아브라함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누가 더 의롭습니까 ? 당연히 아비멜렉입니다. 그리고 누가 창피를 당하는 자리입니까 ?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창피를 당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그는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적인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아니 선지자가 그 모양이냐 ? 선지자 자격이 없다. 차리리 다 집어치워라." 라고 말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윤리적인 것을 들고 나서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해 오히려 "그는 선지자라"라고 말을 합니다.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선지라'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눈은 윤리적인 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죄를 범해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좀 모자라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착하고 의롭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고 사랑 받는 까닭은 택함을 받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본문 (8절) 이하를 보면 아비멜렉왕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데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여러분, 사실 아브라함은 이 일에 대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아브라함의 잘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한 아비멜렉의 항의는 옳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전도할 때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너나 잘 믿어라."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너무나 형편없는 인격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 안믿어도 나같이 살면 된다"라고 말을 합니다. 요즘은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수모를 많이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비멜렉이 거꾸로 하나님의 사람처럼 행하고 있고,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은 변명하고 거짓말을 하는 초라한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해 "그는 선지자라"라고 말을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윤리나 도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깨끗하게 이 땅에서 사느냐 ?"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냐 ?"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사울왕과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윤리를 보지만 하나님은 신분을 봅니다. 사람들은 행위를 보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보십니다. 사울왕에 비해 다윗은 참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죄를 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사울왕은 실패했고 다윗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은 윤리적인 눈으로 사람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윤리적인 눈으로 보자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 보다 훨씬 낫습니다. 사울왕이 다윗보다 훨씬 낫지요.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사울왕은 자신을 위해 살았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습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7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 일에 아무 잘못이 없는 아비멜렉의 집에 저주를 내리고는 "아브라함이 너를 위해 기도해야 네가 살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집의 문제를 아브라함이 해결하도록 하셨다는 것은 정말로 의미심장합니다. 아비멜렉 집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바로 아브라함의 기도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해야 아비멜렉이 살 수 있다는 말이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이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보다 돈이 좀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보다 윤리적으로 조금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윤리적인 것으로는 그들에게 임하는 저주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돈이 좀 있다고 마귀의 저주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답이 없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집에 임한 저주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인 아브라함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의 문제조차도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의 왕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갔지만 노예라는 신분으로 보디발 장군의 집을 움직였습니다. 또한 다윗은 소년이었지만 사울왕과 이스라엘 전 군대가 하지 못하는 일, 즉 이스라엘 나라를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으로부터 건져냈습니다.
사울왕이 밤마다 악한 영에게 시달려 괴로워할 때 다윗은 나이와 학문에 관계없이 사울왕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답을 줄 수가 있었습니다. 의사들이 할 수 없는 것을 그가 해냈습니다.
윤리적으로 보면 성도들보다 더 깨끗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일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부족한 우리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것은 바로 신분 때문이라는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실패한 아브라함에게 그 현장에서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로 아비멜렉의 집안에 임한 하나님의 저주가 떠나가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러분, 성도들의 기도는 이와 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하고 윤리적으로 아비멜렉보다 못해도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집을 치유했습니다. 또한 창세기 18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해 기도했는데 소돔성이 멸망당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사 롯을 그 멸망 중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자신의 속에 있는 죄성 때문에 깊은 절망감에 빠져 본 적이 있습니까 ? 혹은 자신의 모자람 때문에 깊이 낙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 그러나 죄책감에 빠진다든지 자신의 무능함을 보지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윤리적인 완전함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자라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단지 분명한 것 하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만 제대로 붙잡으면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은 모자라는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갈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너와 나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계속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