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2-3 주님, 저도요!
지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3박 4일간 벤쿠버에서 있었던 21회 세계 한인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제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소원하며 고백한 말이 있는데 다름 아닌 “주님, 저도요!”라는 말이었습니다. 시간마다 24명의 강사님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성공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아하,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하나님, 저도 저런 방법을 쓰면 좋겠습니다. 저도 저런 축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남이 나보다 잘하면, 남이 나보다 축복 받으면, 남이 나보다 칭찬을 받으면, 남이 나보다 더 잘생기면, 남이 나보다 더 성공하면 그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그 부러움이 지나치다보면 잘못 질투에 빠져 자신도 불행하고 남에게도 좋지 않는 결과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남이 잘될 때 그것을 본받아 자신에게 잘 적용하므로 자신도 발전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 자리에 섰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란 사람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2-3)
여러분, 우리 주위에 보면 아브람처럼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대할 때 우리들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아하, 하나님이 저 분을 저렇게 축복을 하셨구나! 저 분이 저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더니 저런 축복을 받았네! 나도 저 분처럼 헌신하여 저 분과 같은 축복을 받아야 되겠다.”라고 생각하면 당신도 분명 그 분처럼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사람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며 못살게 굴면 축복은커녕 저주가 임하게 된다는 것이 오늘의 성경 구절입니다. 좀더 쉽게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란 사람에게 복을 내리기로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아브람을 저주하려고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요, 결국 그런 사람은 저주에 빠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축복하려고 하는 아브람을 축복해주면 그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께 같이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저주하려고 하는 악인을 축복하려고 하면 도리어 하나님의 미움을 사서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즉 축복과 저주의 비결 중의 하나는 의인과 악인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을 같이 축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고 그를 축복하면 같이 축복을 받지만, 반대로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을 못살게 굴고 쓰러트리려고 하면 저주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가인과 아벨’이란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이 둘의 아빠와 엄마는 아담과 하와였습니다. 즉 둘은 친형제였습니다. 이 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믿음으로 제사 드린 동생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고 믿음 없이 드린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형 가인이 “아하, 내가 하나님께 제사 드린 것은 무언가 잘못이 있구나! 그리고 동생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신 것을 보니 나도 동생처럼 제사를 드려야 되겠다.” 하는 태도를 가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형제는 같이 복을 받고 사이가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속성을 지닌 가인은 동생에 대하여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아니, 그래도 내가 형인데... 내가 더 복을 받아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갖자 가인은 열등감이 생기게 되고, 자신에게 열등감과 수치를 안겨준 동생이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동생을 밖으로 불러냅니다. 그리고 동생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 그 결과 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동생이 없어졌으니 자신은 하나님께 복을 받고 잘살았습니까? 성경의 가인의 결말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4:11-12)
여러분,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내면세계에 질투심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이런 질투심은 동물들에게도 나타나고 거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혹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까? 형제가 여럿이 있는데 한 형제를 엄마 아빠가 더 사랑하면 그 자녀는 다른 형제들의 질투심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다보면 예기치 아니한 사건이 터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이런 사건이 일본에서 터졌습니다. 유치원 어린이가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이층에서 떨어트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엄마 아빠가 동생을 자기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심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지만 그 결과는 참으로 한 가정을 불행으로 몰아가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저도 가끔 우리 성도님들의 어린 자녀에게 물어봅니다. “너 동생이 있으면 좋지 않니?” “예, 저도 동생이 있으면 좋은데요... 엄마가 동생을 낳아주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는 어린이보다 “저는 동생이 싫어요.”라고 대답하는 어린이가 더욱 많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동생이 생기면 자신이 외면당하고, 자신이 독차지 하는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불행해진다고 계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 역사에 보면 특출한 신하가 나와서 왕의 사랑을 받고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면 얼마 있다가 그 특출한 신하가 쓰러지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다름 아닌 다른 신하의 질투심에서 비롯한 공격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다 보니 나라꼴이 아주 어려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 아가서 8:6절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그리고 잠언서 27:4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질투(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즉 그 만큼 질투의 파괴력이 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파괴하고, 너를 파괴하며, 질투는 가정을 파괴하고, 나라를 파괴하고, 심지어 하늘나라도 파괴하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질투를 품은 사람들의 특징은 남을 비난합니다. 남을 미워합니다. 남의 성공을 싫어합니다. 남이 쓰러지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고로 질투가 센 사람하고는 같이 동행할 수 없습니다. 진짜 친구가 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람을 질투하여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를 쓰러트리려고 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스스로 망하게 되고 맙니다.
