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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혹은 남편이나 아내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전념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떻게 하면 내 자녀를 기쁘게 할까 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10에 보면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 로마서 12:2 하반절에 보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선하게 보시고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매일매일 살아가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물론 남편도 아내도 부모님도 기쁘게 해야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제일로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나도 기쁘게 되고 내 가정도 결국 기쁘게 됩니다.
미국이 200년 만에 어떻게 세계 1등의 나라가 되었습니까? 그들의 조상 청교도들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잘 믿어보겠다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살집을 먼저 지은 것이 아니라 예배당을 먼저 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고 나서 제일 먼저 그 열매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그 결과 그 나라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여기에 우리의 삶의 목적을 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역시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l. 믿음이 있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 1:6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 간에도 서로 의심하고 서로 믿지 못하면 관계가 좋아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반드시 믿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대로 믿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내 대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하나님이요, 예수님도 믿는 자의 주님입니다.
창세기 15:6에 보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착한 일을 많이 해서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일단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일 놀라시고, 감탄하시고, 기뻐하시면서 칭찬하신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는 바로 믿음이 좋은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내 하인이 죽게 되었으니 좀 고쳐 주십시오.” 그 부탁을 듣고 예수님은 그 집에 가서 고쳐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백부장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님이 제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셔도 나을 것을 믿습니다." 이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깜짝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사람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시로 하인이 나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이 많거나, 학식이 많거나, 명예가 있는 높은 사람보다 믿음이 큰 사람을 볼 때 제일 기뻐하셨습니다. 믿음이 크면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믿음이 적으면 하나님을 조금 밖에 기쁘시게 못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에게 큰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하게 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사무엘상 15:22에 보면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 모든 우양(牛羊)이나 생명은 다 진멸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욕심이 생겨서 살찌고 기름진 우양을 살려 가지고 왔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이것을 왜 살려서 가지고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변명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는 것은 점치고 굿하는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해서 제 고집대로 하는 것은 우상에 절하는 자와 같다.” 여러분, 순종하는 자녀를 부모님이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기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사단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합니다. 그러나 순종의 영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합니다. 아무쪼록 순종의 영과 순종의 힘을 얻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요한복음 4:23에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의 특권이요 의무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귀한 특권을 상실한 것이요, 또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상에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아들들이 나옵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업신여겼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도 자기가 먼저 갈취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멸시하다가 결국 전쟁터에 나가서 둘 다 전사했습니다. 엘리 제사장 자신은 아들들이 전사한 소식과 여호와의 법궤마저 빼앗겼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자리에서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늘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섬기기를 좋아하는 사무엘은 하나님을 만나고 위대한 선지자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자고로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시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릴 때도 준비가 안된 불성실한 예배나, 형식과 의식에 치우친 예배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예배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중의 하나는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을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주의할 것은 정성껏 드려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받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말씀을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받는 것도 잘 받아야합니다. 어른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때 부모님이 가르칩니다. ’두 손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때도 공손하게 두 손으로 아멘으로 잘 받아야합니다.
4.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에스겔 33:11에 보면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 죄로 멸망하고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죄에서 돌이켜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목자는 그 잃은 양을 찾기 위해서 산과 들을 헤매다가 마침내 찾았습니다. 너무 너무 기뻐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 큰 잔치를 열고 기뻐했습니다.
또 다른 비유입니다. 한 여인이 열 드라크마 가운데 한 드라크마를 잃었습니다. 그 열 개 중에 하나가 빠지면 한 세트가 형성이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 아홉 개도 병신이 되는 것입니다. 고로 부지런히 그 하나를 찾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잃었던 하나를 찾았습니다. 너무 기쁩니다. “친구들아! 이리와라. 같이 잔치하자.“
또 다른 비유는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외국에서 허랑방탕하게 지냈습니다. 마침내 돈이 떨어지고 그 나라에 큰 경제 불황이 왔습니다. 굶어죽을 지경이 되자 거지꼴을 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기조차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를 아들로 보지 마시고 종으로 써주십시오.”
그러나 학수고대하면서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그 탕자를 위해 송아지를 잡고,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금가락지를 끼우고, 크게 잔치를 베풀며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와 같이 잃었던 사람,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크게 기뻐하신다는 비유입니다. 혹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하나님과 멀어졌습니까?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를 크게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기 위해서 왔노라.” 몇 주 전에 제가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어떤 성도님이 교회에 오지를 못합니다. 왜 못 오는가 보았더니 자기 옷이 더러워서 창피해서 못 오겠다는 것입니다. 그 꿈을 꾸고 제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무개 성도님이 옷이 더러워서 교회에 못 오겠다고 하는데 깨끗한 옷을 한 벌 주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이 제게 이런 깨달음을 줍니다. “너희 중에 내 앞에서 더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깨끗해서 내 앞에 온다고 하면 아무도 내 앞에 올 수가 없느니라. 고로 더러워도 좋다. 실패해도 좋다. 죄인이어도 좋다. 일단 그 모습 그대로 내게 돌아오라. 네가 더러워도 나는 너를 여전히 기뻐한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은 아실 겁니다. 어린 자녀가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가 옷이 더러워졌습니다. 손도 더러워졌고, 얼굴도 까맣게 흙이 묻었습니다. 거지새끼처럼 되었습니다. 엄마가 아빠가 더럽다고 꾸중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집에 돌아가지를 못합니다. 날은 어두워졌는데 의기소침하여 놀이터에서 혼자 쭈그리고 있습니다.
이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아이를 찾으러 미친 듯이 동네를 돌아다닙니다. “철수야! 철수야! 어디 있니?” 그런데 놀이터 한쪽에 어린 철수가 눈물을 흘리며 쭈그리고 있습니다. 부모가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철수야!” 하고 그 더러운 아이를 꼭 껴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깨끗이 씻기고, 다시 깨끗한 옷을 입힙니다. 그리고 다정하게 맛있는 음식을 차려줍니다 “철수야, 배고프지? 많이 먹어라.”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하고 돌아오는 것을 결코 못났다고 조롱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성공하지 못했어도, 합격하지 못했어도, 모든 것을 다 잃었어도, 죄로 인해 더러워졌어도 그 모습 그대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돌아와야 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돌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