고로 우리들에게는 질투를 다스릴 줄 아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사촌이 잘되면, 형제가 잘되면 배 아파하지 말고, 그를 인정하고 축복할 줄 아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이런 아량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어도 이런 아량이 아주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마음이 답답하고, 이런 사람하고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피곤해집니다.
여러분, 질투를 다스리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을 하나 소개합니다. 다름 아닌 자신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남이 축복을 받으면 나도 받으면 되고, 남이 사랑을 받으면 나도 받으면 되고, 남이 가졌으면 나도 가지면 됩니다. 그러기에 질투심을 이기는 방법의 단어는 “주님, 저도요!” 라고 기도하며 자신도 주님께 사랑을 받고, 축복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질투심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갖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나도 받았다.” 라는 것입니다. 나도 주님께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주님께 사랑을 받고 있고, 앞으로도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이 좋은 것을 받으면 나도 주님께 구하여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래서 질투심이 생깁니까? 당신도 “주님, 저도요!”라고 기도하여 하나님께 받으십시오. 혹시 당신의 헌신이 부족하여 하나님이 아직 주시기가 어려우면 더욱 헌신하고 더욱 충성하여 당신도 그 축복의 대열에 동참하십시오.
그러나 못난이는 이런 여유와 바른 생각을 갖지 못하고 질투심으로 인하여 스스로 불행해지고 남들도 파괴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 관악구 봉천동에서 세 자매가 죽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살인범을 잡고 보니 그는 이 사건 외에 8차례에 걸쳐 5명을 더 살해하고 8명을 중상에 빠뜨린 연쇄살인사건 용의자였습니다. 그가 경찰에 검거된 후 왜 그렇게 사람을 죽였느냐고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직장도 못 구하고, 결혼도 못해 화가 나 부자만 보면 죽이고 싶었다." "아이고, 잘났다!“
여러분, 이 사건은 질투로 인해 인간성이 파멸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줍니다. 즉 질투가 들어오면 동생도 죽이고, 동생도 노예로 팔고 인간성이 파멸됩니다. 고로 질투가 센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목사님들의 경우 이런 일들을 많이 당합니다. 하루는 어떤 목사님이 새신자를 아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러자 오래된 신자가 자신은 목사님이 그렇게 반갑게 맞이해주지 않는다고 삐쳐서 교회를 나간다가 합니다. 아마 목사님들의 경우 이런 일들은 누구나 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은 굉장히 조심합니다. 괜히 누구에게 잘해주었다가 질투심이 유발되면 그것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시험안드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질투심을 잘 다스리면 됩니다. 그리고 자신도 받으면 됩니다. 질투심이 아주 자주 일어나는 사람은 자주자주 하나님께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을 유지 수 있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
(마7:7)
이번 21회 세계 한인 목회자 세미나에서 한 목사님이 자신이 성도님들과 함께 아주 좋은 성전을 짓는 이야기를 간증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들 중에 “아니, 그렇게 교회를 크게 지으면 뭐해? 교회 건물이 뭐 교횐가?”라는 식으로 말하며 축하해주기는커녕 질투심으로 인하여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성전을 지으신 목사님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 너희는 이런 성전 짓지도 마라.”
여러분,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술집을 지은 것도 아니고, 나이트클럽을 지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성전을 지었는데 같이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축하해 주어야지요. 그것을 속 좁게 질투하고 비난해서야 말이 됩니까? 따라합시다. “축복해주자!” 할렐루야! 그런데 축복이 잘 안나오면 어떡합니까? 따라합시다. “주님, 나도요!” 여러분, 우리 주위에는 나보다 먼저 축복을 받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질투는 금물입니다. 오히려 그를 축하하며 그에게 주신 축복을 나도 주시옵소서. “주님, 저도요!“라는 복된 고백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저도요!
날짜:
2006/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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